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브렉시트 결정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그리고 이탈리아 개헌안 부결
이번에 쓰러진 도미노는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는 유로존 3위의 경제국가다.
"헌법 개혁 국민투표를 부결시킨 이탈리아가 브렉시트 결정을 내린 영국, 도널드 트럼프를 대통령에 당선시킨 미국에 이어 포퓰리즘의 3번째 희생양이 됐다. 오스트리아만이라도 버텼다는 게 그나마 작은 위로다.”
4일(현지 시간) 이탈리아의 개헌 투표가 종료된 직후 출구 조사에서 개헌 반대가 60%를 육박하는 것으로 나타나자 외신들이 쏟아 낸 기사들이다.
먼저 소식이 전해진 건 오스트리아다. 상징적인 자리이긴 하지만 국가수반인 대통령을 뽑는 결선투표에서, 녹색당 출신의 무소속 알렉산더 판 데어 벨렌 후보가 극우정당인 자유당의 노르베르트 호퍼 후보를 꺾었다.
러시아 이민자 출신인 판 데어 벨렌은 인스부르크·빈 대학에서 경제학 교수를 지냈다. 1990년대 녹색당에 참여했고 대표를 거쳤다. 유럽연합(EU) 체제를 신봉하는 그는 장벽 없는 ‘통합 유럽’을 열망한다. 지난 5월 선거에서 예상을 깨고 극우 후보인 자유당의 노르베르트 호퍼를 0.6%포인트 차이로 간신히 따돌리며 ‘유럽의 첫 극우 대통령을 막았다’고 평가 받았다. 그러나 개표 논란 탓에 재선거가 치러 졌고, 그 사이 브렉시트 투표와 미국 대선이 있었다. 4일 투표하기 전 그는 “오늘 여기서 벌어질 일은 전 유럽과 관련이 있다”며 이번 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여론조사 전망을 깨고 또 다시 승리하며 포퓰리즘에 브레이크를 건 ‘희망의 신호’가 됐다고 가디언은 표현했다.
비슷한 시각, 이탈리아에서는 개헌투표가 종료되고 출구 조사가 발표되기 시작했다. 공영방송 RAI와 LA7 등 이탈리아 방송사는 반대가 54∼59%로 찬성 41∼46%에 월등히 앞선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근래 영국·미국에서 여론조사가 틀렸던 전례가 있어서 지켜보자는 기류도 있었지만, 투표함이 하나 둘 열리면서 이번엔 여론조사가 맞았다는 게 드러났다.
이탈리아 국민들은 왜 개헌안을 거부했을까. 기성 정치판에 신물 내는 국민들은 왜 정치판을 갈아엎자는 렌치 총리의 개헌안에 반대표를 던진 것일까.
개헌안의 핵심은 상원 의석수 감축이다. 현재 상원의 의석 수는 315석으로, 개헌안은 이를 100석으로 줄이는 방안을 담고 있다. 여기에 상원의 입법권도 제한하고 있다. 한마디로, '옥상옥' 상원의 기능을 줄여 하원 표결만으로도 정부가 각종 개혁을 신속하게 추진할 수 있도록 만들자는 것이 개헌안의 목표다. 현재는 의전 역할에 머물고 있는 대통령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더 부여하는 내용도 개헌안에 담겨있다.
이탈리아 국민들이 이같은 개혁조치들을 담고 있는 개헌안에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로, BBC 가디언 등 외신들은 기성정치세력에 대한 거부감을 꼽고 있다. 브렉시트와 도널드 트럼프를 선택한 영국과 미국 유권자들처럼 이탈리아 국민 역시 기득권 층을 향한 불신과 분노가 매우 깊기 때문이란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정서 이외에 '권력 집중'에 대한 이탈리아 국민들 특유의 두려움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무솔리니 독재체제에 대한 학습효과로 중앙집권에 대한 뿌리깊은 거부감이 형성돼 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국민들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대부분 인정한다. 하지만 국민들은 렌치 총리의 정치개혁이 중앙정부의 권한을 지나치게 강화할 수 있다는 의심과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총선에서 최다 득표를 하는 정당에게 득표율에 따라 추가 의석을 배정하는 기존 선거구법 조항에 대한 반대 의견이 높다. 렌치 총리 정부의 주도로 지난해 가결된 이 법은 소수정권이 출범해 국정이 불안해지는 고질적 병폐를 막자는 데 있었다. 하지만 국민들은 이를 '기득권의 수호'로 받아들였다. 야당인 오성운동당이 ‘기성 거대정당의 힘을 더욱 강화하는 조치’로 주장하면서 개헌안 반대 운동을 이끌었던 것이 국민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셈이다.
여기에 경제에 대한 불만도 개헌안 거부 심리를 부채질했다. 렌치 총리 정부에서 이탈리아 경제성장률이 다시 상승하기 시작하고 정부 부채로 줄었으며 실업률도 다소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탈리아 경제는 2008년 금융위기 이전과 비교해 여전히 12%나 쪼그라든 상태이다. 즉, 정치개혁보다는 경제 살리기가 더 중요한데 총리는 '정치게임'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는 난민 위기와 도산위기에 처한 은행문제, 높은 실업률, 국내총생산(GDP)의 132%에 달하는 막대한 공공부채 등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탈리아 국민총생산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보다 낮은 상태에서 회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청년 실업률은 35%를 넘어서고 있다.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이 약 20년 전인 1997년과 비슷한 3만3000 달러 수준에 머물고 있다.
30대 후반의 프리랜서 다니엘레는 “의회 시스템을 바꾸는 게 이탈리아의 체질을 개선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상원을 아예 폐지하는 것도 아니고 , 일부는 남겨서 지방 의원이나 시장으로 채우는 것은 정치 시스템을 단순화하는 게 아니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라며 "이탈리아는 입법 체계보다는 지긋지긋한 관료주의가 더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언론에서 포퓰리즘을 지적하지만, 이탈리아인들은 포퓰리즘 같은 모호한 개념에 선동돼 투표를 한 게 아니다. 각자 처한 구체적 삶의 상황에 근거해 나름의 판단으로 선택을 한 것이고, 복합적인 이유로 반대가 찬성을 압도한 것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파이낸셜타임스(FT)와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은 4일(현지시간) 위태롭기 짝이 없던 이탈리아 은행들이 이탈리아의 정치 및 경제의 혼돈과 함께 대거 도산위기에 처할 것이란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3위 경제국인 이탈리아의 금융위기가 현실화 할 경우 유럽경제는 물론 세계경제에 까지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FT는 이날 “가장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문제는 이탈리아 은행들"이라며 시장에서는 이탈리아 은행들이 대거 도산위기에 처할 것이란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탈리아 은행들의 부실대출액은 3,600억 유로(453조 6,000억원)로 추정되고 있다. 부실대출액이 전체 대출액의 18%나 된다. FT는 최근 개헌안 부결 시 최대 8개 이탈리아 은행이 도산할 것으로 내다봤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지난 2014년 6월 마이너스 금리(-0.10%)를 도입했다. 힘을 잃어가는 유럽 경제를 부양하기 위한 고강도 처방이었다. 그러나 마이너스 금리는 이자를 먹고 사는 은행들의 입장에서는 나쁜 소식이었다. ECB의 금리 인하는 단기적으로는 이탈리아 은행들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탈리아 국민들은 1,700억 유로(약 211조원) 규모의 은행채권을 소유하고 있다. 만일 어떤 한 은행이라도 도산을 하게 될 경우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은행들 마저도 연쇄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이탈리아 정부가 구제 금융에 나설 경우 이탈리아 정부 부채가 늘어나는 부담을 안게 된다. 이탈리아 정부의 부채는 이미 국내총생산(GDP)의 133%를 넘어선 상황이다.
올 들어서 자본 이탈도 꾸준히 이어졌다. 지난 6월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은 이탈리아 은행들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탈리아 은행주들은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시가총액의 약 3분의 1이 증발했다. 이탈리아의 부실여신은 18%까지 치솟았다. 미국 은행들의 부실여신에 비해 10배 가까이 많은 규모다. 2008~2009년 금융위기 때도 미국 은행의 부실여신 비중은 5%에 불과했었다. 유로존 전체 부실 채무의 절반은 이탈리아 금융기관들로 채워져 있다.
렌치 총리의 사임으로 ‘이탈렉시트(Italexit)’ 움직임도 구체화 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유로존 탈퇴와 리라화 복귀, 이탈렉시트를 목표로 내걸고 있는 포퓰리즘 성향의 ‘오성운동’은 지난 2009년 창당한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제1야당으로 급부상했다. 베페 그릴로 오성 운동 대표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국민투표 결과는 민주주의 승리라며 이번 부결이 내년 총선에서 대승한다는 의미로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국민들이 이번 개헌안을 거부했지만, 그것이 내년 총선거에서 포퓰리즘 성향의 오성운동이나 극우 민족주의 정당 북부동맹(NL)을 지지하겠다는 의미로 볼 수 없다는 분석도 있다. 영국 가디언은 유럽 극우 세력들은 자축 분위기이지만, 국민의 뜻이 반체제 정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고 보도했다. 렌치 총리가 맞닥뜨린 반대 세력에는 북부동맹이나 오성운동(M5S)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리오 몬티 전 총리를 비롯해 좌파 유권자들, 심지어 민주당 인사들까지 포함됐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개헌안 부결과 마테오 렌치 총리 사임은 유럽중앙은행(ECB)의 통화정책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ECB는 오는 8일(현지시간) 통화정책 회의를 열어 내년 3월 만료될 예정인 1조7000억 유로 규모의 국채매입 프로그램의 지속여부를 논의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국민투표 개표결과가 나오기 전인 4일(현지시간)자 기사에서 일부 정책결정자들은 마리오 드라기 ECB총재가 국채매입 양적완화 정책을 언제 어떻게 줄이기 시작할 것인지 분명한 메시지를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이탈리아 개헌안 부결과 렌치 총리의 사임으로 인한 시장 불안 사태가 발생할 경우 ECB가 매달 800억 유로 규모의 현행 국채매입 프로그램을 계속하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ECB는 이탈리아 부실 은행들의 도산 우려로 시장에서 혼란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탈리아 정부 채권을 일시적으로 더 구입하는 쪽으로 기울 수도 있다. 이런 조치는 ECB 이사회의 승인 없이도 가능하다. 하지만 ECB의 국채 매입 프로그램은 특정 국가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 기보다는, 19개 회원국들의 물가상승률을 2%로 유지하고 채권 매입비용을 낮춰 유로존 전반에 돈이 돌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마켓 워치도 최근 기사에서 이탈리아에서 개헌안이 부결돼 정치적 불확실성이 고조될 경우 ECB가 국채매입 프로그램을 내년 3월 이후까지 연장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