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뉴 삼성 구상이 베일을 벗었다. 이 회장의 사법 리스크가 10년 만에 완전히 해소된 직후 그룹의 핵심 조직과 수뇌부가 전격 교체됐기 때문이다. 이 회장의 최측근이자 그룹 2인자로 불리며 비상 경영 체제를 이끌어온 정현호 부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그 자리에 재무·전략통 해결사로 불리는 박학규 사장이 임명됐다.
삼성전자는 7일 2017년부터 임시조직(TF) 형태였던 사업지원TF를 8년 만에 정식 조직인 사업지원실로 전환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위촉업무 변경 인사를 발표했다. 이재용 회장이 취임 3년 만에 단행한 첫 대규모 조직 개편이자 이달 중순으로 예정된 연말 정기인사의 방향을 가늠케 하는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재계는 9년간의 사법 리스크 족쇄를 완전히 풀어낸 이 회장이 본격적인 책임 경영과 세대교체를 통해 초격차 혁신을 주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보고 있다.

8년 비상경영의 막, 정현호 부회장의 아름다운 퇴장
이번 인사의 핵심은 단연 정현호 부회장의 용퇴다.
정 부회장은 사업지원TF장에서 물러나 회장 보좌역으로 위촉업무가 변경됐다. 회장 보좌역은 삼성 내 기존에 없던 직함으로 사실상 후진 양성을 위해 2선으로 물러나는 명예직이자 퇴임 프로그램으로 받아들여진다.
정 부회장은 이재용 회장이 2017년 국정농단 사태로 수감되고 사법 리스크를 겪는 동안 사실상 그룹 전반의 주요 의사결정과 리스크 관리를 주도해온 핵심 인물이다. 이 회장의 지근거리 보좌역이자 그룹 2인자로서 삼성이 긴 혼돈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조직을 안정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퇴진은 이미 예견된 수순이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삼성전자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는 "정 부회장은 지난 2월 이재용 회장의 2심 무죄 선고 직후부터 주변에 '이제 내 역할은 다한 것 같다. 물러날 때가 된 것 같다'는 뜻을 비춰왔다"면서 "지난해 최악의 실적과 HBM 경쟁력 논란 등으로 비난의 중심에 섰을 때 물러나기보다, 이를 스스로의 손으로 수습한 뒤 명예롭게 퇴진하는 길을 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올 3분기 매출 86조 원이라는 경이적인 실적을 달성했고 주가 역시 10만 원을 돌파하며 10만 전자 시대를 열었다.
이 회장의 사법 리스크 해소와 사업 정상화라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된 셈이다. 이후 정 부회장이 후배 경영진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 삼성 안팎의 중론이다.
물론 그가 비판에서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 삼성전자가 SK하이닉스에 HBM3E 납품 경쟁에서 밀리는 등 반도체 사업이 급격한 부진에 빠지자 재무통인 정 부회장이 기술 중심의 투자를 소홀히 한 것 아니냐는 책임론이 불거지기도 했다. 하지만 위기 상황에서 그룹을 지탱하고 실적 회복을 기점으로 스스로 물러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아름다운 퇴장의 선례를 남겼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고 있다.

재무·전략 해결사 박학규 사장, 뉴 삼성의 새 사령탑으로
정 부회장의 뒤를 이어 신설 사업지원실의 초대 실장을 맡은 인물은 박학규 사장이다. 1964년생인 박 사장은 전임 정 부회장(1960년생)보다 네 살 아래로 이번 인사가 본격적인 세대교체의 시작임을 잘 보여준다.
박 사장은 이재용 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삼성의 핵심 재무·전략통으로 꼽힌다.
문과 출신이지만 소프트웨어 개발을 좋아했던 박학규 사장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문과생이 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S/W 관련 학과였던 KAIST(한국과학기술원) 경영과학과 대학원으로의 진학을 선택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삼성전자 경리팀으로 입사해 영상사업부(VD), 무선사업부 등 DX(세트) 부문의 지원 업무를 담당했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는 옛 미래전략실 경영진단팀장(부사장)으로 일하며 그룹 전반의 현안을 다루기도 했다.
이력에서 주목할 점은 다양성이다. 미전실 해체 후 삼성SDS로 이동해 사업운영총괄(부사장)을 지내며 소프트웨어 분야를 경험했고, 2020년 사장으로 승진하며 DS(반도체)부문 경영지원실장(CFO)을 맡는 등 스펙트럼이 넓다. 2022년부터는 다시 DX부문 경영지원실장을 담당하며 세트와 부품, 소프트웨어를 모두 섭렵한 보기 드문 멀티플레이어 CFO로 자리매김했다.
또다른 삼성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의 평가에 따르면 박 사장은 냉철한 지장의 면모와 동시에 일단 결정되면 무섭게 밀어붙이는 용장의 기질을 갖춘 인물이다. 숙제가 주어지면 밤을 새워서라도 해답을 찾아내는 해결사로도 정평이 났다. 다소 무서울정도로 집요하게 업무에 임하는 스타일이라는 것이 내부 직원들의 공통된 평가다.
이 회장이 박 사장을 낙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분석이다. 지난 9년간의 사법 리스크로 대형 M&A나 과감한 신사업 투자가 지연됐다는 비판이 많았던 만큼 AI 대전환기라는 거대한 파고를 넘기 위해서는 박 사장처럼 신속한 의사결정과 강력한 실행력을 갖춘 인물이 적임자라고 판단했다는 말이 나온다.
지난해 말 그가 사업지원TF 담당 임원으로 부임했을 때부터 이미 포스트 정현호로 낙점됐다는 관측이 파다한 만큼, 내외부의 기대가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컨트롤타워 부활인가, 조직 안정화인가
박학규 사장이 앞으로 이끌 사업지원실이 전략팀, 경영진단팀, 피플(People)팀 등 3개 팀 체제로 구축된 것도 눈길을 끈다. 임시조직이었던 TF가 8년 만에 상설 조직으로 격상된 것이다.
팀장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먼저 신설 전략팀장은 최근까지 삼성글로벌리서치(SGR) 경영진단실을 이끌다 삼성전자로 편입된 최윤호 사장이 맡았다.
최 사장은 옛 미전실 전략1팀장, 삼성전자 경영지원실장, 삼성SDI 사장(CEO) 등을 역임한 대표적인 전략통으로 분류된다. 또 경영진단팀장은 사업지원TF에서 인사와 진단을 담당해 온 주창훈 부사장이, 피플팀장은 삼성종합기술원 인사팀장 출신인 문희동 부사장이 각각 임명됐다. 재무(박학규), 전략(최윤호), 인사(주창훈·문희동) 등 핵심 기능이 결합된 막강한 조직이 탄생한 셈이다.
재계에서는 사실상 옛 미래전략실(미전실)이 부활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미전실 해체 후 그룹 전체의 현안을 조율하고 미래 전략을 수립할 컨트롤타워가 부재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기 때문이다. 최근 카카오와 같은 ICT 기업이 중앙집중형 컨트롤 타워 부재로 지적받은 상황에서 미전실과 같은 조직에 대한 재평가 분위기도 확산되는 중이라 더욱 의미심장하다.
다만 삼성전자는 컨트롤타워 부활이라는 확대 해석을 경계하는 뉘앙스다. 사업지원TF가 오랜 기간 임시 조직으로 머물러 있던 것을 이번에 정식 조직으로 안정화하는 차원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실제로 과거 미전실의 인원이 100명이 넘었고 법무, 홍보, 대관 등 그룹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신설 사업지원실은 50~60명 규모로 상대적으로 콘팩트하다. 나아가 삼성전자 및 전자 계열사의 사업 경쟁력 강화를 지원하는 조직에 불과해 역할과 범위는 미전실에 비할바 아니다.
그럼에도 일각에서는 묘하다는 반응이다. 특히 한 재계 관계자는 최근 삼성글로벌리서치(SGR)의 경영진단실이 삼성전자로 이관된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룹 차원의 시너지와 미래 전략 수립을 염두에 둔 포석이 아니면 쉽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박학규, 최윤호 사장 모두 미전실 출신의 핵심 인물이다. 그 명칭과 규모는 달라도 사실상 그룹 전체 이슈를 모아 빠르게 의사결정하는 미니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 꾸준히 나온다.

JY의 붓으로 그릴 뉴 삼성... AI·M&A 속도 낸다
정현호 부회장의 용퇴와 박학규 사장의 등판은 이재용 회장이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뉴 삼성의 그림을 그릴 붓을 쥐게 됐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다. 이건희 선대회장의 와병과 9년간의 사법 리스크라는 긴 혼란기를 끝내고, 이 회장이 직접 그룹의 미래를 설계하는 책임 경영이 본격화된 셈이다.
재계는 이번 인사를 신호탄으로 이달 중순께 단행될 삼성 사장단 인사 및 조직 개편의 폭이 예상보다 훨씬 클 것으로 보고 있다.
세대교체가 핵심 키워드다. 정 부회장이라는 최측근이 스스로 물러나면서 대대적인 경영진 쇄신의 명분이 섰으며, 이로 인해 1960년대생 핵심 경영진의 연쇄 용퇴와 함께 1970년대생 젊은 기수들이 전면에 약진하는 대규모 인적 쇄신이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에 힘이 실린다.
노태문 DX부문장(사장)이 직무대행 꼬리표를 뗄지, 전영현 DS부문장(부회장) 체제 하의 메모리사업부 수장에 변화가 있을지도 초미의 관심사다.
한편 박학규 사단이 이끌 사업지원실의 최우선 과제는 단연 미래 먹거리 확보다. 이 회장이 최근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치맥 회동을 하고 오픈AI와 대규모 D램 공급 계약을 맺는 등 AI 시대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직접 뛰고 있는 만큼, 사업지원실이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할 전망이다.
구체적으로는 SK하이닉스에 추격을 허용한 HBM 시장에서 압도적 기술력으로 1위를 탈환하는 것, 올해부터 내년까지 예상되는 메모리 슈퍼 사이클에서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급선무다. 여기에 테슬라, 애플 등 빅테크 고객사들의 신뢰를 회복해 파운드리 사업을 흑자로 전환하는 것도 시급한 과제다.
무엇보다 이 회장이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난 지난해부터 사즉생(死則生)의 각오로 과감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임원들에게 주문해 온 만큼 경직된 조직 문화를 바꾸고 수년간 정체됐던 대형 M&A를 추진하는 데도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