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시대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는 엔비디아가 한때 ‘반도체 제국’이었던 인텔에 50억달러(약 6조9320억원)를 투자하고 PC와 데이터센터용 칩을 공동 개발한다고 18일(현지시간) 발표했다. 단순한 지분 투자를 넘어선 양사의 전략적 동맹이다. AI 시대의 컴퓨팅 패러다임을 바꾸고 TSMC 및 AMD 등 경쟁사들을 거센 파고 속으로 밀어 넣는 ‘세기의 빅딜’로 평가된다.
엔비디아가 과거의 시장 지배자였던 인텔의 손을 잡아주는 역전된 권력 구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분석이다. 나아가 파운드 및 CPU와 GPU의 결합, 이어 경쟁사와의 관계설정에도 의미심장하다는 평가다.

무슨 일?
엔비디아는 인텔의 보통주를 주당 23.28달러에 매입해 지분 4% 이상을 확보하며 주요 주주로 올라선다고 밝혔다. 지난달 미국 정부가 인텔 지분 10%를 취득하며 지급한 주당 20.47달러보다 높은 금액으로 책정한 것을 보면 그 미래 가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음을 시사한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이번 역사적인 협력은 엔비디아의 AI와 가속 컴퓨팅 기술을 인텔의 CPU와 방대한 x86 생태계에 긴밀하게 결합하는 것으로 두 세계적인 플랫폼이 하나로 융합되는 것”이라며 “우리는 함께 생태계를 확장하고 다음 시대 컴퓨팅의 토대를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립부 탄 인텔 CEO는 “젠슨 황과 엔비디아 팀이 인텔에 보여준 신뢰에 감사하며 앞으로 고객을 위한 혁신에 함께 나설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인텔의 x86 아키텍처는 수십 년간 현대 컴퓨팅의 토대였으며 앞으로도 미래의 워크로드를 지원하기 위해 혁신을 이어가겠다”고 강조했다.
뉴욕 증시는 즉각 반응했다. 이날 인텔 주가는 28% 폭등하며 32달러에 육박했고 엔비디아 주가 역시 3.55% 상승했다. 반면 직격탄을 맞은 경쟁사 AMD의 주가는 5% 이상 하락하는 등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렸다.

생존 위한 인텔의 승부수, 패권 강화를 위한 엔비디아의 야망
이번 협력은 각자의 필요가 맞아떨어진 결과물이다.
인텔에 있어 이번 협력은 사실상의 ‘구명줄’이다. 수년간의 회생 노력이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시장의 패자(覇者)인 엔비디아의 투자는 단순한 자금 수혈을 넘어 기술적 신뢰도를 회복하는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차세대 PC 칩에 엔비디아의 그래픽 기술을 탑재함으로써 숙명의 라이벌 AMD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발판을 마련했다.
엔비디아의 계산은 더 복잡하다.
우선 AI 칩 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한 엔비디아에게 이번 투자는 제국을 더 견고히 다지는 전략적 포석으로 보인다. 실제로 엔비디아의 AI 가속기는 대규모 클러스터로 묶여 작동하는데 이 과정에서 일반 연산을 담당할 고성능 중앙처리장치(CPU)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인텔이나 AMD의 기성품 CPU를 사용했지만 이번 협력을 통해 엔비디아의 AI 아키텍처에 최적화된 맞춤형 인텔 CPU를 공급받을 길을 연 것이다.
젠슨 황 CEO가 “우리는 인텔 CPU의 매우 큰 고객이 될 것”이라고 공언한 것은 이러한 자신감의 표현으로 봐야 한다. 당장 엔비디아는 인텔의 CPU를 구매해 자사의 ‘슈퍼칩’에 연결하고 이를 랙 스케일 AI 슈퍼컴퓨터에 통합할 계획이다. 이는 AI 시스템의 성능과 효율을 극대화해 경쟁자들이 따라올 수 없는 ‘초격차’를 만들겠다는 의도다.
PC 시장으로의 영토 확장 야심도 드러난다. 실제로 황 CEO는 노트북 PC용 인텔 칩에 자사의 GPU 기술을 제공하는 시장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고 있다”며 양사 협력으로 공략할 수 있는 시장 가치가 500억달러에 이른다고 평가했다. 이는 인텔의 방대한 PC 생태계를 발판 삼아 자사의 그래픽 기술 영향력을 PC 시장 전체로 확대하려는 전략이다.

TSMC·AMD 정조준… 반도체 공급망 재편 신호탄
경쟁사들도 긴장하고 있다.
가장 촉각을 곤두세운 곳은 엔비디아의 핵심 생산 파트너인 대만의 TSMC다. 이번 발표에서 인텔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계약은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이 강조됐지만 이는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인텔 파운드리에 대한 호불호는 극명하지만, 엔비디아의 큰 그림에 인텔 파운드리가 포함되지 않았을 가능성은 낮다.
현재 엔비디아는 자사 칩 생산을 TSMC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큰 대만에 생산을 맡기는 것에 대한 부담을 항상 안고 있다는 의미다. 황 CEO가 “우리는 인텔의 파운드리 기술을 꾸준히 검토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라며 가능성을 열어둔 점이 의미심장한 이유다. 나아가 미국 정부가 자국 내 반도체 공급망 강화를 강력히 추진하는 상황에서 엔비디아의 ‘미국산 칩’ 생산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될 수 있다. TSMC로서는 최대 고객을 인텔에 빼앗길 수 있다는 장기적 위협에 직면한 셈이다.
AMD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특히 데이터센터 시장에서는 엔비디아에 최적화된 인텔 CPU의 등장으로 자사 서버용 CPU ‘에픽’의 입지가 흔들릴 수 있다. 또 PC 시장에서는 CPU와 GPU를 통합한 APU 제품이 강점이었으나 엔비디아의 그래픽 기술을 품은 인텔 CPU가 등장하면 힘이 급격히 빠질 우려도 있다. 인텔과 엔비디아라는 두 거인의 협공에 샌드위치 신세가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다.
한편 ARM 진영에도 미묘한 파장을 일으킨다. 엔비디아가 ARM 기반의 자체 CPU ‘그레이스’를 개발하며 x86 생태계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이번 협력으로 x86 진영의 대표주자인 인텔과도 손을 잡는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엔비디아가 특정 아키텍처에 종속되지 않고 ARM과 x86 양쪽 모두에서 최고의 솔루션을 제공하며 AI 시대의 플랫폼 지배력을 공고히 하겠다는 양수겸장 전략으로 풀이된다.

칩렛 시대 개막
기술적으로 이번 협력은 개별 칩의 성능 경쟁을 넘어 여러 기능을 가진 반도체 조각(칩렛)을 하나로 묶어 최적의 성능을 구현하는 ‘이종집적’ 시대가 본격화됐음을 알린다. 무엇보다 인텔의 CPU와 엔비디아의 GPU가 하나의 시스템온칩(SoC)으로 통합된다는 점은 데이터 처리 속도를 극적으로 높이고 전력 효율을 개선하는 핵심 열쇠로 평가된다.
특히 AI 서비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추론’ 영역에서 결정적 차이를 만들 전망이다. 당장 GPU와 CPU가 한 몸처럼 움직이면 데이터 이동 거리가 짧아져 지연 시간이 크게 줄고, 이는 더 빠르고 저렴한 AI 서비스를 가능하게 만들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