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터 통신 등 주요 외신은 2일(현지시간) 퀄컴의 차세대 주력 칩인 모바일용 '스냅드래곤 8 엘리트 5세대'와 PC용 '스냅드래곤 X2 엘리트'가 Arm의 최신 9세대 아키텍처(v9)를 기반으로 설계되었다고 보도했다.
애플과의 성능 격차를 좁히고 미디어텍의 거센 추격을 뿌리치기 위한 모바일 시장의 생존 전략이자 수십 년간 인텔과 AMD가 지배해 온 PC 시장에 대한 공격의 신호탄이다. 2021년 14억달러를 들여 인수한 스타트업 '누비아(Nuvia)'의 보물과 Arm과의 법정 다툼에서 획득한 '혁신의 권리'와도 일맥상통한다.

AI 시대를 위한 설계도 Armv9
2021년 3월 발표된 Armv9은 이전 v8의 점진적 개선이 아닌 향후 10년의 컴퓨팅 환경을 지배할 인공지능(AI)과 보안이라는 두 가지 핵심 키워드에 맞춰 근본부터 재설계됐다.
Armv9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기밀 컴퓨팅 아키텍처(Confidential Compute Architecture CCA)'다. 기존의 보안 모델이 운영체제(OS)나 하이퍼바이저를 신뢰해야만 했던 구조적 한계를 가졌다면 CCA는 '렐름(Realms)'이라 불리는 하드웨어 수준의 완전 격리된 실행 환경을 제공한다는 설명이다.
이곳에서 처리되는 데이터는 OS조차 접근할 수 없어 사실상 '해킹 불가' 영역을 만든다. 개인의 민감 정보는 물론 기업의 핵심 데이터와 클라우드 컴퓨팅 환경에서 '제로 트러스트(Zero Trust)' 보안을 구현하는 핵심 기술로 볼 수 있다.
한편 Armv8의 벡터 처리 엔진 'NEON'이 모바일 시대의 멀티미디어 처리에 최적화되었다면 Armv9의 '확장 가능한 벡터 확장 2(Scalable Vector Extension 2 SVE2)'는 AI 시대를 위한 심장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SVE2의 핵심은 '벡터 길이 불가지론'이라는 개념으로 개발자가 한 번 코드를 작성하면 128비트부터 최대 2048비트까지 다양한 하드웨어에서 자동으로 성능이 확장된다.
여기에 신경망 연산의 핵심인 행렬 곱셈을 가속하기 위해 특별히 설계된 '확장 가능한 행렬 확장(Scalable Matrix Extension SME)'이 추가되면서 챗봇이나 이미지 생성 같은 복잡한 온디바이스 AI 작업을 처리하는 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그런 이유로 퀄컴이 Armv9을 채택했다는 것은 단순히 CPU 성능을 높이는 것을 넘어 자사의 모든 칩에 세계 최고 수준의 AI 처리 능력과 철벽 보안을 내장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발현된 것으로 봐야 한다.

누비아 인수로 시작된 4년간의 드라마
퀄컴이 Armv9을 채택하기까지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한편의 법정 드라마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수년간 퀄컴은 Arm이 설계한 기성 코어텍스(Cortex) 코어를 라이선스해 사용했다. 다만 이 전략은 개발 시간과 비용을 줄여줬지만 애플의 막강한 맞춤형 실리콘에 성능에서 뒤처지고 동일한 코어를 쓰는 미디어텍과의 차별화에는 미치지 못했다. 특히 스냅드래곤 8 1세대 칩이 발열과 전력 효율 문제로 고전하며 위기감은 극에 달했다.
위기였다. 그리고 퀄컴은 2021년 1월 전 애플 칩 설계의 핵심 인력들이 설립한 스타트업 '누비아'를 14억달러(약 1조9000억원)에 인수하는 결단을 내리며 새로운 활로를 찾기 시작했다.
승산이 있는 게임이었다. 누비아는 당시 서버 시장을 겨냥한 압도적인 성능의 맞춤형 Arm 코어 '피닉스'를 개발하고 있었으며 퀄컴이 이를 인수할 경우 Arm의 설계도에 의존하는 시대를 끝내고 자체 설계 역량을 통해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은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퀄컴의 시도가 제왕 Arm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Arm은 2022년 8월 누비아가 보유했던 아키텍처 라이선스는 퀄컴에 인수되면서 소멸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개발된 모든 IP를 파기해야 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퀄컴의 맞춤형 코어 전략의 근간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찌르기다.
약 2년간의 치열한 법정 다툼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양사는 명운을 걸고 치열한 법정 드라마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물론 파국은 서로 경계했다. "막장으로 가는 것은 서로 원하지 않는 상태에서 벌어지는 신경질적이고 조심스러운 기묘한 전쟁"이었다.
결과는? 2025년 9월 미국 델라웨어 연방지방법원은 최종적으로 퀄컴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퀄컴이 보유한 광범위한 아키텍처 라이선스가 누비아의 기술을 활용해 자체 코어를 개발할 권리를 포함한다고 판결했다. 이는 퀄컴의 '완전한 승리'였으며 Arm의 라이선스 정책에 제동을 걸고 팹리스 기업들의 '혁신할 권리'를 인정한 역사적인 판결로 기록되었다.

아이러니한 동맹의 경제학
퀄컴이 ARM에 승리를 거두고 완벽한 '탈 ARM'이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 공격적으로 나왔다. 그러나 분위기가 이후로는 묘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법정에서의 승리가 역설적으로 퀄컴을 Arm의 최신 기술에 더욱 의존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일단 퀄컴은 소송에서 승리해 자체 고성능 코어 '오라이언'을 개발할 법적 자유를 얻었다. 이를 PC와 모바일은 물론 오토모티브 등에 뿌리며 확장 드라이브에도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시장의 경쟁자들은 ARM과 여전히 손을 잡고 있었다. 특히 애플은 이미 Armv9의 강력한 AI 및 보안 기능을 자사 칩에 통합하고 있었다. 퀄컴 입장에서는 구형 v8 아키텍처 기반의 오라이언 코어만으로는 진정한 승리를 거둘 수 없는 희한한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결국 오라이언 코어의 잠재력을 100% 끌어내고 시장의 리더가 되기 위해 퀄컴은 Arm의 최첨단 설계도인 Armv9 아키텍처를 채택하는 것이 필연적이었다. 법정에서의 처절한 싸움은 두 거인을 갈라서게 하는 대신 서로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기술적 운명 공동체임을 확인시켜 준 셈이다. 최근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스냅드래곤 서밋 2025에서 오라이언이 사실상 '실종'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말이 나온다.

포효하는 퀄컴
퀄컴은 올해 Armv9 아키텍처 위에서 '오라이언'이라는 이름의 괴물 CPU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이 강력한 무기를 스마트폰과 PC라는 두 개의 전선에 동시에 투입하며 전례 없는 양면 공격을 개시했다.
먼저 첫 번째 공격 목표는 인텔과 AMD가 수십 년간 지배해 온 윈도우 PC 시장이다. 그리고 올해 공개된 스냅드래곤 X2 엘리트는 모바일 칩에서 흔히 쓰이는 고성능-고효율 코어 혼합(big.LITTLE) 구조를 버리고 오직 12개의 고성능 오라이언 코어만으로 구성된 '야수'와 같은 구성을 자랑한다.
퀄컴은 스냅드래곤 X2 엘리트가 경쟁사 인텔 칩 대비 절반의 전력으로 동등 이상의 성능을 내며 멀티코어 성능에서는 애플의 최신 M3 칩마저 능가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단순히 웹서핑이나 문서 작업을 넘어 전문가 수준의 작업과 고사양 게임까지 가능한 진정한 의미의 고성능 'Windows on Arm' PC의 등장을 예고한다.
물론 하드웨어의 성공이 전부는 아니다. 과거 'Windows on Arm'의 발목을 잡았던 소프트웨어 호환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와도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 개선된 x86 앱 에뮬레이터 '프리즘(Prism)'과 Arm 네이티브 앱 생태계의 확장은 퀄컴의 도전에 날개를 달아줄 가장 중요한 변수다.
PC 시장이 새로운 영토라면 모바일 시장은 퀄컴이 반드시 지켜야 할 심장부다. 공개된 스냅드래곤 8 엘리트 5세대가 비상할 전망이다. Arm의 기성 코어텍스 설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애플처럼 온전한 자체 설계 코어로 승부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Armv9의 강력한 AI 성능에 시선이 집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