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 주요 산유국 연합체인 OPEC+가 5일(현지시간) 시장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대규모 증산을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뉴욕과 런던의 원유 트레이더들은 일제히 '매도' 버튼을 눌렀다. 단순한 생산량 조정을 넘어, 지난 수년간 유가 부양을 위해 쌓아 올렸던 감산의 둑을 스스로 허물고 시장 점유율을 되찾기 위한 무한경쟁의 포문을 여는 '공세적 전환'이기 때문이다.

이번 결정은 유가 하락을 유발하는 '역(逆)오일쇼크'다. 

단기적으로는 소비자 물가 안정에 기여할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글로벌 경기 침체의 전조이자 원유 수입 의존도가 절대적인 한국 경제와 핵심 산업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복합 위기의 신호탄으로 분석된다. 이제 저유가라는 안갯속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혹독한 시기가 시작됐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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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을 뛰어넘는 '충격요법'
OPEC+ 8개 핵심 회원국이 합의한 8월 증산 규모는 하루 54만 8천 배럴(bpd)에 달한다. 월 41만 1천 bpd 증산을 점쳤던 시장 분석가들의 뒤통수를 치는 수치다. 

여러 각도에서 "무섭다"는 말이 나온다. 이번 결정이 정책의 속도를 의도적으로 4배속으로 끌어올린 '충격요법'에 가깝기 때문이다. 기존 계획대로라면 4개월에 걸쳐 이뤄질 증산량을 단 한 달 만에 시장에 쏟아붓겠다는 선언은 그 자체로 파괴적이다.

OPEC+가 2023년 말 발표했던 총 220만 bpd 규모의 자발적 감산은 불과 5개월 만에 87.2%에 달하는 192만 bpd가 복원될 전망이다. 18개월에 걸쳐 점진적으로 풀겠다던 약속은 사실상 파기됐으며, 시장은 감산 공조가 사실상 와해됐다는 명백한 신호로 받아들이고 있다. 

OPEC+는 "안정적인 세계 경제와 낮은 재고"라는 공식 명분을 내세웠지만 누구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분위기다. 이는 명백히 가격 방어를 포기하고, 새로운 목표를 향해 칼을 빼 든 것이다.

한편 OPEC+의 발표 이후 금융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브렌트유와 WTI는 장중 2% 이상 급락하며 각각 68달러, 66달러 선으로 밀려났다. 선물시장에서는 미래의 공급 과잉을 예고하는 '콘탱고(Contango)' 현상이 심해졌다. 이는 트레이더들이 당장의 가격보다 미래의 가격을 더 낮게 보고 있다는 의미로, "앞으로 원유를 실은 유조선이 바다 위를 떠도는 일이 더 많아질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에 베팅하고 있다는 신호다.

월스트리트의 투자은행들도 일제히 암울한 보고서를 쏟아냈다. 당장 골드만삭스는 2025년 하반기 브렌트유 평균 가격을 배럴당 60달러, 2026년에는 56달러까지 하향 조정하며 "OPEC+가 여유 생산능력을 정상화하며 미국 셰일 성장을 견제하는 전략으로 돌아섰다"고 분석했다.

모건 스탠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연말까지 세 차례의 추가 증산을 예상, 시장이 110만~130만 bpd의 극심한 공급 과잉에 빠지면서 유가가 하반기 57.50달러까지 추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S&P Global 등은 50달러대 진입 가능성마저 제기하며 공포감을 키우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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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자' 응징과 '셰일' 고사 작전
이번 결정의 이면에는 두 가지 핵심적인 전략적 계산이 깔려있다.

먼저 '내부의 적'을 향한 채찍질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지난 5월 카자흐스탄은 할당량보다 무려 47만 bpd, 이라크는 28만 bpd를 초과 생산하며 감산 합의를 무력화했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들 '규정 위반국'을 징계하기 위해 유가를 인위적으로 끌어내려 초과 생산의 매력을 떨어뜨리는, 이른바 '재정적 압박(financial sweating)' 카드들 꺼내 들었다. 

더 많이 생산해봤자 남는 게 없도록 만들어 연합의 규율을 바로 세우겠다는 의도다. 이번 증산의 결정적 배경이다.

미국 셰일 산업을 겨냥한 '점유율 전쟁' 선포도 전략적 포석이다. 이번 증산을 두고 2014~2016년 유가를 배럴당 20달러대까지 추락시켰던 '치킨게임'의 재현으로 보는 이유다. 

미국 셰일 오일의 평균 손익분기점(BEP)은 배럴당 50~65달러 수준. 반면 사우디의 생산원가는 10달러에 불과하다. 그리고 유가를 장기간 60달러 밑으로 묶어두면 고비용 구조의 셰일 기업들은 신규 유정 시추를 포기할 수밖에 없고, 이를 통해 미국산 원유의 공급 증가세를 꺾고 잃어버렸던 시장 점유율을 되찾겠다는 계산이다. 

최근 이란-이스라엘 분쟁 완화로 지정학적 긴장이 해소된 시점은, 이러한 공세를 펴기 위한 최적의 '기회의 창'을 제공했다는 평가다.

브라질 오일 OPEC. 사진=연합뉴스
브라질 오일 OPEC. 사진=연합뉴스

대한민국에 몰아치는 저유가의 역풍
저유가는 원유 수입 의존도가 97%에 달하는 한국 경제에 '양날의 검'이다. 우선 연간 1000억 달러가 넘는 원유 수입액 감소는 무역수지 개선과 물가 안정에 분명한 호재다. 당장 KDI는 저유가 덕에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7%의 낮은 수준에 머물 것으로 전망했다. 당장 주유소 기름값이 내려가고 난방비 부담이 줄어드는 효과를 체감할 수 있다.

하지만 동전의 뒷면은 훨씬 차갑다. 저유가는 글로벌 경기 둔화라는 더 큰 위험의 그림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 경제가 위축되면 반도체, 자동차, 선박 등 한국의 주력 수출 전선은 직격탄을 맞는다. KDI가 이미 2025년 경제성장률을 0.8%라는 암울한 수치로 제시한 배경에는 저유가가 암시하는 글로벌 수요 위축에 대한 깊은 우려가 깔려있다.

특히 정유·석유화학 업계는 그야말로 비상이다. 가장 즉각적인 충격은 재고평가손실이다. 예를 들어 한 정유사가 배럴당 80달러에 사들여 비축해 둔 원유의 가치가 한 달 만에 65달러로 떨어지면, 회계상 그 차액인 15달러만큼을 고스란히 손실로 반영해야 한다. 이는 SK이노베이션, S-Oil 등의 2분기, 3분기 실적에 수천억 원 규모의 영업손실을 안겨줄 '시한폭탄'이다.

더 큰 문제는 본업의 수익성 악화다. 정유업계는 원유 가격 하락보다 휘발유, 경유 등 석유제품 가격이 더 큰 폭으로 떨어지면서 정제마진이 급격히 축소되고 있다. 심지어 석유화학 업계는 원료인 나프타 가격 하락의 이점마저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미 시장을 장악한 중국산 저가 제품의 공세 속에 제품 가격이 동반 하락하며 원료와 제품 가격 차이인 스프레드가 손익분기점을 위협하고 있다는 경고등이 커지는 중이다. LG화학, 롯데케미칼 등은 "원가는 줄었지만 팔아도 남는 게 없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다.

사진=금호석화
사진=금호석화

정부 및 정책 당국이 저유가를 국가 에너지 안보 강화의 '골든타임'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전략비축유(SPR)를 대거 확충해 미래의 공급 충격에 대비한 '보험'을 들어야 한다. 동시에 글로벌 경기 둔화의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확장적 재정·통화 정책으로 내수 경기의 안전판을 마련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정유·석유화학 기업도 움직여야 한다. 업계 관계자는 "생존을 위한 구조조정이 더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며 "유가 변동성에 따른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파생상품을 활용한 정교한 헤징(위험 회피) 전략은 기본"이라 말했다.

그는 "더 나아가 범용 제품 위주의 사업 구조에서 탈피해, 기술 집약적인 고부가가치 스페셜티 제품으로의 전환을 서둘러 '가치 함정(Value Trap)'에서 벗어나야 한다"면서 "현재의 불황은 경쟁력 없는 사업을 과감히 정리하고, 전략적 M&A를 통해 산업 전체의 체질을 개선하는 고통스럽지만 필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