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기후변화가 가속화되며 폭염, 폭우 등 극한기상 현상의 발생 빈도와 강도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이런 현상이 단순한 기상 이변을 넘어 경제의 핵심 지표인 물가에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한국은행의 분석 보고서가 나왔다.

8일 한은은 관련 보고서에서 기후변화 대응이 지연되면 미래의 물가 부담이 훨씬 심각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은이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기상 충격의 지속성이다. 한은에 따르면 과거에는 농산물 가격의 일시적 급등에 그쳤던 기상 충격의 영향이 이제는 경제 전반에 걸쳐 장기간 나타나고 있다. 한은의 분석 결과 1℃의 고온충격이 소비자물가에 미치는 영향은 2년 이상 지속됐으며 이 기간 평균 0.055%p의 물가상승 압력으로 작용했다.

10mm의 강수충격도 15개월 이상 영향을 미치며 평균 0.033%p의 물가를 끌어올렸다. 이는 기후 충격이 일회성 교란 요인이 아닌 중기적인 물가 경로 자체에 영향을 주는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시사한다.

지난 11일(현지 시간) 멕시코 프로그레소의 추부르나 푸에르토 해변에서 죽은 물고기의 모습. 현지 관계자들은 대규모 조류 번식으로 인해 물속 산소 농도가 감소했기 때문에 해변으로 밀려오는 해양 생물 종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11일(현지 시간) 멕시코 프로그레소의 추부르나 푸에르토 해변에서 죽은 물고기의 모습. 현지 관계자들은 대규모 조류 번식으로 인해 물속 산소 농도가 감소했기 때문에 해변으로 밀려오는 해양 생물 종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진=연합뉴스

특히 한은은 기상 충격의 강도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물가에 미치는 파급력이 비례 이상으로 증폭되는 것을 확인했다. 한은의 분석에 따르면 일반적인 고온 충격(상위 5% 미만)이 발생했을 때 1년간 물가상승 압력은 0.03%p 수준에 머물렀다. 하지만 상위 5% 이상에 해당하는 '극한고온' 충격이 발생하면 0.56%p까지 확대돼 약 18배나 강한 충격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강수 충격에서도 동일하게 관찰됐다. 일반강수 구간에서 총 물가상승 압력은 0.0009%p로 미미했으나, 극한강수 구간에서는 0.45%p까지 증폭됐다. 이는 기존의 분석 모델로는 극한기상이 물가에 미치는 심각한 영향을 과소평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기상 충격은 모든 품목에 동일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상품물가는 농·수산물을 중심으로 고온과 강수 충격 모두에 뚜렷한 상승 압력을 받았다. 반면 서비스물가는 고온충격에는 상승 압력, 강수충격엔 오히려 하락 압력을 받았다.

이는 고온충격이 냉방비 등 운영비 증가와 노동생산성 저하를 유발해 서비스 생산 비용을 높이는 반면, 강수충격은 외부 활동을 줄여 서비스 수요 자체를 위축시키는 효과가 더 크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처럼 품목별 이질적인 반응은 향후 물가 안정을 위한 정책 대응 시 세밀한 접근이 필요함을 뜻한다.

한은은 기상청의 기후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미래의 물가 부담은 훨씬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또 기후변화 대응에 소홀할 시 고온충격으로 인한 물가상승 압력은 2051~2100년 0.73~0.97%p에 달해 현재보다 2배 증가할 수 있다고 대다봤다.

한은은 이런 암울한 전망 속에서도 정책적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적극적인 온실가스 감축이 이뤄지면 고온·강수 충격에 따른 물가상승 압력이 현저히 완화되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농·축·수산업 등 기후 취약 부문의 공급 안정성을 확보하고, 재난 대응 인프라 같은 기후 적응 투자를 확대하는 한편, 보험·금융 관련 안전장치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