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성중공업이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에 위치한 초고압변압기 공장을 대대적으로 증설하며 북미 전력 시장 제패를 위한 승부수를 던졌다. 

인공지능(AI) 확산과 노후 전력망 교체 수요가 맞물린 슈퍼사이클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전략이다. 단순한 설비 확충을 넘어 글로벌 전력기기 빅3의 경쟁 구도에도 지각변동을 예고하고 있다는 평가다.

특히 이번 결정은 2020년 당시 사내외의 우려 섞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미국 현지 공장 인수를 밀어붙였던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의 뚝심 경영이 결실을 맺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어 더욱 눈길이 간다. 

사진=효성중공업
사진=효성중공업

선구안의 승리
효성중공업은 18일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 초고압변압기 공장에 1억 5700만 달러(약 2300억 원)를 투자해 2028년까지 생산 능력을 기존 대비 50% 이상 확대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번 투자가 완료되면 멤피스 공장은 명실상부한 미국 내 최대 규모의 초고압변압기 생산 기지로 거듭나게 된다.

철저히 조현준 회장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물이다. 

조 회장은 AI 시대의 도래와 함께 전력 인프라의 중요성이 급부상할 것을 예견하고 적기 대비 체계 구축을 강력히 주문해 왔다. 효성중공업은 이미 지난 2020년 멤피스 공장 인수를 시작으로 이번 건을 포함해 총 3차례에 걸쳐 3억 달러(약 4400억 원) 규모의 투자를 단행했다. 이는 단일 공장 투자로는 이례적인 규모로 북미 시장에 대한 효성의 확신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주목할 점은 멤피스 공장이 보유한 독보적인 기술적 위상이다. 

미국 내에서 유일하게 765kV급 초고압변압기의 설계와 생산이 가능한 시설이다. 765kV 변압기는 기존 345kV나 500kV 대비 송전 손실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어 대용량 송전이 필수적인 현대 전력망의 핵심 설비로 꼽힌다. 하지만 설계와 생산 난이도가 극히 높아 진입 장벽이 높다. 효성중공업은 2010년대 초반부터 이 시장을 공략해 왔으며 현재 미국 송전망에 설치된 765kV 변압기의 절반 가까이를 공급하며 점유율 1위를 수성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번 투자를 두고 조현준 회장의 선구안과 뚝심이 통했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사실 2020년 효성이 멤피스 공장(구 미쓰비시 공장)을 인수할 당시만 해도 내부적으로는 리스크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조 회장은 미국 전력 시장의 노후화된 설비 교체 주기와 향후 폭발적인 전력 수요 증가를 확신하며 인수를 강행했다. 그리고 당시의 과감한 결단이 현재 AI 붐으로 인한 전력기기 공급 부족 사태 속에서 효성중공업을 가장 유리한 위치에 올려놓은 셈이다.

조 회장의 광폭 행보도 힘을 싣고 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빌 해거티 상원 의원과 올해만 세 차례 만남을 가졌으며 빌 리 테네시 주지사와도 회동해 멤피스 공장의 역할 확대를 논의했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크리스 라이트 미국 에너지부 장관, 셰프라 캐츠 오라클 CEO 등 글로벌 에너지 및 IT 거물들과 잇따라 만나며 네트워크를 강화했다. 최근에는 트럼프 행정부로부터 에너지 인프라 구축 프로젝트인 스타게이트 참여를 제안받고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져 향후 수주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조 회장은 이번 증설과 관련해 "전력 산업의 미래는 설비뿐만 아니라 전력 흐름과 저장, 안정성을 통합 관리하는 역량에 있다"며 "이번 증설을 통한 북미 시장에서의 위상을 기반으로 글로벌 넘버원 토털 솔루션 프로바이더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효성중공업의 이번 증설 발표이 단순한 생산 라인 확장을 넘어서는 '넥스트 레벨'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 정부가 추진하는 전력망 현대화 사업의 핵심 파트너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겠다는 선언이자 2020년부터 이어진 조현준 회장의 장기적인 포석이 완성 단계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기 때문이다. 

조현준 회장. 사진=효성중공업
조현준 회장. 사진=효성중공업

현지 시장은 급변 중
효성중공업의 행보가 거침없는 가운데 현지 전력 시장의 구도도 급변하는 중이다.

업계 등에 따르면 현재 미국 전력 시장은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테크사이리서치 등에 따르면 북미 송배전 장비 시장은 연평균 5% 이상 성장해 2030년 1215억 달러 규모에 달할 전망이다. 특히 미국 변압기 시장은 지난해 122억 달러에서 2034년 257억 달러로 두 배 이상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내 전력 사업자들이 2040년까지 309GW 규모의 전력 공급 확대를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데이터센터 등 대규모 전력 수요처가 급증하면서 전력기기 품귀 현상까지 빚어지고 있어 현지 생산 능력을 갖춘 기업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이러한 시장 호황 속에서 대한민국 전력기기 3사(효성중공업, HD현대일렉트릭, LS일렉트릭)의 북미 공략법은 비슷하면서도 각기 다른 전략적 포지셔닝을 취하고 있어 흥미를 끈다.

먼저 효성중공업과 HD현대일렉트릭은 송전망의 핵심인 초고압변압기에 집중하고 있다. 두 기업 모두 기술 장벽이 높은 초고압 분야에서 이미 글로벌 톱티어 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했다.

효성중공업이 멤피스를 거점으로 765kV급 최상위 기종 시장을 장악하며 기술적 우위를 점하는 전략이라면 HD현대일렉트릭은 울산과 미국 앨라배마 공장의 동시 증설을 통해 양적 성장을 꾀하고 있다. HD현대일렉트릭은 지난해 앨라배마 공장 증설을 마친 데 이어 내년까지 울산 공장 증설을 완료해 글로벌 공급 능력을 극대화한다는 계획이다. 두 회사 모두 장거리 송전망 구축과 대규모 발전소 연계 사업에서 강점을 보인다.

반면 LS일렉트릭은 배전기기 시장을 파고드는 틈새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초고압 송전 분야보다는 데이터센터 내부나 공장 등 최종 수용가에게 전력을 분배하는 배전 시스템에 집중한다. 이를 위해 텍사스와 유타주에 생산 거점을 마련했다. LS일렉트릭의 전략은 최근 데이터센터 건설 붐과 맞물려 적중하고 있다. 송전망 구축보다 상대적으로 리드타임이 짧고 데이터센터 완공에 맞춰 즉시 투입되어야 하는 배전기기의 특성상 현지 생산 능력을 갖춘 LS일렉트릭이 수주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3사 모두 북미라는 거대한 시장을 향하고 있지만 효성중공업은 하이엔드 기술력과 선제적 투자를 통한 초격차 전략을, HD현대일렉트릭은 생산 능력 확대를 통한 시장 점유율 확대를, LS일렉트릭은 배전 시장 집중을 통한 니치 마켓 공략을 각각의 필승 카드로 꺼어든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