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유령이”

저 유명한 공산당 선언의 첫 문장이다. 이 문장은 요즘 우리 금융권의 분위기를 표현하는 데에도 제격일 듯하다. 유럽은 ‘금융권’으로, 공산주의는 ‘관치금융’으로 치환하면 된다.

국내 금융권에 관치금융이라는 유령이 등장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부쩍 그 그림자가 뚜렷해진 느낌이다. 기자의 눈에 윤석열 정부의 관치금융은 3가지 형태로 구별된다. 첫 번째는 취약층 지원을 위한 관치금융이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을 위한 채무조정 프로그램(새출발기금)이 대표적이다. 청년층에 대한 채무조정과 청년도약계좌 출시도 이에 해당된다.

두 번째 형태는 시장안정 목적의 관치금융이다. 레고랜드 사태로 불거진 채권시장과 PF시장의 불안을 진정시키기 위해 취해진 ‘50조원+α 유동성 지원조치’가 그 한 예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5대 금융지주 회장을 불러 모아 95조원 규모의 유동성 및 자금지원 약속을 받아낸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가장 최근에 부상한 세 번째 형태의 관치금융은 ‘인사 개입’이다. 금융권 CEO의 인사에 금융당국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 시발점은 김지완 BNK금융지주 회장의 갑작스런 퇴진이었다.

김 전 회장의 임기는 내년 3월말까지였다. 그런데 국정감사에서 자녀에 대한 특혜 시비가 불거지고 이로 인해 금융감독원의 조사까지 받게 되자 지난 7일 서둘러 사임했다. 인사개입 의혹이 제기된 것은 후임자 선임 문제를 두고서다. BNK금융은 회사규정상 내부인사 중에서만 회장을 선임토록 돼 있는데 이사회가 갑자기 규정을 개정해 외부 인사도 회장에 선임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의 거취를 두고도 관치금융 시비가 일고 있다. 손 회장은 라임펀드 문제로 지난 9일 문책경고를 받았다. 이에 금융권에선 손 회장이 연임을 위해 또 한 번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을 점쳤다. 그러자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나서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며 연임 포기를 압박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이 원장은 한발 더 나아가 지난 14일에는 8개 금융지주 이사회 의장들을 만나 “최고경영자 선임이 합리적인 경영승계 절차에 따라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다. ‘지당하신 말씀’이지만 때가 때인지라 듣는 입장에선 부담을 느낄 수도 있는 발언이다.

2004년의 신용카드 사태 때 김석동 당시 재경부 금융정책국장은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이 말에 100%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관치의 필요가 있음은 공감한다. 금융업은 면허업종이기 때문이다. 면허 덕분에 돈을 버는 사업인 만큼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는 관이 개입할 권한이 인정돼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취약층 지원이나 시장안정 목적의 관치금융은 일종의 ‘필요악’일 수 있다.

그러나 인사개입 형태의 관치금융은 얘기가 다르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은 금융권에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객관적이고 명백한 사유가 없는 인사개입은 해당 금융사뿐 아니라 금융권 전체에 독이 될 수 있다. 연말 금융권에 파다하게 퍼지고 있는 관의 인사개입 풍문이 그저 낭설이기 만을 바라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