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2035년까지 2018년 대비 온실가스 배출을 53~61% 감축하는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를 최종 확정했다. 글로벌 권고 수준을 반영해 상한을 높였지만, 산업계는 “기술·재원·제도가 뒷받침되지 않은 선언”이라고 반발하고 있으며 환경계는 “폭이 지나치게 넓어 실질적 목표가 불명확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정부는 산업계 부담 완화와 녹색산업 육성을 병행하겠다는 입장으로 정책의 실효성과 구체적 로드맵 제시 여부가 성패를 가를 것으로 전망된다.
10일 정부가 대통령 직속 2050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 심의를 거쳐 2035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를 2018년 대비 53%~61% 감축하는 방안을 최종 의결했다. 이는 당초 정부가 제시했던 목표 범위(50~60% 또는 53~60%)보다 상한선이 1%p 상한된 수치다.
위원회는 이번 의결이 전날 열렸던 고위 당정협의회의 공감대와 같은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전날 당정은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협의체(IPCC) 권고, 헌법재판소의 기후 위헌 결정 취지, 국내 산업 여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김민석 총리는 회의에서 “전문가, 시민사회, 국회 등 각계 의견을 수렴해 53%를 최소로, 61%를 최대로 설정했다”며 “단순 감축 의무가 아닌, 탈탄소 전환을 가속화하고 산업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NDC 목표 상한선인 61%는 유엔 IPCC가 지구 온도 상승 폭을 1.5℃ 이하로 억제하기 위해 전 세계에 권고한 온실가스 감축률을 한국 기준연도(2018년)에 맞춰 적용한 수치다.
파리협정 채택 10주년인 올해 각국은 2035년 NDC를 제출해야 하며 국제사회는 1.5℃ 목표 달성을 위한 ‘최대치’의 노력을 기대하고 있다. 정부는 상한을 61%로 제시함으로써 국제사회에 한국의 '강력한 감축 의지'를 공표하겠다는 의미다.
박수현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은 고위당정협의회 결과 브리핑에서 “우리 정부의 감축 이행 계획이 담대하고 의지가 강력하다는 것을 세계에 공표할 필요성이 있다”며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방향을 표출하는 방향에서 정해진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NDC 목표 하한선인 53%는 2050년 탄소중립(온실가스 순배출량 0)을 목표로 2018년부터 매년 같은 비율로 온실가스를 줄여갈 때(선형 감축 경로) 2035년에 달성해야 하는 감축률이다. 지난해 헌법재판소는 기존 2030 NDC(2018년 대비 40% 감축) 목표가 미래 세대의 기본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며 온실가스 감축 의무의 법적 강제성을 부여한 바 있다.
산업계 “韓 기술 충분치 않아…정부 제도 지원 필요”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제조업 중심의 산업계에서는 이미 강한 반발이 제기되면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한국 산업은 철강, 석유화학 등 탄소 다배출 제조업 비중이 높게 차지한다. 산업계는 당초 현실적인 감축 목표를 48% 수준으로 제시해 온 상황에서 “상당한 부담”이라는 입장이다.
대한상공회의소를 비롯한 한국경제인협회,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경제단체 및 한국철강협회, 한국화학산업협회, 대한석유협회 등 업종별 협회는 이날 “기후위기 대응 필요성에는 전적으로 공감하지만, 아직 산업부문의 감축 기술이 충분히 사용화되지 못한 상황”이라며 “2035 NDC를 53~61%까지 상향조정한 것이 산업계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입장문을 냈다.
특히 정부가 규제보다 인센티브 중심의 제도적 기반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조속한 혁신기술 개발과 상용화를 위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필수적이라는 입장이다.
최근 인공지능(AI)시대 전력수요 급증과 전기요금 인상도 우려했다. 산업계는 “전기요금 인상 폭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미리 제시해 대비할 수 있도록 하고, 감축 부담이 큰 업종에는 실질적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는 반도체·AI 등 첨단산업과 철강·석유화학 등 기간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유지를 위해 ▲무탄소에너지 인프라 확충 ▲송배전망·저장설비 확대 ▲전기화 및 수소환원제철 기술 상용화 지원 ▲저탄소 시장 조성 및 KS제도 개선 등 포괄적 정책 패키지가 필요하다는 제안이 제시됐다.
산업계는 “정부가 균형잡힌 정책을 통해 환경과 경제의 공존, 탄소 감축과 산업 성장 선순환을 구현해야 한다”며 “경제계도 정부의 K-GX(한국형 녹색전환 전략)에 발 맞춰 기후위기 대응에 적극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지난 8일에도 대한상의 및 철강·화학 등 8개 협회는 정부에 제출한 공동건의문에서 기후에너지환경부가 논의 중인 4차 배출권거래제 할당계획(안) 역시 2030 NDC와의 정합성이 맞지 않으며 과도한 감축률을 적용했다고 지적했다.
주요 업종별 협회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철강·정유·시멘트·석유화학 4대 업종 18개 기업의 4차 계획기간(2026~2030년) 동안 필요한 배출권 추가 구매 비용이 약 5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화학산업협회 관계자는 “2035 NDC는 2030 목표보다 상당히 강화된 것 같다”며 "감축을 하기 위한 수단이나 재원, 재정, 제도 이런 것들이 지금 정확하게 마련돼 있지 않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석유화학업계만 해도 배출권거래제 대상 기업은 110여 곳에 달한다. 그는 “누가 어느 기업이 얼만큼 줄여야 되는지 명확하게 정리된 게 없다”며 “정부가 상향식 검토 없이 하향식으로 내리꽂는 방식이라 감내하기 힘든 정도의 수준"이라고 토로했다.
환경계 “범위만 넓힌 선언…사실상 하한선 중심”

환경계는 정부의 2035 NDC 확정에 대해 “형식적으로는 상한을 61%까지 올렸지만, 실제 정책 이행은 하한선(53%) 수준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고 비판했다.
윤세종 플랜1.5 변호사는 “53~61%라는 폭이 지나치게 넓어 실질적인 목표가 불명확하다”며 “정부는 이미 각종 정책·규제를 하한 53% 수준으로 맞추겠다고 밝혀 사실상 상한(61%)은 생색내기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헌법재판소가 지난해 기후위헌 결정을 내린 이후에도 정부의 감축 정책 강도는 변하지 않았다”며 “기후위기 심화 현실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 ‘형식적 상향’에 그친 것은 헌재 결정 취지를 무색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산업계의 요구를 고려한 폭넓은 수치 제시는 결국 ‘양쪽 다 만족시키지 못하는 절충안’이 됐다”며 “정부가 높은 목표를 제시한 척하면서 실제 이행은 낮은 수준으로 가려는 것은 기후 리더십에 역행한다”고 강조했다.
정부 지원책, ‘구체적 로드맵’이 관건

한편 산업·수송·건물·발전 등 부문별 감축 비중은 아직 구체적으로 공개되지 않았지만, 정부는 산업계 부담을 낮추기 위한 추가 지원 방안을 마련해 산업계 우려를 타개한다는 입장이다.
탄소 배출량이 많은 제조업 중심 산업 구조 여건과 감축 기술의 실현 가능성을 고려해 산업 부문에 대해서는 감축 부담을 완화겠다는 것이다.
새로운 산업지원 청사진인 ‘KGX 녹색전환전략’도 수립한다. 당정은 기업의 탈탄소 산업 전환 지원 및 녹색 산업 육성을 뒷받침하고 석탄발전소와 내연차 업계 등 기존 산업 및 노동자, 지역사회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향도 논의하기로 했다.
정부의 지원 방침을 산업 현장에서 실효성 있게 구현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로드맵 수립이 향후 과제일 것으로 보인다.
한국화학산업협회 관계자는 “현재는 큰 덩어리로만 제시된 상태”라며 “철강은 얼만큼, 석유화학은 얼만큼 줄여야 하는지 등 업종별 세부 감축 목표가 나오지 않아 현장의 이행 계획 수립에 어려움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현재 설정된 산업 부문 목표(약 25%)가 사실상 배출 최소화와 생산 가동 조정을 통해서만 달성 가능해 보이는 만큼, 정부가 목표 달성을 위해 현장의 상황을 반영한 책임 있는 이행 계획과 세부 로드맵을 조속히 제시해 줄 것”을 당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