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선두 주자 테슬라와 반도체 강자 삼성전자가 약 23조 원(165억 달러) 규모의 차세대 인공지능(AI) 칩 생산 계약을 체결하며 판을 흔들었다.
단순한 부품 공급 계약이 아니다. 자율주행, AI, 로보틱스의 미래를 건 양사의 전략적 파트너십으로 평가된다. 실제로 삼성전자에는 수년간 부진했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의 극적인 부활을, 테슬라에는 안정적인 첨단 반도체 공급망 확보라는 청사진을 제시하는 '세기의 딜'이다.
이런 가운데 협력의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테슬라가 삼성의 제조 공정에 깊숙이 개입하는 전례 없는 길이 열리면서 대량생산 메모리 반도체에 익숙한 삼성이 AI 시대에 맞는 '솔루션 파트너'로 거듭날 수 있을지 시선이 집중된다. 나아가 협력의 현실적 현안들을 하나하나 따져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재용의 승부수, 파운드리 잔혹사 끊고 TSMC 추격 고삐
이번 계약은 수년간 파운드리 시장에서 고전하던 삼성전자에 가뭄의 단비와도 같다.
세계 1위 TSMC가 60% 이상의 점유율로 독주하는 동안 삼성의 점유율은 한 자릿수까지 추락하며 위기감이 고조됐다. 특히 최선단 공정에서 대형 고객사를 확보하지 못해 텍사스 공장의 미래마저 불투명하다는 우려가 나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터져 나온 이번 '잭팟'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뚝심 있는 리더십이 낳은 결과라는 평가가 나온다. 2019년 파운드리를 미래 먹거리로 낙점한 이후, '사법 리스크' 속에서도 꾸준히 투자를 이어오고 머스크 CEO와 직접 만나 신뢰를 쌓는 등 공을 들인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보았다는 평가다.
테슬라라는 확실한 '레퍼런스'를 확보하면서 삼성은 최첨단 2나노 공정의 기술력을 시장에 증명하게 됐다. 이는 향후 퀄컴, 엔비디아 등 다른 대형 팹리스 고객사들을 유치하는 데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며, TSMC와의 격차를 좁히고 파운드리 사업을 정상 궤도에 올리는 결정적인 변곡점이 될 전망이다.
"계약금은 시작일 뿐"…AI 생태계 전반으로 확장될 동맹
머스크 CEO가 계약 금액 165억 달러에 대해 "최소 금액에 불과하고 실제 생산량은 그보다 몇 배 더 많을 것"이라고 언급한 점도 의미심장하다. 이들 동맹의 미래가 단순 칩 생산을 넘어설 것임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당장 'AI6' 칩이 차량과 로봇을 넘어 테슬라의 슈퍼컴퓨터 '도조' 등 데이터센터까지 확장될 경우, 양사의 협력 관계는 AI 생태계 전반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번 동맹이 삼성과 테슬라, 양사 모두에게 거대한 도전이자 기회인 이유다. 테슬라는 안정적인 반도체 파트너를 확보해 AI 시대를 향한 질주에 속도를 더하게 됐고, 삼성은 뼈를 깎는 체질 개선을 통해 파운드리 명가로 재도약할 발판을 마련했다. 보기에 따라 엔비디아-TSMC 동맹에 대항할 수 있는 또다른 카드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다만 축포를 터트리기 전, 이번 거래의 세밀한 행간을 짚어볼 필요도 있다.

개인과외 머스크…삼성에겐 '불편한 동반자'이자 '혁신의 기회'
이번 계약의 가장 파격적인 부분은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예고한 '직접 참여'다.
실제로 머스크는 X를 통해 "테슬라가 생산 효율성 극대화를 위해 직접 참여할 것"이라며 "내 집에서 멀지 않은 그 공장에 직접 가서 진전 속도를 올릴 것"이라고 밝혔다.
반도체 업계의 전통적인 '고객-공급사' 관계를 완전히 뒤엎는 선언이다. 삼성이 가진 파운드리 제조 인프라가 필요한 상태에서 테슬라가 가진 기민한 소프트웨어 중심 시스템을 삼성에 투영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제1원칙'에 입각해 모든 공정을 근본부터 재검토하며 효율을 광적으로 추구하는 머스크 스타일이 삼성의 심장부인 텍사스 팹(Fab)에 이식되는 셈이다.
삼성에게 양날의 검이다.
우선 지난 수십 년간 '초격차' 기술로 메모리 시장을 제패하며 '만들어주면 고객이 사 간다'는 공급자 중심의 마인드에 익숙했던 삼성에게, 고객사가 생산 라인에 들어와 사사건건 개입하는 상황은 불편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충돌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
다만 큰 틀에서는 기회다. AI 시대에 필수적인 '솔루션 프로바이더'로 변모할 절호의 기회기 때문이다.
AI 반도체는 연산, 메모리, 통신 기술이 유기적으로 결합해야 최적의 성능을 낼 수 있다. 당연히 고객과의 긴밀한 협의와 맞춤형 솔루션 제공이 핵심 경쟁력이다. 세계 파운드리 1위 TSMC가 대표적이다. TSMC는 '고객의 성공이 우리의 성공'이라는 철저한 서비스 마인드로 맞춤형 솔루션을 기반으로 한 오래된 동맹 생태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반면 삼성은 기술력은 뛰어나지만 고객과의 소통과 유연성 면에서 약점을 보여왔다. 대량 생산으로 찍어내는 기술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나 이 지점에서 고객사에 대한 유연함은 없었다.
테슬라와의 '불편한 동거'가 기회인 이유다. 삼성이 스스로의 한계를 깨고, 고객의 요구에 철저히 맞추는 '을'의 자세를 체득하며 진정한 파운드리 강자로 거듭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텍사스 공장의 명암…'메이드 인 USA'의 지정학적 이점과 '사라진 낙수효과'
이번 계약의 무대가 삼성의 최첨단 시설인 미국 텍사스 테일러 공장이라는 점도 전략적으로 절묘하다. '메이드 인 USA' 반도체는 미국 정부의 반도체 산업 육성 정책(CHIPS Act)에 부응하며 각종 혜택을 기대할 수 있고, 미중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지정학적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가장 확실한 카드기 때문이다.
테슬라 입장에서는 공급망 안정성을, 삼성 입장에서는 미국과의 관계 설정을 공고히 하는 효과를 동시에 누릴 수 있다.
다만 역으로 생각하면 이는 한국 산업계 전체의 아쉬움이다. 조 단위 투자가 미국 현지에서 이뤄지고 그곳에서 일자리가 창출되면서 국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들이 누릴 수 있는 낙수효과는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국내 공장 증설 시 함께 성장했던 생태계의 선순환 구조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삼성전자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지만, 국가 경제 전체의 관점에서는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