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사가 유망한 스타트업의 사업계획서를 받아 검토하던 관행이 깨지고 있다. 자본을 가진 쪽에서 먼저 구체적인 사업 아이템과 시장을 지정해 "이런 사업을 할 창업가를 찾는다"고 공고를 내는 역발상 방식이 국내에 상륙했다.
초기 기업 전문 투자사 더벤처스는 국내 벤처캐피탈(VC) 업계 최초로 '오픈형 투자요청서(RFS)'를 공식 도입한다고 20일 밝혔다.
이번 결정은 불확실성이 커진 벤처 투자 시장에서 효율성을 극대화하려는 생존 전략이자 자신감의 표현이다. 더벤처스는 지난 10월 결성한 100억원 규모의 글로벌 K소비재 펀드를 운용하며 투자 집중 분야를 시장에 투명하게 공개했다. 막연히 좋은 팀을 기다리는 수동적 태도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타깃 시장을 정의하고 이에 부합하는 플레이어를 직접 발굴하겠다는 의지다.
더벤처스가 지목한 4대 공략 분야는 매우 구체적이고 날카롭다. 이들은 단순한 유행을 좇지 않고 데이터와 규제 변화 그리고 인구 통계학적 특성을 근거로 '테크 기반 소비재' '무슬림 여성 타깃 K브랜드' 'K두피' 'IRL(현실) 기반 오프라인 경험'을 꼽았다.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무슬림 시장과 두피 케어 시장이다. 황성현 심사역이 담당하는 무슬림 여성 타깃 브랜드는 2026년 10월로 예정된 인도네시아의 할랄 인증 의무화 규제를 기회로 포착했다. 히잡 착용으로 인한 두피와 피부 관리 수요가 늘어나고 있고 운동을 즐기는 무슬림 여성 인구가 증가하는 현상에 주목했다. 이는 모디스트 패션과 특수 목적용 메이크업 시장에서 한국 브랜드가 침투할 틈새가 확실하다는 분석에 기반한다.
이은찬 심사역이 주도하는 K두피 분야 역시 글로벌 트렌드를 정조준했다. 전 세계 성인의 절반 이상이 비듬과 탈모로 고민하지만 관련 제품군은 여전히 단순 세정 기능에 머물러 있다. 더벤처스는 한국의 스킨케어 루틴이 세계적인 표준이 된 것처럼 두피 관리 역시 세분화된 루틴과 고기능성 제품으로 진화할 시점이 도래했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투자 방식의 변화는 실리콘밸리의 와이콤비네이터(YC) 등 글로벌 액셀러레이터들이 사용하는 방식을 한국 실정에 맞게 이식한 것이다. 창업자 입장에서는 투자사의 의중을 떠보느라 허비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고 투자사는 펀드의 성격에 정확히 부합하는 딜(Deal)을 빠르게 확보할 수 있다. 2024년 K뷰티 수출액이 102억달러를 기록하고 라이프스타일 분야 투자가 1853억원으로 급증하는 등 시장이 뜨거울수록 옥석 가리기의 기준은 더욱 명확해야 한다는 계산이 깔려있다.

기술적 접근도 강조됐다. 이성은 심사역은 감에 의존하는 소비재 창업이 아닌 개발자와 PM 출신이 이끄는 데이터 기반의 브랜드에 높은 점수를 주겠다고 공언했다. 조여준 파트너는 방탈출 카페처럼 한국이 강점을 가진 오프라인 콘텐츠를 브랜드와 관광 상품으로 연결하는 팀을 찾는다.
김철우 더벤처스 대표는 "창업자가 투자사의 관심 분야를 미리 파악하기 어려운 기존 방식과 달리 이번 RFS는 더벤처스가 실제로 집중하고 있는 투자 영역을 먼저 공개한 것에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기술력과 브랜드 철학을 갖춘 팀이라면 분야와 시기를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만나고 싶다"며 "글로벌 12개국 네트워크와 소비재 투자 경험을 바탕으로 창업팀의 글로벌 성장을 돕겠다"고 밝혔다.
더벤처스는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상시적으로 제안을 접수하며 창업자들이 예측 가능한 환경에서 자금 조달을 준비할 수 있도록 정보 비대칭을 해소해 나갈 계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