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기적'을 이끈 대한민국 산업화 시대의 마지막 거목 중 한 명이 영면에 들었다. 한국 비철금속 산업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맨주먹으로 시작해 고려아연을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올려놓은 최창걸 명예회장이 6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고려아연에 따르면, 최 명예회장은 최근까지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으며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히 눈을 감았다. 임종의 순간에는 평생의 동반자인 부인 유중근 여사(전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아들 최윤범 고려아연 대표이사 회장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고인의 장례는 평생을 헌신한 회사에 대한 예우와 산업계에 남긴 지대한 공로를 기려 7일부터 4일간 고려아연 회사장(會社葬)으로 엄수된다. 한평생 회사를 자식처럼 여기고 일군 창업 세대에 대한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상징적인 의식이다.
이제중 고려아연 부회장이 장례위원장을 맡아 장례 절차를 총괄한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실에 마련되며 7일 오전 10시부터 각계의 조문을 받는다. 고인의 땀과 열정, 그리고 수많은 임직원의 희로애락이 서린 고려아연 서울 본사에서는 오는 10일 오전 8시, 영결식이 거행될 예정이다.
그의 영면은 단순히 한 위대한 기업인의 퇴장을 넘어 전쟁의 폐허 위에서 기술과 집념 하나로 국가 기간산업의 지형도를 바꾸고 세계를 호령했던 한 시대의 명예로운 마감을 의미한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위대한 여정
최창걸 명예회장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활동을 시작했던 1970년대 대한민국의 시대적 배경을 먼저 돌아봐야 한다.
말 그대로 참혹한 시대였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국토, 변변한 부존자원 하나 없는 척박한 땅. 산업화는 이제 막 걸음마를 떼고 있었고 제련과 같은 자본집약적 기술산업은 그야말로 상상하기 힘든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의 부친은 고(故) 장병희 창업주와 함께 영풍그룹을 설립하며 '한지붕 두가족'이라는 독특한 동업 신화를 썼다. 그리고 1941년 황해도 봉산에서 영풍그룹 공동 창업주인 고(故) 최기호 창업주의 장남으로 태어난 최창걸 명예회장은 국가 재건의 사명감을 운명처럼 안고 태어난 세대였다.
1974년 국가 경제의 중추가 될 중화학공업 육성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고려아연이 독립 법인으로 출범하면서 최창걸 명예회장의 역사는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다. 모두가 수입에 의존하던 비철금속의 국산화라는, 당시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던 도전에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기 때문이다.
당시까지 전통적인 아연 제련 방식은 원광을 녹이는 과정에서 환경오염의 주범인 황산가스와 비소, 카드뮴 등 유독성 물질이 포함된 막대한 양의 찌꺼기(잔재물)를 배출하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며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서구의 선진 제련소들조차 이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해 막대한 환경 비용을 지불하고 있었다.
최 명예회장은 전혀 다른 도전을 택했다. 바로 TSL(Top Submerged Lance) 공법이다.

TSL 공법은 용광로 속 쇳물에 잠긴 특수 창(Lance)을 통해 산소를 고속으로 불어넣어 폐기물마저 완벽하게 재처리하는 혁신 기술이다. 그러나 높은 수준의 기술력을 필요로하기에 '꿈의 기술'로 불리고 있었다.
최 명예회장은 그 꿈의 기술을 향해 돌진했다. "남들이 못하는 것을 해내야만 살아남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경쟁력이 될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 아래 회사의 명운을 건 R&D 투자를 단행했다. 수많은 임직원이 밤낮없이 연구에 매달렸고, 수차례의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그의 기술에 대한 집념은 흔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고려아연은 1995년 8월 세계 최초로 TSL 공법을 상용화하는 데 성공하며 전 세계 제련업계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유독물질 덩어리였던 아연 잔재를 유가금속을 100% 회수하고 남은 찌꺼기는 시멘트 원료 등으로 판매할 수 있는 친환경 슬래그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산업 폐기물을 자원으로 바꾸는 연금술'에 비견될 만한 혁명이었다. 이 기술 하나로 고려아연은 환경 문제와 비용 절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고, 후발주자라는 꼬리표를 떼고 단숨에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게임 체인저'로 부상했다. 고려아연의 부흥, 그리고 최창걸 명예회장의 업적을 논할 때 TSL이 모든 서사의 중심에 있는 배경이다.

"시장의 규칙을 만드는 자"
TSL 공법이라는 무기를 장착한 고려아연의 성장은 거침이 없었다. 불과 30여 년 만에 100년 역사의 경쟁자들을 모두 제치고 품질과 원가, 환경 모든 측면에서 경쟁자를 찾을 수 없는 세계 최고의 종합 비철금속 기업으로 우뚝 섰다.
고려아연의 독보적인 위상은 '벤치마크 제련수수료(TC, Treatment Charge)' 협상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TC는 광산 회사가 제련소에 원광 제련을 맡기며 지불하는 수수료로 매년 세계 최대 광산업체와 제련소를 대표하는 기업이 1대1 협상을 통해 기준 가격을 정한다. 이 가격이 전 세계 모든 제련소에 적용되는 표준이 된다.
고려아연은 수년째 압도적인 기술력과 신뢰도를 바탕으로 전 세계 제련소를 대표해 이 협상을 주도하고 있다. 이는 고려아연이 단순히 생산량만 많은 기업이 아니라,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에서 시장의 규칙을 만드는 명실상부한 '세계 1위'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의 비전은 국내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 그는 호주에 선메탈스(Sun Metals) 제련소를 설립하며 글로벌 생산 거점을 확보했다. 이는 안정적인 원료 수급과 생산기지 다변화라는 전략적 포석이었다. "현장에 답이 있다"는 그의 경영철학이 빛나는 순간이다. 직접 세계 오지를 누비며 현장을 챙겼고, 그가 닦아놓은 글로벌 네트워크는 오늘날 고려아연이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든든한 자산이 되었다.

끝나지 않은 교향곡 "격랑 속에 남겨진 위대한 유산"
최창걸 명예회장이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금자탑은 현재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그가 병상에 누워 마지막 힘을 다하고 있던 시기, 수십 년간 신뢰로 이어져 온 동업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으며 재계에 큰 충격과 안타까움을 안겼다.
사모펀드 MBK파트너스와 손을 잡은 영풍그룹이 시작한 적대적 M&A 시도는 1년 넘게 고려아연의 발목을 잡고 있다. 수십 년간 '한지붕 두가족' 체제하에 영풍은 장씨 일가가, 고려아연은 최씨 일가가 경영하며 상호 존중의 관계를 이어왔던 불문율이 깨진 것이다. 특히 동업 가문의 정신적 지주이자 큰어른인 최 명예회장이 병상에 누운 직후 그의 평생의 노력이 담긴 회사의 경영권을 흔드는 시도가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재계의 비판 여론이 거셌다.
단순한 지분 싸움을 넘어 고려아연의 미래 방향성을 둘러싼 철학의 충돌이기도 하다. 실제로 최씨 일가는 전통 제련업을 넘어 친환경 신사업으로의 모험적인 확장을 추구하는 반면, 영풍 측은 보다 보수적인 운영과 배당 확대를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격랑 속에서 최 명예회장의 유산을 지키고 회사의 미래를 개척해야 하는 무거운 과제는 이제 아들 최윤범 회장의 어깨 위에 놓여 있다는 평가다.

'트로이카 드라이브' 강력 시동
2022년 12월 최윤범 회장이 공식 취임했다. 고려아연의 '3세 경영' 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그는 아버지 최창걸 명예회장이 다져놓은 세계 1위 비철금속 기업이라는 발판 위에서 이제 '글로벌 친환경 소재 및 핵심광물 솔루션 기업'이라는 새로운 100년의 비전을 향한 항해를 시작했다.
최 회장은 유년 시절부터 온산제련소는 물론 페루의 험준한 광산과 호주의 드넓은 SMC 제련소 등 세계 각지의 현장을 누비며 10년 가까이 실무 경험을 쌓았다. 부친의 "현장에 답이 있다"는 철학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체득한 준비된 경영자다. 이를 바탕으로 기후변화와 글로벌 공급망 대전환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정면으로 응답하는 '트로이카 드라이브' 전략을 미래 성장동력으로 삼았다.
'트로이카 드라이브'는 단순한 사업 다각화가 아닌, 고려아연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대전환이다. ▲신재생 에너지 및 그린수소 사업 ▲이차전지 소재사업 ▲자원순환 사업이라는 세 개의 심장이 미래를 향해 힘차게 박동치고 있다.
먼저 신재생 에너지 및 그린수소 분야다. 전력 소모가 막대한 제련업의 숙명을 혁신으로 극복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호주 맥킨타이어 풍력발전소의 성공적인 가동을 통해 RE100(재생에너지 100% 사용) 달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그린수소 프로젝트를 통해 탄소 배출 없는 '그린 아연'을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지난해에만 무려 5666억원을 신재생에너지에 투자했다. 2023년 투자액(492억원) 대비 12배에 달하는 압도적인 규모다.
이차전지 소재사업도 눈길을 끈다. 전기차 시대를 맞아 미래 성장의 핵심축으로 삼았으며 동박 생산과 하이니켈 전구체 양산까지 진격하는 큰 그림이다. 2027년 상업 운전을 목표로 건설 중인 '올인원 니켈 제련소'는 그 정점으로 볼 수 있다. 광석, 재활용 원료(블랙매스) 등 형태와 종류를 가리지 않는 모든 니켈 원료를 단일 공정에서 처리할 수 있는 세계 유일의 시설로 고려아연의 독보적인 제련 기술력이 집약된 미래형 공장이다.
자원순환 사업도 강력한 존재감을 자랑한다. TSL 공법으로 시작된 회사의 DNA를 계승한다는 점에서 근본이나 다름이 없는 분야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제련 기술을 바탕으로 폐배터리, 폐전자제품 등에서 희귀금속을 추출하는 '도시 광산' 사업을 공격적으로 확장한다는 각오다. 최근 미국 IT 자산 관리 기업 MDSi를 비롯해 전자폐기물 리사이클링 기업 이그니오홀딩스, 고철 트레이딩 업체 캐터맨 등을 잇달아 인수하며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순환경제 생태계를 구축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한편 미중 패권 경쟁으로 촉발된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시대는 고려아연에게 위기이자 곧 기회다. 그러나 고려아연은 최 회장의 리더십 아래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려는 서방 세계의 '탈중국 공급망' 구축에 있어 대체 불가능한 핵심 허브로 급부상하고 있다.
최근 한미 정상회담 기간 중 세계 1위 방산기업 록히드마틴과 반도체, 인공위성, 첨단 광학장비의 필수 소재인 게르마늄 공급 및 핵심광물 공급망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것은 이러한 방향성을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에 맞춰 울산 온산제련소에 1400억원 규모의 게르마늄 공장 신설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미 미국에 안티모니를 수출하는 등 인듐, 비스무트와 같은 전략광물의 안정적인 공급자로서 국가 안보 차원의 위상까지 확보하고 있다는 평가다.
최윤범 회장은 지난 8월 창립 51주년 기념사에서 "지난 11개월의 태풍을 견뎌내는 동안에 우리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포기하지 않고 멈추지 않았다"며 "파도는 계속 치겠지만, 우리의 목표를 잊지 않고 서로를 나침반 삼아 단결한다면 고려아연은 다시 한번 세상을 놀라게 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외부의 어떠한 흔들기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의 위대한 유지를 받들어 회사를 한 차원 높은 곳으로 이끌겠다는 의지다.
한 시대의 거목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혁신과 도전의 창업 정신은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되어 고려아연의 새로운 100년을 환하게 밝힌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순간이다. 시대의 거목은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이제 또다른 시대의 사명이 풍운의 일보를 내딛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