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6일(현지시각) 찰스 3세 영국 국왕의 초청으로 영국을 다시 국빈 방문했다. 현직 대통령이 임기 중 두 차례나 영국 국왕의 초청을 받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지만 이번 미영 정상회담을 바라보는 시선은 복잡하다.
워싱턴포스트(WP)는 “한때 미국과 영국은 세계 무대의 기둥이었으며, 이번 양국 정상의 만남은 세계 질서가 예측 가능하다는 신호였다”라면서도 “국제 동맹, 다자 협력, 민주적 가치라는 안전 장치이 흔들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서양 관계의 해결사가 아닌 ‘혼란의 원인’으로 인식된다는 혹평이다.
실제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외교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라는 단 하나의 원칙 아래 모든 것을 경제적 손익으로 환산하는 ‘동맹의 상업화’로 요약된다. 수십년간 이어진 우방과의 신뢰는 비용 청구서로 대체되고 적대국과는 이익만 맞는다면 언제든 손잡는 ‘거래의 기술’이 전통적 외교를 밀어냈기 때문이다.

동맹에 날아든 3500억 달러짜리 청구서
트럼프식 외교의 핵심은 동맹을 안보 공동체가 아닌 비즈니스 파트너로 간주하는 데 있다.
실제로 한국과 일본 유럽연합(EU) 등 오랜 우방국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노골적인 투자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한국은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펀드를 미국이 원하는 방식으로 내놓으라는 요구를 받고 있으며 일본과 EU 역시 각각 5500억달러 60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 내부적으로 “과도한 부담”이라는 불만이 터져 나오지만 미국의 압박은 거세다.
최근 조지아주 현대차·LG 배터리 공장을 둘러싼 미 이민 당국의 단속도 결이 비슷하다. 이제 동맹의 투자가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불안감마저 키웠다는 평가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정책도 마찬가지다. 트럼프 행정부는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의 수백억달러 직접 지원과 달리 군사 원조 대신 투자를 통한 간접적 관여를 택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 정부는 최근 우크라이나의 광물 자원 개발에 7500만달러(약 1037억원)를 투자하기로 17일 밝혔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를 두고 “미·우크라 동맹이 ‘상업적 이해관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전쟁 자금은 더 이상 제공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 개입을 유지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는 자국의 핵심 자산에 대한 지분을 넘기는 상업적 협력에 기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렸다. 율리아 스비리덴코 우크라이나 총리는 “미국의 투자는 신뢰와 장기적 파트너십의 신호”라며 애써 의미를 부여했지만 동맹의 본질이 변했다는 사실은 명확해졌다.

‘미국 방패’ 못 믿겠다…새로운 동맹 찾는 사우디
미국의 안보 보장에 대한 신뢰가 약화하자 전통적 동맹국들은 자구책 마련에 나섰다. 수십년간 미국의 군사 보호에 의존해온 사우디아라비아가 새로운 안보 동맹을 찾아 나선 것이 대표적 사례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8일 사우디가 핵무기 보유국인 파키스탄과 상호방위협정을 체결했다고 보도했다. 어느 한 국가가 무력 침공을 받으면 다른 국가가 군사 지원을 하는 강력한 수준의 협정이다. 사우디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이번 협정은 모든 군사적 수단을 포괄한다”며 파키스탄의 ‘핵우산’ 제공 가능성까지 열어뒀다.
미국에 대한 누적된 실망감이 결정타다. 특히 지난 9일 이스라엘이 카타르 내 하마스 지도부를 공습한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중동 최대 미군 기지가 있는 핵심 동맹국 카타르가 공격받는 모습을 보며 사우디는 미국이 더 이상 완벽한 방패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고 WSJ은 분석했다.
안보를 거래의 대상으로 여기는 트럼프 행정부의 태도가 동맹국들의 이탈을 부추기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고 있는 셈이다.

적과의 과감한 악수…중국·러시아엔 유화 제스처
동맹을 향한 가혹한 잣대는 적대국을 대하는 태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경쟁 관계인 강대국 지도자들과는 ‘강 대 강’의 대결보다 개인적 친분을 바탕으로 한 ‘빅딜’을 선호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19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통화한 뒤 내달 말 한국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만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생산적인 통화를 마쳤다”며 “내년 초 중국을 방문할 것”이라고 전했다.
틱톡 매각 승인 문제 등에서 진전을 이뤘다는 점도 부각했다. 무역 전쟁으로 격하게 대립하면서도 정상 간 대화의 끈은 놓지 않고 실리를 챙기려는 모습이다.
러시아를 향한 태도 역시 복합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18일 영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 문제가 생각보다 복잡하다며 “푸틴 대통령이 나를 정말로 실망시켰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제 해결 방식은 러시아를 직접 압박하는 대신 유럽 동맹국들을 압박하는 우회로를 택했다.
이달 초 미·EU 고위급 회의에 직접 전화를 걸어 러시아의 전쟁 자금줄을 끊기 위해 EU가 중국과 인도에 최고 100%의 관세를 부과하라고 요구한 바 있다. 러시아산 원유의 최대 구매처인 두 나라를 제재해야 전쟁을 멈출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러나 정작 러시아산 원유를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수입하는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에게는 직접 전화해 생일을 축하하며 “나의 친구”라고 치켜세우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예측 불가능성, 외교 무대의 가장 큰 혼란 요인
트럼프 외교의 또 다른 특징은 극도의 예측 불가능성이다. WP는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전쟁 입장을 19차례나 뒤집었다”며 그의 즉흥적 태도가 외교 무대의 가장 큰 혼란 요인이라고 꼬집었다.
이번 영국 방문도 마찬가지다. 트럼프 대통령과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 문제를 놓고 공개적으로 이견을 드러냈다. 스타머 총리가 조건부 승인을 언급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이는 하마스의 테러에 보상을 주는 것”이라며 “총리와 의견이 불일치하는 몇 안 되는 부분 중 하나”라고 잘라 말했기 때문이다.
런던대 캐슬린 버크 명예교수는 “과거에는 협상팀이 조율해 합의문을 마련했지만 지금은 오직 한 사람의 즉흥적 결정만이 중요하다”며 “이제는 국가가 아니라 한 ‘예측 불가능한 인물’에 의해 국제 외교의 방향이 좌우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 자신은 이러한 정책의 결과를 자랑스러워한다. 그는 18일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관세로 수조 달러를 벌어들였다”며 자신이 전 세계에 부과한 관세 덕분에 미국에 대한 투자가 17조달러에 달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