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년 전 대만의 젊은이들은 높은 실업률과 낮은 경제 성장에 절망하며 자국을 '귀신섬(鬼島)'이라 불렀다.
대만의 미래는 곧 귀신만 살 정도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만 남을 것이라는 자조다.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헬조선 밈'과 비슷하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지난 10월 국제통화기금 IMF가 발표한 세계경제전망(World Economic Outlook)에 따르면 대만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3만3590달러의 한국과 3만4360달러의 일본을 누르고 3만5510달러를 기록할 것이라 예상했다. 기존 예상치인 3만6000달러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동아시아 1등의 자리를 차지하는 괴력이다.
비록 환율 등의 외부적 요인이 있었다고 하지만 대만의 경제 성장은 '경이롭다'는 표현이 부족할 지경이다.

대만의 경제 DNA, 제조업
일본제국이 패망하고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끝나던 1950년대.
마오쩌둥 공산당에 밀린 장제스의 국민당은 대만으로 넘어와 경제개발에 속도를 내며 강도높은 고금리 정책을 폈다. 국민당이 중국 본토를 지배할 당시 무차별적으로 통화를 발행해 초인플레이션을 일으킨 트라우마가 컸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고금리 정책은 금리가 올라 기업 입장에서는 투자금을 확보하기 어려워진다. 다만 국민들 입장에서는 은행의 저축을 안정적인 재산증식 수단으로 여길 수 있어 매력적이다.
대만이 몇몇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 체제를 갖추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경제 인프라 설립 초반 대기업의 무차별 투자가 거의 벌어지지 않았고 저축을 기점으로 소득 분배가 활발해지자 일종의 낙수효과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변화는 1960년대 들어 미국의 원조가 크게 줄어들며 시작됐다.
안정적인 달러 지원 창구가 흔들리자 대만 경제는 승부수를 던져야 했다. 그 연장선에서 특별한 자원도 없는 대만이 살아남으려면 결국 제조업 중심 수출 주도 경제 모델을 가동해야 한다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여기에 고환율 정책도 강하게 추진하는 일대 전략적 변화를 꾀한다.
대만의 승부수는 먹혀 들어갔다. 연평균 제조업 성장률 20%를 자랑하던 고도 성장기의 열차에 올라타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도 있었다. 고환율과 고금리 정책이 충돌하는 딜레마와 더불어 1970년대 미국과 중국이 가까워지는 데땅트의 시대가 개막, 대만을 둘러싼 지정학적 위기가 고조되며 대만 기업의 가치도 폭락하기 시작했다. 선진국들이 본격적인 보호 무역주의를 가동하던 시기도 이 즈음이다.
대만은 다시 변신을 시도했다. 선진국 기업들이 높은 인건비 문제를 해결하려 제조 및 조립 공장을 동남아시아로 옮기자 이에 착안해 중간재 부품 제조 및 수출에 집중했다. 핵심부품을 수입해 조립한 후 중간재로 만들어 수출하는 대만 특유의 조립가공산업 경제 모델의 등장이다. 조립가공산업 경제 모델은 중소기업 중심으로 구축된 대만의 현 상황에서 가장 승률이 높은 전략으로 볼 수 있다. 높은 성과를 냈다.
최근에는 이야기가 또 달라졌다. 아무래도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 모델은 브랜딩 및 기타 규모의 경제가 불가능하고, 대만이 집중하고 있는 중간재 수출 시장 등 제조업 분야가 침체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중간재 중심 제조업은 코로나 팬데믹 기간 불거진 글로벌 공급망 리스크 영향권에도 속해 있다.
대만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조금씩, 귀신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들러리가 되지 않겠다"
불과 몇 년전까지만 해도 대만의 경제는 위험했다. 귀신섬. 이 표현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경제는 활력이 떨어졌고 젊은이들은 절망했다.
이 정도면 '변신의 귀재'로 볼 수 있는 대만은 또 한 번의 피보팅(사업 아이템을 바꾸는, 주로 스타트업 업계에서 쓰는 단어)을 시도한다. 중간재 수출의 특성상 특정 영역와 기업에 대한 종속은 피할 수 없겠으나, 그 자체를 강력한 기술력으로 덧대어 대체불가로 나아가는 '홀로서기'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의 최강자 TSMC가 대표적이다. 차세대 2나노 및 1나노 반도체 미세공정 생산라인 투자에도 속도를 내고있는 TSMC는 최근 삼성전자 파운드리가 오랫동안 맡던 퀄컴 스냅드래곤 시리즈의 최신 모델을 제작하기로 결정되는 등 강력한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다.

파운드리는 핵심 부품을 통해 반도체를 제작해 수출하는 그림이 일반적인, 말 그대로 중간재 수출 모델에 가깝다. 그러나 여기서 TSMC는 대체불가능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미세공정 등의 측면서 시장 최강자의 입지를 놓치지 않고 있다. 당연히 조립 제조사로서 중간재 수출 모델에 가깝지만 역시 대체불가능한 인프라를 자랑하는 폭스콘도 TSMC와 비슷한 로드맵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더이상 들러리가 되지 않겠다"는 TSMC와 폭스콘의 등장은 대만 영상사업의 뼈아픈 실책을 반면교사로 삼았기 때문이다.
대만의 드라마는 한 때 아시아를 대표했다. 1990년대, 2000년대 <판관 포청천>과 <꽃보다 남자> 등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콘텐츠 강국 대만의 입지를 탄탄하게 만들었으며, 각국에서 다수의 리메이크 제작을 끌어내며 승승장구했다.
2010년 이후로 상황은 달라졌다. 대만의 영상제작 시스템은 파탄났으며 주요 방송사의 시청률은 바닥에서 기어갔다. 대만의 안방극장은 외산 드라마가 채웠고, 소위 프라임 시청시간인 오후 9시에 그나마 시청률이 나온다는 이유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방영하기도 했다.

대만의 영상산업이 파탄 난 이유는 무엇일까? 1990년대 후반 100개에 달하는 케이블 방송사를 무차별 허용하며 치킨게임이 벌어졌고, 그 틈을 노려 중국의 자본력이 침투해 대만의 영상사업 시스템 노하우를 통째로 확보했기 때문이다. 우수한 대만 영상제작 인재들이 중국으로 넘어갔으며 대만 콘텐츠 사업은 자생력을 상실했다.
대만 영상산업 몰락의 전조는 무분별한 방송사 설립에 따른 치킨게임에서 비롯됐으나, 결정타는 중국 자본의 잠식이다. 처음 중국은 대만의 영상사업 제작 시스템을 지원한다는 개념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 결과 치킨게임에 지친 대만 인재들을 유혹할 수 있었다. 다만 시간이 흐르며 중국 자본은 서서히 본색을 드러냈다. 자본력을 통해 대만의 노하우를 흡수한 후 순식간에 ‘갑’이 됐기 때문이다.
당장 어려움에 빠진 대만 영상사업의 주역들을 끌어들여 마음껏 노하우를 익힌 후 자기들의 능력을 끌어올리자 토사구팽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결국 대만 영상사업은 중국 영상사업의 하청기지로 전락했으며, 중국 영상사업은 세계를 향해 나아갈 채비를 마칠 수 있었다. 대만 정부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자국 영상사업에 직접 투자를 단행하는 등 반격에 나섰으나 아직 명확한 성과는 없다.
자생력이 없는 산업, 여기에 외산 자본 유혹에 따른 마지노선의 붕괴는 곧 재앙이라는 것을, 대만은 자국 영상 산업의 붕괴라는 비싼 수업료를 통해 배웠다. TSMC와 폭스콘의 최근 날카로운 행보가 의미있는 이유며, 이를 통해 성과를 낸 대만 정부의 의지가 돋보인다는 평가다.

미중 패권전쟁, 대만의 기회
미중 패권전쟁도 대만에게 위기를 불러오면서도, 기회가 되어주고 있다는 평가다.
트럼프 행정부 시대가 열리며 미중 패권전쟁이 벌어졌다. 두 슈퍼파워는 치열한 난타전을 벌였으며 지금도 서로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있다.
대만과 대만 경제에게는 위기와 기회가 공존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남중국해 분쟁 및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 등 몇몇 변수에 이해득실이 명확하게 갈렸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대만은 폭스콘 및 TSMC로 대표되는 대기업 중심 전략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중간재 수출국으로 활동하며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성장했으나, 이제는 폭스콘과 TSMC 등 대기업을 일종의 전략 카드로 삼는 새로운 전략도 가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팬데믹 기간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 1위 TSMC를 협상 카드로 삼아 코로나19 백신을 확보했던 것이 단적인 사례다. 나아가 반도체 전쟁으로 불리는 미중 패권전쟁에서 TSMC를 통해 미국 및 일본과 연대, 실익을 챙기고 있는 것도 의미심장하다는 평가다. 대기업 카드를 통해 미국과의 연대를 강화해 실리를 극대화시키는 전략이다.
폭스콘이 최근 중국 칭화유니에 대한 투자를 철회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핵심을 읽을 수 있다. 17일(현지시간) 로이터 등 외신에 따르면 폭스콘은 지난 7월 사모펀드 출자 방식으로 칭화유니에 53억8000만 위안을 투자했으나 최근 이를 모두 매각했다고 보도했다.
칭화유니는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의 모교인 칭화대가 설립한 반도체 회사며 중국 반도체 굴기의 핵심 중 하나다. 이런 가운데 애플의 주요 제조 파트너이자 대만 기업인 폭스콘이 칭화유니에 투자하는 것은 일종의 반국가 행위라는 비판이 컸다. 실제로 폭스콘은 대만 당국의 승인을 얻지 않고 칭화유니에 투자했으며 대만 정부가 2500만 대만달러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폭스콘은 대만 기업이지만 친중 성향이 강한 궈타이밍이 설립했다. 그는 중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미중 패권전쟁의 흐름속에서 미국의 손을 잡은 대만 당국의 분노에 결국 폭스콘이 물러난 셈이다. 그 연장선에서 대만 정부는 중국에 맞서는 자국의 인프라를 배팅해 미국으로부터 경제는 물론 외교 및 군사적 지원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실리콘 방패의 힘은?
대만 경제 최근 부흥의 원인을 오로지 TSMC 및 폭스콘에서만 찾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여야의 협치, 민관의 협동을 바탕으로 한 대만 특유의 뚝심과 더불어 글로벌 기업 투자 유치에 전사적인 대만 정부의 전략적 선택도 경제 부흥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대만 제조업의 침체기가 시작됐으나 이를 뒤집기 위한 다양한 패러다음을 제시하고, 그 연장선에서 유연한 경제 정책을 추진한 것도 대만 경제 부흥의 일등공신 중 하나다.
그 다양한 퍼즐의 한 조각 중 유독 큰 것이 바로 TSMC 및 폭스콘으로 대표되는 대기업 카드, 나아가 미중 패권전쟁의 순기능이다. 대만 경제가 일본과 한국을 압도하게 된 배경인 셈이다.
물론 리스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미중 패권전쟁에서 대만의 존재감이 커지고 있으나, 최근 미국 정부가 주요 반도체 시설을 자국에 유치하려는 장면은 대만 입장에서 위험하다.
대만이 미국에게 지정학적, 경제학적 가치를 계속 유지하려면 반도체 기술력이 있어야 하며 특히 반도체 공장이 대만에 있어야 한다.
쉽게 말해 중국의 대만 침공이 벌어질 때 대만 TSMC 공장에 문제가 발생, 미국 경제가 대만 반도체를 제대로 수급받지 못해 휘청일 것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이 자국에 반도체 공장을 지속으로 유치할 경우 이러한 전제는 무너진다. 대만의 고민이 깊어지는 순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