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5일(현지시간) 알래스카에서 마주 앉았다. 2019년 오사카 G20 정상회의 이후 6년여 만이자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첫 서방 방문에 나선 푸틴 대통령과의 담판이다. 

'24시간 내 전쟁 종식'을 공언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회담을 통해 우크라이나 전쟁 휴전의 극적인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다. 그러나 3시간의 회담은 구체적인 합의문이나 공동 기자회견 질의응답도 없이 막을 내렸다. 

이번 회담은 국제형사재판소(ICC) 체포영장까지 발부되며 국제 외톨이 신세였던 푸틴 대통령에게 화려한 외교적 복귀 무대를 깔아주고 트럼프 대통령은 '평화 중재자'의 명분만 챙긴 채 실속 없는 만남으로 끝났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회담 종료 후 질의를 받는 트럼프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회담 종료 후 질의를 받는 트럼프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알래스카의 3시간, 성과 없이 끝난 세기의 담판
알래스카 앵커리지의 엘먼도프-리처드슨 합동기지에서 열린 회담은 시작부터 이례적인 장면의 연속이었다. 

먼저 트럼프 대통령은 전용기에서 내리는 푸틴 대통령을 레드카펫 위에서 박수를 치며 맞았고 두 정상은 곧장 미국 대통령 전용 리무진 '캐딜락 원'에 동승해 회담장으로 향했다. 가까운 동맹국 정상에게나 제공될 법한 파격적인 의전이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달리 회담의 결과물은 없었다. 당초 3대3 회담에 이어 확대회담까지 예정됐었지만 확대회담은 생략된 채 공동 기자회견장으로 직행했다. 이마저도 양 정상이 준비된 발언만 짧게 낭독하고 취재진의 질문을 받지 않는 일방적인 발표 형식으로 진행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매우 생산적인 대화를 나눴고 여러 합의 지점이 있었다"면서도 "아직 합의되지 않은 '가장 중요한 하나'가 남아있다"고 밝혔다. 

사실상 핵심 의제였던 우크라이나 휴전 합의가 불발됐음을 인정한 셈이다. 그는 "곧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그리고 나토와 통화할 것"이라며 "궁극적으로 그들에게 달렸다"고 말해 협상 결렬의 책임을 우크라이나와 유럽에 넘기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파괴된 우크라이나 시내. 사진=연합뉴스
파괴된 우크라이나 시내. 사진=연합뉴스

푸틴 대통령은 한층 여유로웠다. 그는 "건설적이고 상호 존중하는 분위기에서 회담이 진행됐다"며 "오늘의 합의가 우크라이나 평화의 길을 열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우크라이나의 안보 보장이 필요하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의견에 동의하며 관련 작업을 시작할 준비가 됐다"는 원론적 입장을 되풀이했다. 휴전의 구체적인 조건이나 이행 방안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결국 두 정상은 "조만간 다시 만나 대화를 이어가자"는 막연한 약속만을 남겼다. 푸틴 대통령이 "다음엔 모스크바에서 보자"고 제안하자 트럼프 대통령이 "흥미롭다"고 화답한 것이 이날 회담의 유일한 '합의'였다.

트럼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파격 의전' 속 숨은 푸틴의 계산…외교 고립 탈피
외교 전문가들은 이번 회담의 실질적인 승자는 푸틴 대통령이라고 입을 모은다. 회담의 내용과 무관하게 미국 대통령이 주선한 정상회담에 당당히 참석함으로써 3년 가까이 이어져 온 국제적 고립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이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 세계의 전방위적 제재와 비난을 받아왔다. 특히 ICC가 전쟁 범죄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한 이후 그의 외교적 입지는 크게 위축됐다. 이런 상황에서 '적국'인 미국의 영토를 직접 방문해 미국 대통령의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회담을 치른 것 자체가 엄청난 정치적 자산을 안겨준다는 분석이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트럼프가 회담에서 진 것은 아니지만, 푸틴이 확실하게 이겼다"며 "푸틴은 휴전이라는 양보 없이도 미국과의 관계 재설정이라는 오랜 목표를 달성했고, 추가 제재의 압박에서도 벗어났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전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심각한 후과가 있을 것"이라며 러시아산 원유를 구매하는 제3국에 대한 2차 제재 카드까지 만지작거렸지만,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제재'라는 단어는 단 한 차례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푸틴에게 앞으로의 협상에서도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푸틴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푸틴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공은 젤렌스키에게…트럼프, '평화 중재자' 명분 챙기기
트럼프 대통령은 실질적인 성과 없이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정치적 명분만 챙겼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그는 회담 후 폭스뉴스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이번 회담을 "10점 만점에 10점"이라고 자평하며 "이제 공은 젤렌스키에게 넘어갔다. 우크라이나가 (휴전 조건에) 동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사실상 휴전 협상 교착의 책임을 우크라이나에 전가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앞으로의 협상 과정에서 러시아가 아닌 우크라이나를 압박하며 자신의 '거래'를 성사시키려 할 가능성을 내비친 것이다.

알래스카에서의 3시간이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향한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지 못한 채 각자의 정치적 계산 속에서 막을 내렸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푸틴은 국제 무대의 중심으로 화려하게 복귀했고 트럼프는 대선을 앞두고 외교적 치적 쌓기를 시도했다. 결국 막연한 추가 회담 약속만이 남았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우크라이나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