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경기도 평택항에 철강 제품이 쌓여 있다. 사진=연합뉴스
8월 경기도 평택항에 철강 제품이 쌓여 있다. 사진=연합뉴스

유럽연합(EU)이 미국에 이어 철강 관세장벽을 세운다. 수입산 철강에 대한 무관세 혜택(쿼터)을 대폭 줄이는 동시에 관세는 미국과 동일한 50%로 인상한다. 전체 철강 수출액 중 유럽 시장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한국 철강업계에 막대한 타격이 예상된다.

철강 고래 싸움에 韓 등 터진다 

스테판 세주르네 EU 번영·산업전략 수석 부집행위원장은 7일(현지시각) SNS에 “유럽의 철강 공장과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수입산 철강의 (무관세) 할당량을 절반으로 줄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현행 25% 수준인 관세를 50%로 인상한다”고 말했다.

이번 관세 인상안 발표는 앞서 미국이 철강 관세를 기존 25%에서 50%로 인상함에 따른 대응 조치로 풀이된다. EU는 미국이 보호무역정책을 펼 때마다 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맞춤형 대응책을 내놓았다.

지난 2018년 트럼프 1기 행정부가 철강 관세와 더불어 쿼터제(일정 수입량 무관세 혜택)를 실시하자, EU 역시 국가별 쿼터제와 초과 물량 대상 25% 관세를 부과했다. 2025년에도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들어서며 기존 쿼터제를 완전 폐지함과 동시에 관세까지 인상하자, EU도 또다시 쿼터를 축소하고 관세를 동일하게 인상하는 그림이다. 동시에 EU는 그간 역내에 과잉 공급됐던 중국산 철강 문제 역시 이번 기회에 해결하고자 한다.

강대국들의 철강 보호무역 치킨게임에 한국 철강업계도 휩쓸리는 상황이다. EU는 한국의 최대 철강 수출시장이며, 미국은 단일국가 기준 1위 수출시장이기 때문이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대(對)EU 철강 수출액은 44억8000만달러(약 6조2836억원)로, 미국(43억4700만달러)보다 소폭 더 많았다. 한국 철강업계로서는 가장 큰 시장 두 곳의 관세장벽이 동시에 높아지면서 이중고에 시달리게 된 셈이다.

그린스틸 강조하는 EU, 관세까지 ‘산 넘어 산’

EU의 조치는 미국처럼 쿼터를 전면 폐지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소수 물량(기존의 절반 수준)에 한해선 무관세 혜택을 받을 수는 있다. 문제는 현지 철강업체들과의 경쟁에서 발생한다. EU는 미국보다 훨씬 엄격하게 ‘친환경 철강(그린스틸)’ 장려 정책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철강생산자협회(유로퍼)에 따르면, 그린스틸은 원재료인 그린수소 조달 비용과 생산 기술력 등의 문제로 기존 철강보다 높은 생산비용을 형성한다. 톤당 300유로(약 49만원)가량 더 비싸다. 비싼 가격으로 인해 기존에는 외면받았는데, EU가 정부 차원에서 역내 그린스틸 사용을 장려하는 정책을 펼침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현재 EU에서 추진 중인 ‘청정 산업 협약’이 대표적이다. 그린스틸 공공조달과 의무 구매 할당 등이 골자다. 기존 그린스틸 사용 기업 대상 보조금 지급 등 간접적으로 그린스틸 사용을 장려하던 정책보다 훨씬 급진적이다. 현지 산업체에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EU의 장기적 철강 탄소저감 의지가 확고함을 시사한다.

동시에 EU는 탄소 저감을 신경 쓰지 않아 저렴한 외국산 철강이 역내 그린스틸의 가격경쟁력을 해치지 못하게 하려고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도입했다. 수입 제품에 대해 EU 내 생산 제품과 동일한 수준의 탄소 가격 부담을 부과하는 정책이다. EU 역외에서 생산된 저탄소 제품은 혜택을 받고, 고탄소 제품에는 실질적인 가격 부담이 추가된다. 지난 2023년 10월 도입된 이후 올해 10월부터 전환기간에 돌입해, 내년 1월 1일부터 정식 시행 예정이다.

EU의 이번 관세 인상 조치와 더불어, 그린스틸 장려 정책이 본격화되면 한국 철강의 분위기는 더욱 어두워질 전망이다. CBAM 적용 대상 6개 품목의 대 EU 수출액 중 철강이 차지하는 비율이 90% 이상이기 때문이다.

포스코 등 국내 철강업체들은 수소환원제철 등 그린스틸 공법을 도입하면서 탈탄소 전환을 서두르고 있지만, 정부 차원에서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면서까지 그린스틸 보편화를 장려하는 EU의 철강기업들과 가격경쟁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따른다. 대한상공회의소는 CBAM이 본격 시행되면 국내 철강업계가 부담해야 할 비용이 10년간 최소 3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포스코가 공개한 ‘하이렉스(HyREX)’ 기술을 활용한 철강 생산 단지 조감도. 사진=박상준 이코노믹리뷰 기자
포스코가 공개한 ‘하이렉스(HyREX)’ 기술을 활용한 철강 생산 단지 조감도. 사진=박상준 이코노믹리뷰 기자

에너지 비용 우위는 옛말… 전기요금 완화 요구 강해져

물론 EU의 철강 보호정책이 시행되더라도, EU 기업들의 그린스틸 생산비용은 여전히 비싸다. 에너지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급격한 탈탄소 정책으로 인해 신재생 에너지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자연스레 가격경쟁력은 훼손됐다. 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지난해 내놓은 ‘유럽 경쟁력의 미래’ 보고서에서 “높은 에너지 비용과 과도한 규제가 유럽 경기 침체의 원인”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다만 국내 철강업계 역시 에너지 비용 측면에서 더 이상 EU보다 우위를 점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근 3년 사이 산업용 전기요금이 대폭 올랐기 때문이다. 지난해 산업용 전기요금은 1킬로와트시(㎾h)당 185.5원 수준으로, 기존 대비 9.7% 인상됐다. 2022년 105.5원과 비교하면 75.8% 급증한 규모다. 업황이 좋지 않은 데다, 주요 시장의 보호무역이 겹치는 와중에 전기요금 인상까지 업계의 어깨를 무겁게 만든다.

업계 관계자는 “산업용 전기요금이 1㎾h당 1원 오르면 업체의 연간 원가 부담은 100억~200억원 늘어난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는 동국제강과 세아그룹 등 전기로를 주력으로 운영하는 업체일수록 체감 부담이 심해진다. 실제로 동국제강의 경우 지난 7월 22일부터 8월 15일까지 인천공장 내 압연 및 제강공장 생산을 중단하면서 ‘하반기 산업용 전기료 할증과 원료 가격 상승 등 원가 부담 가중’을 중단 이유로 꼽은 바 있다.

한국 정부가 조속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앞서 국회에서는 여야가 합심해 철강 지원법인 ‘K스틸법’을 발의했지만, 정작 정쟁에 밀려 2개월 동안 상임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빠른 입법과 더불어, 그린스틸 핵심 원재료인 그린수소 확보 방안 마련 등이 필요한 시점이다.

10월 중 발표되는 철강산업 경쟁력 강화 TF 운영 결과를 지켜봐야 한다. 철강산업을 미래 그린스틸 시대에 맞춰 수소 기반 융합 산업으로 재정의하고, 국가 전략산업으로 지정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산업용 전기요금 인하 여부도 화두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최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산업위기지역 등에 한해 전기요금 인하를 고민하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