삼성전자가 21일 ‘2026년 정기 사장단 인사’를 발표한 가운데 재계에서는 이재용 회장이 사법 리스크를 완전히 해소한 직후 단행한 첫 번째 정기 인사라는 점에서 안팎의 이목이 집중됐다. 

결과는 파격적 쇄신보다는 안정 속의 기술 혁신으로 좁혀지고 있다. 사장 승진 1명, 위촉업무 변경 3명이라는 소폭의 인사가 단행된 가운데 기술 리더십을 극대화하고 책임 경영 체제를 확고히 하려는 치밀한 전략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전영현 부회장과 노태문 사장의 투톱 체제 복원, 그리고 하버드대 석학의 전격 영입이 눈길을 끈다. 삼성전자가 처한 위기 의식과 미래 비전을 동시에 보여주는 결정적인 시그널이라는 평가다.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2인 대표이사 체제의 복원, 책임 경영과 전문성의 결합
이번 인사의 가장 큰 골자는 DS(반도체)와 DX(디바이스경험) 부문의 분리 및 독립적인 대표이사 체제 확립이다. 

지난 3월 한종희 전 부회장의 유고 이후 전영현 부회장이 단독 대표이사로서 전사 경영을 챙겨왔던 비상 체제가 약 8개월 만에 정상적인 ‘투톱 시스템’으로 회귀한 셈이다. 각 사업 부문의 특수성과 전문성을 인정하고 급변하는 글로벌 경영 환경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노태문 사장의 대표이사 등극은 갤럭시 신화에 대한 보상이자 AI 시대의 리더십에 대한 신뢰의 표명으로 보인다. 

노 사장은 2010년 ‘자랑스런 삼성인상 기술상’을 수상하고 만 50세에 사장으로 승진하며 삼성전자 내에서 초고속 승진의 아이콘으로 불려왔다. 특히 지난해 세계 최초의 AI 스마트폰인 갤럭시 S24 시리즈를 성공적으로 론칭하며 모바일 시장의 패러다임을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 및 AI 경험으로 전환시킨 공로를 인정받았다. 

애플의 폴더블 시장 진입 예고와 중국 업체들의 추격 속에서 삼성은 정통 엔지니어 출신인 그에게 DX부문 전체의 지휘봉을 맡기며 ‘AI 컴퍼니’로의 전환을 가속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노 사장이 MX사업부장을 겸직하는 것 또한 급변하는 모바일 시장에서 의사결정의 속도를 늦추지 않겠다는 포석이다.

노태문 사장. 사진=삼성전자
노태문 사장. 사진=삼성전자

전영현 부회장의 유임과 역할 유지 역시 안정에 방점을 둔 결정이다. 

전 부회장은 지난해 5월 반도체 부문의 구원투수로 등판해 HBM(고대역폭메모리) 위기를 수습하는 데 전력을 다해왔다. 이런 가운데 최근 엔비디아 퀄테스트 통과와 HBM3E 공급 확정, 6세대 HBM4 개발 가시화 등 실질적인 성과를 내고 있는 상황에서 수장을 교체하는 것은 불필요한 리스크를 초래할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메모리사업부장을 계속 겸직하게 한 것도 눈길을 끈다. 아직 반도체 초격차 회복이 완수되지 않았다는 위기감의 발로이자 전 부회장에게 끝까지 책임을 다하라는 무거운 과제를 부여한 것으로 해석된다.

전영형 부회장. 사진=삼성전자
전영형 부회장. 사진=삼성전자

파격적인 외부 수혈 ‘순혈주의’ 깬 기술 집착
이재용 회장의 기술 중시 철학은 R&D 조직 수장 인선에서 잘 드러났다. 

삼성전자는 미래 선행 기술 연구의 심장부인 삼성종합기술원(SAIT) 원장에 박홍근 하버드대 석좌교수를 사장급으로 전격 영입했다. 통상적으로 내부 경영진이나 엔지니어 출신이 맡아왔던 관례를 깬 파격적인 인사다.

박홍근 신임 사장은 1999년 32세의 나이로 하버드대 화학과 교수에 임용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2002년 세계 최초로 단분자 트랜지스터를 개발해 네이처 표지를 장식했고 사이언스와 네이처에 5편 이상의 논문을 게재하며 ‘노벨상에 근접한 한국인 과학자’로 불려왔다. 

학계에 머물던 그를 기업의 사장으로 영입한 것은 삼성이 기존의 반도체 기술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얼마나 절박한 심정인지를 보여준다.

특히 박 사장의 전문 분야가 뉴로모픽 반도체와 양자 컴퓨팅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현재의 폰노이만 구조(CPU-메모리 직렬처리)는 AI 시대의 방대한 데이터 처리에 병목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인간의 뇌 신경망을 모방한 뉴로모픽 반도체는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을 ‘꿈의 기술’로 꼽힌다.

삼성전자는 박 사장 영입을 통해 당장의 HBM 경쟁을 넘어 10년 뒤의 반도체 패권 경쟁을 준비하겠다는 장기적인 포석을 둔 셈이다. 이는 이재용 회장이 지속적으로 강조해 온 “세상에 없는 기술을 만들어야 한다”는 특명과도 맥을 같이한다.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소프트웨어 리더십 강화, 하드웨어를 넘어서다
윤장현 삼성벤처투자 대표를 DX부문 CTO(최고기술책임자) 겸 삼성리서치장(사장)으로 승진시킨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삼성전자는 전통적으로 하드웨어 중심의 제조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다. 그러나 윤 사장은 서울대 전기공학과와 조지아공대 박사 출신으로, 삼성전자 내에서 보기 드문 소프트웨어 플랫폼 전문가다. MX사업부에서 타이젠 개발과 IoT 서비스 팀장을 거친 그는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결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윤 사장의 CTO 임명은 삼성의 미래가 단순한 기기 제조가 아닌 연결된 경험에 있음을 시사한다. 스마트폰, TV, 가전 등 삼성의 방대한 하드웨어 생태계를 AI와 로봇 기술로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것이 그의 핵심 과제가 될 것이다. 

특히 벤처투자 대표를 역임하며 쌓은 안목을 바탕으로 외부의 유망 스타트업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거나 M&A를 추진하는 등 ‘오픈 이노베이션’ 전략이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삼성리서치가 단순한 연구 조직을 넘어 기술 사업화의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

HBM. 사진=갈무리
HBM. 사진=갈무리

사법 리스크 해소 후의 첫 그림
이번 인사는 이재용 회장이 국정농단 사건과 삼성물산 합병 관련 사법 리스크에서 법적으로 자유러워진 후 단행한 첫 정기 인사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그리고 재계에서는 정현호 부회장이 이끄는 사업지원TF의 변화나 대대적인 물갈이 인사를 예상하기도 했다. 

이 회장은 급격한 변화 대신 실리를 택했다.

지정학적 분쟁, 글로벌 공급망 불안, 미중 기술 패권 경쟁 등 대외적인 경영 환경이 그 어느 때보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조직을 흔드는 것은 득보다 실이 크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검증된 리더십(전영현, 노태문)에게 힘을 실어주어 경영의 연속성을 보장하고, 그들이 마음껏 성과를 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것으로 풀이된다. 

동시에 R&D 분야에서는 외부 인재를 과감히 수혈함으로써 조직에 새로운 긴장감을 불어넣고, 미래 기술 확보에 대한 강력한 드라이브를 거는 큰 그림이다.

한편 사장단 인사가 안정과 기술이라는 청사진이라면 조만간 발표될 임원 인사와 조직 개편은 그 그림을 채울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 될 전망이다. 

사장단 변화 폭이 작았던 만큼 임원 인사에서는 ‘성과주의’에 입각한 대대적인 발탁 인사가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특히 정체된 조직 문화를 쇄신하기 위해 3040 젊은 리더들의 전진 배치가 예상된다.

무엇보다 DS부문의 경우 파운드리와 시스템LSI 사업부의 적자 탈출과 경쟁력 강화가 시급한 과제다. 이번 사장단 인사에서는 해당 사업부장들의 교체가 없었지만 하위 조직 개편을 통해 실무급에서의 변화를 꾀할 가능성이 높다. DX부문 역시 가전(DA) 사업의 수익성 개선과 로봇 등 신사업의 구체적인 성과 창출을 위한 조직 재편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