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의 AI법은 AI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한 인류의 반격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ICT 시대를 맞아 미국 실리콘밸리에 밀리고 있는 유럽의 복잡한 심경도 깔려있다. 구체적으로 '모바일에 이어 AI까지 우리의 땅을 더 이상 내어줄 수 없다"는 결연한 다짐이다.

유럽연합 깃발. 사진=갈무리
유럽연합 깃발. 사진=갈무리

AI법에 담긴 유럽의 노림수
EU가 발의한 AI법은 AI의 부작용 및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한 전략이다. 실제로 EU의 AI법은 말 그대로 '규제'에 방점이 찍혔다. 최근 세계적인 팝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의 얼굴을 합성한 딥페이크 음란물이 광범위하게 유포되는 등 AI 논란이 커지는 상황에서 이를 바로잡으려는 시도가 담겼다는 평가다. 

다만 그 이면에는 더욱 복잡한 전략이 깔려있다. 미국 실리콘밸리가 주도하는 AI 웨이브에 맞서 역내 AI 기초체력을 강화하려는 의도도 깔렸기 때문이다. 미국이 현재 글로벌 AI 시장을 주도하는 가운데 그 영역이 조금씩 유럽으로 확장되자 이에 위협을 느낀 EU가 AI법이라는 방어막으로 최후의 방어선을 설정했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AI법이라는 방어선으로 막강한 미국의 AI 경쟁력이 유럽에 침투하는 속도를 늦추고, 그 틈을 노려 자체 기초체력을 키우는 전략이다.

AI법 제정 막판까지 지나치게 강한 규제에 반대하던 프랑스가 '맞춤형 고위험 AI에 대한 행정적 절차를 줄인다'는 조건으로 찬성으로 돌아선 지점이 중요한 이유다. AI법은 그 자체로 규제면서도 막강한 미국 AI 공습에 대비한 시간벌기용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유럽의회. 사진=갈무리
유럽의회. 사진=갈무리

잊혀질 권리, 그리고 과징금 폭탄과 AI 압박
유럽사법재판소(ECJ)는 2014년 사상 최초로 '잊혀질 권리'를 공식 인정한 바 있다. 프랑스 정보자유국가위원회(CNIL)도 2015년 잊혀질 권리가 유럽은 물론 전 세계 모든 웹사이트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판결하는 한편 이와 관련해 구글에 2016년 10만유로라는 벌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이 논의는 추후 유럽연합의 GDPR(General Data Protection Regulation/개인정보보호 규정) 제정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잊혀질 권리는 누군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권리며, 또 논쟁의 여지가 많은 프레임이다. 개인이나 기업 입장에서 자기의 숨기고 싶은 치부나 잊고싶은 과거를 누군가 온라인에서 지속적으로 '구경'한다면 그 자체가 지옥이기 때문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 '영원한 고통의 나선'이다.

그러나 잊혀질 권리는 또한 양면의 동전과 같다. 부작용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데이터가 잊혀지지 않았을 경우에 거둘 수 있는 명확한 장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잊혀질 권리가 포괄적으로 받아들여지면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고 강압적인 권력의 온라인 전이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 

이와 관련한 논란이 지금도 여전한 가운데, 유럽이 '잊혀질 권리'에 주목한 핵심 배경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잊혀질 권리는 ICT 인터넷 세상의 패러다임을 규정하는 중요한 규범이지만, 그 이면에는 힘과 힘의 대결 방정식이 선명하기 때문이다.

무슨 뜻일까. 시간을 돌려 2013년으로 가보자. 9.11 테러 이후 미국 정부는 국가안보국(NSA)를 중심으로 프리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온라인에서 확보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취득해 이를 체제의 안전을 위해 사용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문제는 이러한 프로젝트가 사회의 안녕을 넘어, 민간인을 상대로 한 무차별적 정보 습득에 나서는 순간에 벌어진다. 체제의 안정을 위해 필요한 정보의 수준은 어디까지인가. 민주주의 가치에 위배되는 사생활 침해 여부는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는가. 가치판단이 필요한 순간이다. 쉽게 말해 "용납될 수 있는 선을 넘었다"와 "용납될 수 있는 선을 넘지 않았다"

CIA에 근무하다 NSA로 이직한 에드워드 스노든의 선택은 전자였다. 그는 2013년 영국 가디언과의 인터뷰를 통해 미국의 통화감찰과 프리즘 프로젝트 등 다양한 기밀문서를 폭로하며 순식간에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세빗에 참석한 에드워드 스노든. 사진=갈무리
세빗에 참석한 에드워드 스노든. 사진=갈무리

미국 정부가 테러 방지라는 미명으로 일반인의 통화 및 이메일 목록을 빠짐없이 수집했고, 이를 모두 보관해 관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가 폭로한 내용에는 미국이 당시 우방국인 메르겔 독일 총리의 휴대폰을 해킹했다는 정보도 포함됐다.

한편 비슷한 선택을 한 인물로는 위키리스크의 줄리언 어산지도 있다. 1987년 동료들과 함께 해킹그룹을 만들어 활동한 전력이 있던 그는 2006년 아이슬란드에서 폭로 전문 사이트인 위키리스크를 설립, 세계의 핵심 자료들을 대거 폭로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도망자로 전락했지만 믿는 구석은 있었다. 자유민주주의 서방세계에서 살았던 그들은 빅브라더에게 통렬한 한방을 날렸을 뿐, 자신들의 이상을 세상이 알아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 즉시 영국으로 가 장기전을 대비한 이유다.

엄청난 착각이었다. 한때 대영제국의 패러다임을 통해 세계를 운용해 본 경험이 있는 영국은 21세기 정보를 쥐고 있는 미국이 가장 훌륭한 파트너라는 점을 강렬하게 자각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영국에 기댔던 줄리언 어산지와 에드워드 스노든은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줄리언 어산지는 영국에 들어갔다 부랴부랴 에콰도르 대사관으로 피신했으며, 에드워드 스노든을 취재했던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당국으로부터 보복성 조사를 받았다.

지금도 두 사람은 참람된 반역자이자 비참한 도망자가 되어 세상을 전전하고 있다. 독일 정부는 메르겔 총리의 도청에 대해 제대로 된 항의조차 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이어진 대서양 동맹. 비록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며 크게 삐걱이기는 했으나 미국과 유럽은 정보공조에 있어 끈끈한 연결고리를 자랑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큰 그림은 정부와 정부의 일에서만 국한된다. 정부와 기업, 정확히는 EU와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의 관계에서는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진다. 당장 EU는 미국 정부와의 정보 공조에 있어 모든 것을 '감수'할 용의가 있으나, 미국 실리콘밸리가 역내에서 영역을 넓히며 자국민의 정보를 가져가는 것에는 발작적인 반응을 보인다. 특히 웹에 이어 모바일 시대로 들어서며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EU 역내로 들어와 데이터를 확보하고 ICT 신사업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은 좌시할 수 없다.

이후로는 전쟁이 벌어졌다. 시장 독과점 등을 매개로 EU에서 실리콘밸리 기업에 대한 천문학적인 과징금 폭탄이 떨어졌고, 최대한 EU의 입맛에 자사의 정책을 바꿔가던 애플도 최근 기록적인 과징금을 받았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의 유럽 내 절세에 대한 대규모 압박이 시작됐고 조세회피 논란도 커졌다. '잊혀질 권리'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다. EU는 잊혀질 권리를 매개로 역내로 들어온 실리콘밸리 기업들을 강하게 압박하고, 밀어냈기 때문이다. 

유럽은 반격을 시도하기도 했다. 한때 프랑스가 독일과 협력해 `나는 찾는다`라는 의미의 라틴어인 콰에로(Quaero) 프로젝트를 가동하며 유럽 토종 포털 사이트 구축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자크 시라크 당시 프랑스 대통령은 "구글, 야후 등 미국 업체들이 장악하고 있는 검색엔진 시장에 프랑스와 독일이 대항해야 한다"고 말해 유럽의 자체 검색엔진 개발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이는 구글 제국의 포격에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유럽의 ICT 자력갱생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2014년 10월, 독일은 물론 유럽 최고의 언론사인 악셀 스프링어가 구글의 독과점 지위에 반발해 자사의 콘텐츠를 철수시켰으나 급격한 트래픽 하락에 결국 구글에 복귀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당시 악셀 스프링어는 “홈페이지 트래픽이 폭락한 것은 구글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행정당국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선다 피차이 구글 CEO. 사진=연합뉴스
선다 피차이 구글 CEO. 사진=연합뉴스

AI법, 제2의 잊혀질 권리 전쟁
EU는 AI법을 통해 제2의 잊혀질 권리 전쟁을 시작했다. ICT 모바일 시대를 맞아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들에게 안방을 내어준 상태에서 미국 정부가 아닌 민간 기업에게 역내 시장을 내어주는 한편 데이터까지 빼앗긴 상태에서, 생성형 AI라는 새로운 시대에서는 만반의 준비를 한 후 일종의 철옹성을 쌓겠다는 로드맵이다.

미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비슷한 AI법과 EU의 전략이 다른 부분에도 집중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10월 바이든 행정부 주도로 AI를 위한 행정명령이 발표된 후 늦어도 5월 나올 미국 AI법은 규제보다 가이드 라인 설정에 방점이 찍힐 전망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식적으로 확인된 내용은 없으나, 미국의 AI법은 강력한 규제가 아닌 규제 권고가 될 가능성이 높다. 구체적으로 AI 기술을 올바르게 활용하기 위해 가이드 라인을 설정한 후 산업을 활성화시키는 쪽에 주목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일각에서는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가 빅테크 압박 수위를 올리고 있다며, 미국 규제기관도 AI 등의 그림자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칼춤'을 출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실제로 미 FTC는 구글 반독점 소송 정국에서 존재감을 뽐내는 한편 최근 마이크로소프트(MS), 아마존, 알파벳, 오픈AI, 앤트로픽을 대상으로 반독점 조사에 나서기도 했다. 리나 칸 미 FTC 위원장은 "AI도 예외가 없다"며 "혁신을 위법의 은폐 수단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라고 주장했다.

다만 이러한 압박을 EU의 AI법과 비슷하게 받아들이면 곤란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EU는 강력한 미국 AI 존재감에 대항하기 위해 판을 짰지만, 미국은 5월 AI법은 물론 미 FTC의 방침 자체도 '건전한 AI 산업 활성화'에 방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은 자신들이 우세한 AI를 '건전하게 키우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EU는 미국이 강세를 보이는 AI 시장에서 'ICT 모바일 시대의 아픔이 재연되는 것을 막는 쪽'으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EU AI법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