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연합(EU)이 지난 27일(현지시간) EU산 수입품 대부분에 15%의 단일 관세를 부과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무역협정에 전격 합의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이날 영국 스코틀랜드 턴베리에서 약 한 시간 회동한 뒤 '15% 관세율'에 합의했다고 각각 발표했으며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으로 수출되는 EU산 자동차도 15% 관세율이 적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통상 지형이 또 한 번 요동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가 관철된 이번 합의는 8월 1일 협상 시한을 앞둔 한국에겐 피할 수 없는 '압박'이자 복잡한 셈법을 요구하는 '과제'기 때문이다. 일본에 이어 거대 경제권인 EU마저 미국의 관세 장벽 앞에 사실상 '백기'를 들면서 한국의 협상 공간은 더욱 좁아졌다.
입체적 전략이 필요하다는 평가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단순한 투자 보따리가 아닌, 쇠락한 미국 조선업을 재건할 '기술 동맹'이라는 차별화된 카드를 꺼내 들며 정면 돌파를 시도하고 있다.

'15% 룰'의 확립…EU는 무엇을 내주었나
이번 미국과 EU의 합의는 표면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예고했던 30% 관세에서 한 발 물러선 '15%'라는 타협점을 찾은 모양새다. 다만 합의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EU가 '최악'을 피하기 위해 상당한 실리를 내주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가장 큰 출혈은 총 1조 3500억 달러(약 1870조 원)에 달하는 대규모 구매 및 투자 약속이다. EU는 향후 3년간 7500억 달러 규모의 미국산 에너지를 구매하고 별도로 6000억 달러의 추가 투자를 단행하기로 했다는 설명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집요하게 요구해 온 '무역 불균형 해소' 요구에 EU가 통 큰 양보로 화답한 셈이다.
자동차를 포함한 대부분의 주력 수출품에 15%의 관세가 부과되는 것도 받아들였다. 기존 27.5%에 달하던 자동차 관세가 낮아진 점은 독일, 이탈리아 등 자동차 강국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했지만 이전의 무관세 시대를 생각하면 뼈아픈 대목이다. 독일산업연맹(BDI)이 "고통스러운 관세를 수용한 불충분한 타협"이라고 비판한 이유다.
물론 EU도 얻은 것이 있다. 특히 항공기 및 부품, 일부 화학제품과 복제약, 반도체 장비 등 '전략 품목'에 대한 상호 무관세를 관철시킨 것은 성과다. 첨단 산업의 공급망 안정을 꾀하고 미국의 일방적인 관세 공세에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는 미국의 필요와도 맞닿아 있는 부분으로 EU만의 성과로 보기는 어렵다는 시각이다.
결국 이번 협상은 '거래의 기술'을 앞세운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 전술이 또다시 통했음을 보여준다. EU는 관세 전면전이라는 파국을 막는 대신 에너지·투자·군사장비 등 미국이 원하는 것을 내주는 '실리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 폭력적인 타격을 감내하기로 한 것처럼, EU도 비슷한 분위기를 창출하고 있다는 평가다.

한국의 '신의 한 수'…'MASGA'는 왜 강력한 카드인가
일본(5500억 달러 투자 약속), EU(6000억 달러 투자 약속)가 차례로 미국의 관세 장벽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한국에 대한 압박은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경제 규모 면에서 이들보다 작은 한국이 유사한 규모의 투자 약속을 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정부가 '1000억 달러+α' 규모의 투자 패키지를 제시했지만 액면가로는 부족해 보일 수밖에 없다.
다만 비밀무기는 있다. 정부가 꺼낸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 카드다. 단순히 돈을 푸는 방식이 아니라 한국의 핵심 역량인 조선업 기술과 인력, 운영 노하우를 통째로 이식해 미국의 오랜 숙원인 '조선업 재건'을 돕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이라 특히 시선이 집중된다.
MASGA 카드가 강력한 이유는 이것이 트럼프 행정부의 전략적 목표, 무엇보다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미국의 아킬레스건으로 꼽히는 해군력 증강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 조선업의 현실은 처참하다.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상선 건조 시장 점유율은 0.1%대로 추락했으며, 군함 건조 능력마저 한계에 부딪혔다. 버지니아급 공격 잠수함, 컨스텔레이션급 호위함 등 핵심 해군력 증강 사업은 수년째 지연되고 있고, 건조 비용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중국의 조선소 건조 역량이 미국의 230배에 달한다는 분석은 미국 조야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계 최고의 '스마트 조선소' 기술과 건조 역량을 보유한 한국의 협력 제안은 미국 입장에서 거부하기 힘든 매력을 가진다. MASGA 프로젝트는 ▲한국 민간 조선사(HD현대, 한화오션 등)의 미국 현지 조선소 직접 투자 및 건설 ▲디지털 트윈, AI 기반 자동화 등 스마트 조선소 기술 이전 ▲숙련 인력 양성 및 공급망 구축 지원 등을 포괄한다. 이는 단순한 재정 지원을 넘어 미국의 산업 기반 자체를 되살리는 '지속 가능한' 협력 모델이라는 점에서 일본이나 EU의 투자 약속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실제로 일본이 약속한 5500억 달러의 투자 패키지는 상당 부분이 기존 투자 계획의 재포장이거나 실체가 불분명한 대출·보증으로 채워져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반면, 한국의 MASGA는 '그린필드형(생산시설 직접 투자)' 제안으로, 고용 창출과 산업 파급 효과가 훨씬 직접적이고 가시적이다.
정부가 '수십조 원' 규모의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제시하고 수출입은행 등의 금융 지원까지 약속하며 진정성을 보인 점에 하워드 루트닉 미 상무장관 역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관세 동맹' 시대의 생존법
미-EU 협상 타결로 '15% 관세'가 새로운 글로벌 기준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커졌다. 이는 자유무역을 근간으로 성장해 온 한국에겐 근본적인 통상 전략의 수정을 요구하는 도전이다.
당장 한국은 자동차 관세를 최소 15% 이하로 낮춰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일본, EU 자동차가 15% 관세로 미국 시장에 들어오는 상황에서 현재의 25% 관세를 그대로 적용받는다면 현대차·기아의 가격 경쟁력은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치적 반발도 무시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온다.
관건은 MASGA 프로젝트의 실효성을 얼마나 높이고 이를 통해 자동차 등 핵심 수출 품목에서 최대한의 관세 인하를 끌어내는가에 달렸다. 미국이 절실히 원하는 '조선업 재건'이라는 선물을 주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반대급부를 확보해야 하는 팽팽한 줄다리기가 예상되는 이유다.
업계 관계자는 "장기적으로는 트럼프 행정부가 주도하는 '관세 동맹' 체제에 대한 적응과 새로운 생존 전략 모색이 시급하다"면서 "이번 협상들은 세계무역기구(WTO)로 대표되는 다자주의 무역 체제가 사실상 힘을 잃고, 강대국 중심의 양자 간 '힘의 거래'가 뉴노멀이 되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미국 내 현지 생산 확대 등 공급망 재편 가속화 ▲핵심 기술 분야에서의 초격차 유지 ▲인도·아세안 등 신흥 시장으로의 수출 다변화 등 보다 근본적인 경제 체질 개선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동시에 미국과의 '기술·산업 동맹'을 조선업을 넘어 반도체, AI, 바이오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하며,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독보적인 가치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창의적인 외교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시점이라는 평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