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석유화학 산업이 중국과 중동의 대규모 증설 및 수요 부진이란 이중고를 맞으며 위기에 직면했다. 특히 최대 고객이었던 중국이 자체 생산에 나서며 시장 경쟁에 뛰어든 점이 큰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꼽힌다.

국내 기업들의 위기가 가시화되자 정부가 산업 회복을 위한 속도전에 직접 개입하고 나섰다. 석유화학사들의 구조조정 유도와 대규모 금융·세제 지원, 규제 완화가 종합적으로 검토되는 전방위 구조재편 대책을 늦어도 이달 안으로 내놓을 방침이다.

최대 고객 中의 성장…국내 기업은 계속 나빠져

롯데케미칼 여수공장 전경. 사진=롯데케미칼
롯데케미칼 여수공장 전경. 사진=롯데케미칼

국내 석유화학 업계는 중동·중국의 대규모 증설과 수요 부진이 겹쳐 3~4년째 불황이 깊어지고 있다.

한국의 최대 수출 고객이었던 중국이 자체적인 석유화학 설비 증설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고, 저렴한 인건비와 정부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은 자체 생산으로 해외 수출을 시작하며 한국이 우위를 점했던 시장 판도를 뒤집었다.

실제 중국은 ‘에너지·화학 자급률 70%’라는 목표로 2014년 1950만톤이던 에틸렌 생산능력을 지난해 5274만톤까지 약 3배 가까이 크게 불리기도 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글로벌 경제 둔화로 소비 심리가 많이 위축돼 있던 상태에서 글로벌 공급 과잉까지 겹치며, 이중고는 국내 기업들의 실적과 재무 구조에 직접적인 타격을 안겼다.

최근에는 한화그룹과 DL그룹이 합작해 설립한 여천NCC가 적자 누적에 따른 재무구조 악화로 부도 위기에 몰리며 추가 출자, 유상증자와 같은 위기·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직면한 사례가 단적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국내 석유화학 업계 전반에 경고음을 울리는 순간이다.

올해 주요 석유화학 기업이 발표한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평균 가동률은 전년 대비 대폭 감소하는 것은 물론, 수익성 확보를 위한 평균 수치(70~80%)에도 미치지 못 한 곳들이 대다수였다.

롯데케미칼의 나프타 분해(NC) 평균 가동률은 지난해 81.0%에서 64.4%로 감소했다. 폴리에틸렌(PE)은 88.8%에서 71.7%로 폴리프로필렌은 88.5%에서 72.8%로 전부 15%포인트 이상 급락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LG화학의 전체 사업 가동률은 78.0%에서 71.8%로, 이 중 에틸렌·PE·PP·합성고무 등 기초소재를 생산하는 범용 석유화학 품목 가동률은 83.4%에서 81.3%로 하락했다.

금호석유화학의 경우 합성고무 부문은 70.0%에서 66.0%로, 합성수지 부문은 60.0%에서 57.0%로 나타났다. 60%를 채 못 미치는 수치로 집계되기도 했다.

공장 가동률 급락으로 인해 직원 수도 대폭 감소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말과 비교해 올해 2분기 기준 직원 수는 롯데케미칼 209명, LG화학 183명, 한화솔루션 120명이 감소한 것으로 집계됐다. 

정부, 대책 이달 안으로 발표…구조조정·공정거래법 완화 관건

금호석유화학 본사 전경. 사진=금호석유화학
금호석유화학 본사 전경. 사진=금호석유화학

한국화학산업협회가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을 통해 진행한 컨설팅 용역에 따르면 국내 석유화학 기업의 영업손익과 재무 상황을 고려했을 때 현재의 불황이 이어진다면 3년 뒤 기업 절반은 지속이 불가능할 것으로 전망됐다.

이에 정부도 위기 의식을 공유하며 대응 속도를 높이는 모습이다. 늦어도 이달 중으로 석유화학 기업들의 설비개편 등 자발적 구조조정 유도와 각종 인센티브 지원에 초점을 둔 ‘석유화학 산업 사업재편 대책’을 발표한다는 계획이다.

구체적으로는 기업들이 각자 중장기 사업계획과 손익계산을 통해 자발적으로 사업을 정리·조정하거나 인수합병(M&A) 등 결단을 내리면 정부는 각종 금융·세제 지원에 나선다는 것이다.

해당 내용은 정유사와 석유화학사의 통합 카드가 관건이다.

현재 정유사는 원유를 들여와 석유화학의 원료인 납사를 생산해 석화사에 판매한다. 석화사는 NCC(나프탈렌분해시설)에서 에틸렌·프로필렌 등 기초 원료를 생산한 뒤 합성수지·합성섬유 등 고부가가치 제품을 만든다.

정유사가 NCC까지 직접 운영해 설비를 효율화하고, 석화사는 원가 절감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다.

현재 HD현대오일뱅크와 롯데케미칼은 충남 대산 석유화학단지 내에서 NCC 통합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뒷받침할 공정거래법 규제의 한시적 완화 여부도 관건이다.

그간 공정거래법은 기업 간 협의나 설비 조정 논의를 담합으로 해석할 수 있어 M&A와 설비 통합의 장벽으로 꼽혀 왔다. 현행 공정거래법에 따르면 M&A 시 기업의 시장점유율 합계가 분야 1위가 되면 제한된다.

이와 관련 정부는 과거 1980년대 오일쇼크 여파로 위기에 몰린 석유화학 산업의 재편 과정에서 M&A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공정거래법 적용을 한시 유예했던 선례를 참고해 공정거래법 한시적 완화 대책 포함 여부를 마지막까지 고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외에도 석화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납사·납사 제조용 원유에 대한 무관세 기간 연장, 에탄 등 원료 확보를 위한 터미널 및 저장탱크 건설을 위한 인허가 '패스트 트랙' 지원, 공업 원료용 액화천연가스(LNG) 석유 수입 부과금 환급 등도 지원한다. 나아가 3조원 이상 규모의 정책금융자금 지원과 분산형 전력 거래 활성화를 통한 전기요금 선택권 확대, 규제 합리화에도 나설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