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날이 짧아서 그럴까요? 지난 일을 반추하는 시간들로 가을날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달포 전 귀국해 보름여를 함께 지낸 손자가 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떠난 지가 좀 되었어도 아이가 유쾌하게 웃는 모습과 소리의 여운이 길게 남아있습니다. 다섯 돌이 지나서 이제 장난도 제법 치는 데 가기 전날 나와 집사람에게 갑자기 아버님, 어머님이라 부르는 겁니다. ‘이게 뭐지?’하는 데 이어 내 이름과 아내 이름을 부르는 겁니다. 제 부모 따라 아버님, 어머님 했다가 재미없으니 갑자기 장난을 치느라 우리 이름을 부른 게지요. 맹랑했지만, 뒤끝은 유쾌 그 자체였습니다.
손자 생각하면 육아에 힘들어하는 딸네가 우선 생각되어집니다. 수목원서 만난 해프닝도 그쪽으로 연결이 되구요. 짧은 가을이 주는 아쉬움에 수목원을 지금 많이들 찾는 데 특히 주말은 많은 사람들로 구석구석이 북적입니다. 그러다 마치는 시간이 되면 썰물처럼 빠져나갑니다. 일찍 찾아올 어둠을 피해 가는 듯한 느낌으로 말이죠. 그러다 생긴 해프닝입니다.
지난 토요일에 퇴근하려는데 차 한 대도 없는 수목원 주차장에 유모차 한 대만 덩그라니 놓여있는 겁니다. 안내실에 유모차를 맡기면서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일차 들었는데, ‘그래도 아이는 안 버렸는데 뭘’ 하며 바로 바쁜 육아에 시달렸을 아이의 엄마, 아빠가 이해되었습니다. 과거 같으면 뾰족한 마음에 한심한 아이 부모라며 혀를 끌끌 찼을 텐데 말이죠. 내가 이렇게 둥글어진 데는 기실 아이를 키우는 딸아이의 고충을 빤히 보기에 그랬습니다.
나는 할아버지로서 모든 것이 이뻐 보이는데 녀석의 자아가 생겨 제 엄마에게 주장하는 모습을 보니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제 엄마와 만화 영상을 일정 시간 보기로 하고 그 다음은 목욕을 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약속한 시간이 지나 목욕하자고 얘기하는데 하필 만화의 재미있는 부분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목욕을 권하는 제 엄마에게 그걸 거부하면서 손자가 하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왜 엄마는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와서도 엄마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거야?’ 순간 내가 나서 ‘손자야. 엄마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라 약속대로 하는 거 아닐까?’라고 한마디 하려다 입을 꽉 다물었습니다.

문득 김용택 시인의 얘기가 생각났습니다. 자녀들에게 삶의 고비 고비마다 자신이 깨달은 것들을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그렇지만 자식들이 넘어지면서도 스스로 깨달아 가는 기쁨이나 감동이 크려니 참게 된다고.
자식 키우는 게 정말 극한 직업인데, 나도 자식을 여러 면으로 도와주고 싶습니다. 많은 말도 해주고 싶지만 떨어져 살고, 내가 아이를 계속 지켜보지 못하는 상황이니 참게 됩니다. 아이가 앞으로 더 성장통을 겪으며 이른바 질풍노도의 시절을 건너갈 때 아이 부모가 건강히 버티길, 더 단단해지길 바랄 뿐. 말을 아끼고 지켜보는 수밖에. 그로서 우리가 더 단단해지고 성숙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해졌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