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야금 연주자 송영숙 선릉아트홀 예술감독 겸 대표로 활동 중이다. ER 이코노믹리뷰 연재 칼럼 ‘K컬처 풍류방 이야기’에서는 전통예술가의 시선으로 K컬처의 근원을 짚고, ‘멋’ 있게 놀기를 즐겼던 선조들의 풍류방 이야기를 전한다.
※ 가야금 연주자 송영숙 선릉아트홀 예술감독 겸 대표로 활동 중이다. ER 이코노믹리뷰 연재 칼럼 ‘K컬처 풍류방 이야기’에서는 전통예술가의 시선으로 K컬처의 근원을 짚고, ‘멋’ 있게 놀기를 즐겼던 선조들의 풍류방 이야기를 전한다.

지난 칼럼에서 ‘멋’있게 잘 놀기를 좋아한 선조들의 문화가 K컬처의 근원이고 멋이라 했다.

‘대한민국에 이보다 더 좋은 풍류놀이가 또 있을까!’ 소개하려고 떠올리기만 해도 군침이 돌고 오감이 활짝 열리는 기분이다.

헤어질 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른 적이 있었나? 마음을 달래면서 겨우 자리를 떠나며 울먹여야 했던 모임이 있었나? 밤새도록 간절히 놀고 싶은데 너무나 아쉽게 미련을 두고 떠나야 하는 곳.

박록담 소장(한국전통주연구소)이 여는 ‘시주풍류 詩酒風流’가 꼭 그러하다.

■ 박록담

박록담 소장은 ‘대한민국 전통주의 시조’라 불리기에 충분한 전통주 명인이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전국에 사라진 가양주를 박 소장은 복원하고 계승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셨다.

그는 20대 시절부터 전국을 샅샅이 다니면서 850여 종의 1000가지가 넘는 주방문을 복원했다. 전국에 3만명이 넘는 제자들에게 전통주를 계승하고, <한국의 전통주 주방문 (5권)> 등 저서 16권을 저술하고 편찬하였다.

누구보다 전통주를 잘 아는 박 소장이 ‘시주풍류’를 연 것은 우리 술 문화의 예절과 정신을 나누기 위해서다. 즉, ‘시주풍류’는 품격 있는 풍류 문화의 참 도(道)와 멋을 서로 나누는 모임이다.

(왼쪽부터) 박록담 한국전통주연구소 소장, 송영숙 선릉아트홀 대표. 사진 제공 = 송영숙 선릉아트홀 대표.
(왼쪽부터) 박록담 한국전통주연구소 소장, 송영숙 선릉아트홀 대표. 사진 제공 = 송영숙 선릉아트홀 대표.
박록담 소장이 복원한 전통주. 사진 제공 = 송영숙 선릉아트홀 대표.
박록담 소장이 복원한 전통주. 사진 제공 = 송영숙 선릉아트홀 대표.
박록담 소장과 BTS 진이 전통주를 담그고 있다. 사진 제공 = 송영숙 선릉아트홀 대표.
박록담 소장과 BTS 진이 전통주를 담그고 있다. 사진 제공 = 송영숙 선릉아트홀 대표.

■ 송석원

필자가 ‘시주풍류’를 처음 접한 건 10여 년 전 삼짇날이었다.

‘시주풍류’는 3월3일(삼짇날), 5월5일(단오날), 7월7일(칠석), 9월9일 같이 홀수 곧 양수(陽數)가 겹치는 날을 절기 명절로 즐긴 선조들의 풍습에 따라 일 년에 4번의 절기에 맞추어 진행된다.

그때 ‘시주풍류’가 열린 곳이 조선시대의 ‘송석원(松石園)’이 있던 근처였다.

송석원은 지금은 터만 남아 있지만, 무척 흥미로운 모임이 열린 곳이다. 그 모임은 양반 사대부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문학의 풍토를 깼다. 시인 천수경을 중심으로 중인 문인들이 모여, 유학과 한시문을 공부하면서 문화운동을 일으켰다. 이들의 문학을 여항(閭巷)문학이라 한다. 기록에 따르면, 여항문학인은 당시 333인에 이르렀다.

여항문인들이 송석원 모임을 단원 김홍도는 ‘송석원-시사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라는 그림으로 남겼다. 추사 김정희는 그곳 바위에 ‘송석원’ 각자(刻字)를 남겼다.

모임에서 때론 경합이 붙어 격렬한 예술 행위가 벌어졌단다. 예술 경합이라... 짜릿한 작품들이 순식간에 쏟아져 나오는 그 현장을 실시간으로 목도했다니... 아찔하고 세밀한 세포들이 촉각을 다퉈 깨어났을 것이 분명하다. 어찌보면 현재 세계적으로 유명한 K오디션 프로그램의 원조 격이다.

김홍도의 송석원시사야연도. 출처 = 한국데이터베이스산업진흥원.
김홍도의 송석원시사야연도. 출처 = 한국데이터베이스산업진흥원.

■ 시주풍류

박록담 소장은 시조풍류를 송석원 부근에서 연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그 여항(閭巷)문학을 재현하고자 마당을 오픈하고 자비로 판을 벌려 2008년부터 너른 마당에 시객, 묵객, 금객, 율객, 가객을 초청하여 풍류 자리를 마련했다.

박 소장도 여항문인들처럼 시인이기도 하다. 모두 만찬주를 한잔씩 마시면, 박 소장은 돌돌 얇게 말린 한지 안에 손수 붓글씨로 쓴 자작시를 직접 낭송해 주신다.

참 멋스러운 생각이고 행위다. 필자도 조선시대 여항문인 누구처럼 시 한 수로 화답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지난 ‘시주풍류’에서는 한복려 조선궁중음식 명장과 그의 제자들이 정성스럽게 제철 음식을 손수 마련해 주었다.

전통음악에서는 윤진철 명창을 중심으로 명인들이 한자락, 기분 좋으면 두 자락 세 자락씩 뽐을 내었다.

그 선율 위에서 춤추듯 우송헌 김영삼 선생, 강병인 캘리그래피 작가, 신평 김기상 화백, 그리고 신규열 화백이 큰 광목천과 화선지에 멋드러진 매화와 글자로 합작했다.

여기에 박 소장과 제자들이 직접 내리는 술 퍼포먼스를 더해 술을 한잔씩 나눠 마시면서 모두 하나가 되었다.

그야말로 풍류절정의 난장 중 난장, 오감이 짜릿한 야단법석 중 법석(法席)이 펼쳐졌다. 서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중에도 누구 하나 과음하지 않고 서로 예의를 지키면서 풍류놀이가 이어졌다.

적당히 마시고 기분 좋은 취중에서 흥취에 빠져보는 경험이라니, 지금이 21세기가 맞는지 이곳이 꿈인지 생시인지 고개를 도리도리 돌려보고 볼을 살짝 꼬집어도 봤다.

선조들은 이처럼 시·서·화·음주·가무가 어우러진 멋진 풍류놀이를 즐기며 시대를 논하고 시절을 노래했으리라. 아마 그런 흥취가 있었기에, 창의성과 즉흥성이 살아 있는 걸작들이 오늘날까지 태어날 수 있는 게 아닐까.

시루풍류에서 박록담 작품. 사진 제공 = 송영숙 선릉아트홀 대표.
시루풍류에서 박록담 작품. 사진 제공 = 송영숙 선릉아트홀 대표.
시주풍류 음식들. 사진 제공 = 송영숙 선릉아트홀 대표.
시주풍류 음식들. 사진 제공 = 송영숙 선릉아트홀 대표.
시주풍류에서 가야금과 플룻의 합주가 진행됐다. 사진 제공 = 송영숙 선릉아트홀 대표.
시주풍류에서 가야금과 플룻의 합주가 진행됐다. 사진 제공 = 송영숙 선릉아트홀 대표.
시주풍류에서 우송헌 작품. 사진 제공 = 송영숙 선릉아트홀 대표.
시주풍류에서 우송헌 작품. 사진 제공 = 송영숙 선릉아트홀 대표.
시주풍류에서 강병인 작품. 사진 제공 = 송영숙 선릉아트홀 대표.
시주풍류에서 강병인 작품. 사진 제공 = 송영숙 선릉아트홀 대표.
시주풍류에서 신평 김기상 화백. 사진 제공 = 송영숙 선릉아트홀 대표.
시주풍류에서 신평 김기상 화백. 사진 제공 = 송영숙 선릉아트홀 대표.

■ 술

술 명인인 그는 우리 전통 방식으로 지은 전통주가 음악, 시, 서, 화 그리고 사람을 이어준다고 믿는다. 그렇게 이어진 최고의 절정에서 예술가들은 걸작을 탄생시키고, 손님은 위대한 예술의 경지를 지켜보며 함께 감탄하고 기뻐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여항문인의 풍류를 ‘시주풍류’로 이어, 전통예술의 산실이 되고 시대정신을 반영한 사랑방이 되기를 꿈꾼다.

술이 매개라고 하니 누군가는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다. 모르는 소리다. 그 역시 우리 전통의 연장선상이다. 고려 문인 이규보는 술 없이는 시를 짓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청산별곡, 쌍화점, 한림별곡 같은 노래에도 술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다. 조선시대 윤선도와 정철 역시 술을 벗 삼아 삶을 노래하며 당대의 명작을 남겼다.

그렇게 30여년 전부터 시작한 박록담 소장의 나즈막한 행보는 한국 전통주 문화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한 개인의 생각과 우직함이 세상을 변화시킨 우공이산 이야기는 바로 그의 이야기이다.

박록담 소장. 사진 제공 = 송영숙 선릉아트홀 대표.
박록담 소장. 사진 제공 = 송영숙 선릉아트홀 대표.

■ 종로 주막의 외국인

K컬처의 강풍에 한국의 멋을 즐기려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지금도 수많은 외국인이 종로 어느 후미진 주막에서 찌그러진 주전자에 거품 끓는 막걸리를 마시면서 “이것이 한국 전통의 맛”이라며 즐긴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괜히 가슴 한 켠이 찡해진다. 필자가 ‘시주풍류’를 맛본 후에는 더욱 그렇다. 태풍 강풍 역풍으로 그들을 ‘시주풍류’ 좌석에 한 명씩 모두 앉히고 싶은 심정이다.

불과 100여년 전 선조들이 예와 악으로 흥건히 놀되 서로의 건강과 예절을 지키며 우아하고 멋스럽게 놀았던 진정한 K컬처를 한국에 오는 외국 관광객들에게도 나누어 주고 싶다.

■ 가을의 시주풍류

제44회 ‘시주풍류’가 11월 8일 토요일에 충북 예산의 한국전통주연구소에서 열린다. 어김없이 많은 예술 장인이 자신의 예술을 선보이며, 명장의 손끝으로 다양한 전통주와 제철 음식을 맛볼 수 있는 21세기 풍류 나들이가 될 것이다.

가을 하늘 청명한 오늘, 우리쌀과 우리누륵, 우리물 그리고 꽃으로 만든 백화주 향기를 맡으며, 우리의 K컬처를 몽땅 한 잔에 퐁당 담아 음미해 보련다. 품격있는 선조들의 정신과 삶의 미학이 담긴 K풍류문화가 꽃피는 날을 상상해 보면서...

2019년 시주풍류. 사진 제공 = 송영숙 선릉아트홀 대표.
2019년 시주풍류. 사진 제공 = 송영숙 선릉아트홀 대표.

 ※ 가야금 연주자 송영숙은 한국 전통예술의 계보를 잇고 시대정신을 음악으로 구현하는 전통예술가다. 현재 선릉아트홀 예술감독 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일본·프랑스 등 해외 뮤지션과 협업해 20여 개 작품과 200여 회 공연을 연출했다. 국내에서 300여 회 공연을 제작하고, 500여 회 공연에 참여했으며, 8회 이상의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