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석유화학 업계가 시장 불확실성과 정부의 강도 높은 구조조정 압박에 직면하면서 사업구조 재편에 속도를 내고 있다. 주요 화학사들이 비핵심 자산을 과감히 정리하는 동시에, 확보된 자금을 배터리·친환경 등 미래 고부가가치 분야로 집중 투자해 생존과 체질 개선에 사활을 거는 모습이다.

한화솔루션 석유화학 계열사인 여천NCC 제2사업장 전경. 사진=여천NCC
한화솔루션 석유화학 계열사인 여천NCC 제2사업장 전경. 사진=여천NCC

정부는 연말까지 석유화학 기업들의 자율적인 구조조정 계획안 제출을 사실상 '데드라인'으로 못 박았다. 앞서 지난 8월 정부는 석유화학업계와 협의 하에 현재 약 1470만톤의 나프타 분해시설(NCC) 중 270만~370만톤 감축을 목표로 하는 구조 개편 방향 및 정부 지원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이처럼 구조조정 압력이 거세지면서 업계에는 기존의 사업모델로는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데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중국의 에틸렌·프로필렌 증설 여파로 범용 제품 스프레드가 장기간 바닥권에 머물고 있는 데다, 글로벌 탈탄소 규제 강화로 기존 석유화학 중심 사업모델만으로는 수익성을 확보하기 어려워진 상황이다.

주요 기업들은 유동성을 확보하고 고부가 소재·친환경·배터리 중심으로 사업 축을 재편하는 전략 수립에 속도를 내고 있다.

LG화학 대산공장 메탄건식개질(DRM) 공장 전경. 사진=LG화학
LG화학 대산공장 메탄건식개질(DRM) 공장 전경. 사진=LG화학

LG화학, 3축 신사업으로 '선택과 집중'

LG화학은 배터리·친환경·신약 3축이라는 미래성장 동력을 명확히 설정하고 비핵심 사업을 정리하는 '선택과 집중' 전략을 빠르게 실행 중이다.

올해 6월 첨단소재 사업본부에 있던 워터솔루션(수처리 필터) 사업을 사모펀드 글랜우드PE에 1조 4000억원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워터솔루션 사업은 2014년에 미국 나노H2O 인수로 시작됐다. 바닷물을 산업·생활용수로 전환하는 역삼투(RO) 멤브레인 필터를 주력 제품으로, 시장에선 일본 도레이에 이어 글로벌 점유율 2위(해수담수화 시장 점유율, 염분제거율 99.89%) 위치를 기록키도 했다.

'알짜배기 사업'이라고 평가받고 있었던 데다, 매각 당시 EBITDA(상각전 영업이익) 대비 매각가가 약 20배(연간기준 650억원) 수준으로 평가되며 시장에선 "수익성 있는 핵심자산까지 과감히 포기한 결정"으로 평가받았다.

이는 배터리 소재, 친환경 신소재, 신약 개발 등 3대 신성장 사업으로의 전환을 위한 역량 및 리소스 집중에서 비롯된 결정이었다. 특히 배터리 자회사 LG에너지솔루션을 보유하고 있는 만큼 배터리 소재 사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는 모습이다.

LG화학은 지난달 31일 3분기 실적발표회에서 “미중 정세 불확실에 따른 탈중국 전구체 공급망 관리를 지속 보강할 것”이라며 "기 확보된 전구체 캐파를 통해 탈중국 전구체를 조달하고 있으며 추가적 협력 강화를 추진 중"이라고 강조했다.

석유화학 구조조정과 관련해선 여수 NCC(나프타분해설비) 2공장을 가동 중단하고 GS칼텍스와 매각 및 합작사 논의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 스페인 스마트팩토리 조감도. 사진=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 스페인 스마트팩토리 조감도. 사진=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

롯데케미칼, 해외자산·수처리공장 매각…동박·스페셜티로 확장

롯데케미칼은 유동성 확보를 위한 비핵심 자산 매각을 꾸준히 이어왔다.

최근 파키스탄 내 고순도 테레프탈산(PTA)을 제조하는 자회사 LCPL(LOTTE CHEMICAL Pakistan Limited) 지분 75.01% 매각 거래를 완료하며 1276억원의 자금을 확보했다. LCPL은 폴리에스터 섬유, 산업용 원사, PET병 등에 활용되는 PTA을 연간 50만톤 규모로 생산하는 회사다.

매수인은 파키스탄 사모펀드 'API'와 아랍에미리트 석유·화학 트레이딩 기업 'Montage Commodities FZCO'가 공동 설립한 특수목적법인(SPV) 'PTA Global Holding Ltd'다.

지난 7월에는 수처리 분리막(멤브레인) 생산공장을 시노펙스멤브레인에 양도했으며 일본 화학소재기업 레조낙 지분 4.9%도 매각한 바 있다.

롯데케미칼은 향후에도 비즈니스 리스트럭처링을 지속 추진해 본원적 경쟁력 강화를 공고히 하고 고부가 소재와 고기능성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등 스페셜티 사업 비중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자회사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를 통해 동박사업도 참여하고 있어 배터리소재 공급망도 확보했으며 동시에는 수소 에너지 사업을 미래 핵심으로 육성 중이다.

정부의 구조조정 기조에도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방침이다. 롯데케미칼은 HD현대케미칼과 충남 대산 산업단지 내 NCC를 중심으로 한 통합안이 담긴 구조조정 계획서를 가장 먼저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성낙선 재무혁신본부장(CFO)은 12일 열린 실적발표회에서 "범용 석유화학 효율화 관련 국내 석화산업 구조 개편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며 "사업 재편을 논의 중인 곳들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빠른 진전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SKC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반도체 패키징용 글라스 기판. 두께가 얇아 전력효율이 높고 데이터 처리 성능도 뛰어나 반도체 패키징 분 야의 ‘게임체인저’로 꼽힌다. 출처=SKC
SKC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반도체 패키징용 글라스 기판. 두께가 얇아 전력효율이 높고 데이터 처리 성능도 뛰어나 반도체 패키징 분 야의 ‘게임체인저’로 꼽힌다. 출처=SKC

SKC, 전통 화학·PI소재 매각…'글로벌 소재기업'으로

SKC은 2020년 전후부터 '케미컬 컴퍼니에서 글로벌 소재기업으로'라는 비전으로 사업 구조를 바꿔 왔다. 반도체용 CMP패드, 동박, 친환경소재 등 미래산업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확장하며 범용 화학사업은 단계적으로 축소했다.

최근에는 화학원료 생산 자회사 SK피아이씨글로벌 지분 100% 매각을 추진 중이다. SKC와 쿠웨이트 국영 석유화학기업 PIC가 공동 설립했던 석유화학 원료 생산업체로 폴리우레탄(PU)의 원재료인 프로필렌옥사이드(PO)를 국내 최초로 상업화했으며 프로필렌글리콜(PG) 등 기초 화학원료를 생산한다.

SKC는 2023년에도 폴리우레탄 원료 사업을 정리했고, 필름사업 부문 등 전통 화학·일반 소재 자산을 순차 매각해 왔다.

올해는 SK넥실리스(동박), SK엔펄스(친환경소재) 등 핵심 자회사 성장 투자를 강화하고 있다. 특히 동박사업을 확장하며 2차전지 소재 부문 세계 톱티어 진입 전략을 병행, 구체적인 신규 투자계획과 시장확대 시점을 맞물려 실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