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인공지능(AI) 패권 경쟁이 격화되면서 지난 40여 년간 한국 경제의 골격으로 자리 잡아 온 '금산분리(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 원칙이 흔들리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AI 등 국가 전략 산업에 한해 규제 완화 가능성을 시사한 가운데 재계는 "생존을 위한 자본 조달 창구가 필요하다"며 호소하고 있고, 규제 당국과 학계는 "재벌 사금고화 우려가 여전하다"며 맞서는 형국이다.
특히 2030년 마이너스 성장 경고등이 켜진 상황에서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AI 인프라 투자를 위해 규제의 빗장을 어디까지 풀 것인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예고된다.

"150조 펀드로도 부족"... 재계의 절박한 호소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SK그룹 회장)은 20일 열린 제2차 기업성장포럼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금산분리 그 자체가 아니라 투자를 감당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이라고 작심 발언을 쏟아냈다.
최 회장의 발언에는 현재 정부가 추진 중인 150조 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만으로 글로벌 빅테크와의 경쟁에서 승산이 없다는 인식이 깔렸다. 오픈AI, 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 기업들이 수백조 원 단위의 데이터센터 및 에너지 인프라 투자를 집행하는 상황에서 한국 기업이 기존의 자금 조달 방식에 묶여 '속도전'에서 밀리면 국가 경제 안보가 위태롭다는 논리다.
재계는 특히 공정거래법상 일반지주회사가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CVC) 외에 사모펀드(PEF) 운용사를 보유할 수 없도록 한 규제를 핵심 걸림돌로 지목한다.
이 규제가 완화되면 지주회사가 직접 PEF를 설립해 외부 투자자로부터 대규모 자금을 유치하고, 이를 반도체나 AI 계열사에 수혈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사실상 SK하이닉스와 같은 주력 계열사가 외부 자금을 더 공격적으로 끌어올 수 있는 '파이프라인'이 생기는 셈이다.
정부 내 기류는 엇갈린다.
우선 산업 육성에 방점을 둔 부처는 규제 완화에 적극적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샘 올트먼 오픈AI CEO 회동 직후 금산분리 재검토를 지시한 것이 기폭제가 됐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역시 "글로벌 경쟁이 죽느냐 사느냐의 환경"이라며 "금산분리 정신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힘을 실었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또한 반도체 경쟁력 강화를 위한 총력전을 강조하며 지원사격에 나섰다.
규제 칼자루를 쥔 공정거래위원회는 신중한 입장이다.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은 20일 세미나에서 "대기업의 금융 지배로 인한 폐해는 외환위기를 통해 이미 확인됐다"며 선을 그었다. 산업자본이 금융회사를 소유할 경우 계열사 부실이 금융권으로 전이되거나, 고객의 돈이 대주주의 지배력 확장이나 부실 계열사 지원에 동원되는 '사금고화' 위험이 있다는 전통적인 우려다.
'SK 특혜론'과 법적 난관
금산분리 완화 논의가 구체화될수록 특정 기업 특혜 논란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현재 국내 대기업 중 AI 반도체(HBM) 시장을 주도하면서 대규모 설비 투자가 가장 시급한 곳이 SK그룹이기 때문이다. 시민단체와 일부 전문가들은 지주회사의 PEF 보유 허용이 사실상 'SK 맞춤형 규제 완화'라고 비판한다.
법적 장벽도 높다. 단순히 공정거래법만 고쳐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자본시장법에 따르면 대기업 계열 PEF가 다른 회사를 인수할 경우 5년 내에 지분을 제3자에게 처분해야 하는 의무 규정이 있다.
장기 투자가 필수적인 반도체 산업 특성상 이 조항까지 함께 손보지 않으면 규제 완화의 실효성이 떨어진다. 이는 국회 차원의 광범위한 입법 논의가 필요함을 시사하며, 여소야대 혹은 각 당의 정강 정책에 따라 입법 과정에서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이런 가운데 전문가들의 의견도 팽팽하다. 박상인 서울대 교수는 "SK하이닉스 정도의 우량 기업이라면 주식이나 채권 발행을 통해 자본시장에서 직접 조달하는 것이 정석"이라며 "금산분리 원칙을 허물면 금융기관의 위험 관리 기능이 마비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반면 옹호론자들은 현재의 글로벌 AI 경쟁을 '전시 상황'으로 규정한다. 경쟁국인 미국, 일본, 중국이 보조금과 규제 철폐를 앞세워 자국 기업을 전폭 지원하는 상황에서 한국만 40년 전의 규제 틀을 고집하다가는 도태될 수 있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