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행이 주도해온 유언대용신탁 시장에 증권사까지 가세하면서 판이 넓어지고 있다. 5대 시중은행의 잔액은 2020년 8793억원에서 올해 8월 22일 기준 3조8894억원으로 늘어, 불과 5년 만에 4배 이상 확대됐다. 업계는 연내 4조원 돌파가 유력하다고 보고 있다.
은행권은 가입 문턱을 낮추며 방어에 나섰고, 증권사들은 투자·보험 연계 상품을 내세워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그룹 차원 브랜드 내세워…상품·서비스 경쟁 치열
업계에 따르면 은행들은 그룹 차원의 시니어 특화 브랜드를 전면에 내세우며 상품 및 서비스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다. 고령화 사회에 맞춰 잠재 고객을 미리 확보하고 상속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먼저 KB국민은행은 시니어 특화 브랜드 ‘KB골든라이프‘를 통해 계열사 서비스를 통합 제공하는 전략을 편다. 시니어 전담 컨설팅 조직인 ‘KB골든라이프센터‘를 기존 수도권 5곳에서 전국 12곳으로 늘리고, ‘KB위대한유산신탁‘의 최소 가입금액을 10억 원에서 1000만 원으로 대폭 낮춘 간편형 상품으로 고객을 유치하고 있다.
신한은행은 그룹 차원의 통합 브랜드 론칭을 준비하며 연금·신탁 라운지 시너지를 추구하고 있다. 2025년 5월 고도화된 신 전산 시스템을 도입해 고객이 증식-관리-분배 전 과정을 유연하게 설계할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법무법인 태평양 등과 협력해 재외국민을 위한 글로벌 자산 승계 솔루션을 제공하고, 사랑의열매, 월드비전, 서울대병원 등과 연달아 협약을 맺으며 기부 문화 확산에도 앞장서고 있다.
하나은행의 경우 하나금융그룹의 시니어 브랜드 ‘하나더넥스트‘를 통해 은행·증권·보험 등 전 계열사의 역량을 결합했다.
유언대용신탁인 ‘하나 리빙트러스트‘에 치매 대응 특약을 더한 복합형 상품이 인기다. 치매 발병 전에는 본인이 직접 자산을 운용하다가, 이후에는 지정된 후견인이 병원비, 간병비 등 사전에 설계한 항목에 맞춰 자금을 집행할 수 있는 구조다.
우리은행 역시 이달 1일 시니어 브랜드 ‘우리원더라이프‘를 선보이며 경쟁에 가세했다. 우리금융은 최근 인수한 동양생명, ABL생명 등 보험사와 연계해 ‘우리원더라이프‘를 활용한 영업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NH농협은행은 지난 5월 ‘NH 사랑THE 종합유언대용신탁‘의 가입 기준을 완화했다. 최소 가입금액을 기존 3억 원에서 금전만 맡길 경우 5000만 원, 비금전 자산 포함 시 1억 원으로 낮췄다.

증권사 진입, 경쟁 구도 변화
은행권이 잇달아 상품을 내놓는 사이, 증권사들도 시장에 발을 들였다. 신한투자증권은 지난 8월 유언과 증여를 결합한 ‘행복이음신탁‘을 출시했다. 회사 측은 보도자료에서 “투자자산 관리 경험과 보험 연계가 강점”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증권도 ‘헤리티지‘ 브랜드로 유언대용신탁 상품군을 강화했다.
이날 금융권 관계자는 “증권사까지 가세하면서 경쟁 환경이 달라졌다”며 “은행권도 단순한 금액 인하를 넘어 상품 차별화에 힘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조건부·기부형 설계 확대
상품 성격도 달라지고 있다. 단순히 사후 자산 이전에 그치지 않고, 조건부 설계와 기부형 신탁이 늘고 있다. 손주가 대학에 진학하면 등록금을 지급하거나, 일정 기간 내 취업하면 정착금을 주고,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해당 자금을 기부로 전환하는 방식이다. 장례비·요양비를 선지급하거나 일정 금액을 분할 지급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한 금융권 PB는 “최근에는 상속보다 사회 환원을 목적으로 유언대용신탁을 찾는 고객도 많다”며 “상품 구조가 유연해진 덕분에 맞춤형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1인 가구·고령층 수요 확대…연내 4조 돌파 유력
저출산·고령화로 무자녀 가구와 1인 고령가구가 늘어난 점도 시장 성장 배경으로 꼽힌다. 업계에 따르면 최근에는 무자녀·인 가구와 고령층의 문의가 늘면서 고객층이 점차 넓어지고 있다. 실제로 상속 갈등을 피하려는 고령층은 “내가 정한 조건대로 재산이 쓰인다”는 점에서 신탁의 매력을 느낀다.
급격히 성장하는 시장에 비해 제도 정비는 더디다. 취득세 과세 체계가 신탁 구조별로 달라 혼선이 빚어지고, 금융사마다 수수료 체계가 제각각이라 소비자 혼란이 크다. 분쟁 발생 시 조정 장치가 부족하고, 법정 상속분(유류분)과 충돌할 가능성도 있다.
법조계 관계자는 “유언대용신탁은 개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상속을 자유롭게 설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고령·취약 고객 보호 장치도 함께 마련돼야 한다”며 “표준 약관과 분쟁조정 제도 정비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업계는 유언대용신탁 시장이 올해 안에 4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한다. 금융권 관계자는 “상속 분쟁을 줄이고 원하는 방식대로 자산을 남기려는 수요가 계속 늘고 있다”며 “은행과 증권사가 모두 뛰어들면서 유언대용신탁은 고령사회에 적합한 상속 인프라로 자리잡고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