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제가 요동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및 동남아 분쟁 등 심각한 지정학적 위기와 함께 관세전쟁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패러다임 변화가 급격히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던 모든 것은 당연하지 않게 되었다. 산업은 AI를 중심으로 거칠게 재편되고 있으며, 구 시대의 약속은 신 시대의 빛속에서 마치 유물처럼 흩어지고 있다.
산업의 쌀인 반도체 업계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수요공급의 기계적 경제원칙을 벗어나 국가 차원의 핵심 안보전략자산 수준으로 발전하는 중이다.
이제 반도체는 단순한 산업의 일부가 아닌, 시대의 패권을 결정하는 균형의 세계수다. 그 안에서 수 많은 기업들이 각자 노력하며 거대한 에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문제는 그 촘촘한 경쟁의 안팎에서 유독 파열음을 내는 영역이 있다는 지점이다. 바로 제조의 파운드리다.
글로벌 1위 사업자이자 파운드리 업계의 '흉폭한 포식자' TSMC가 시장의 원톱으로 군림하며 시장의 질서를 폭력적으로 재조합하고 있다. 국내 이커머스 강자인 쿠팡이나 배달앱 1위 사업자 배달의민족을 둘러싼 독과점 논란은 가소로울 정도로 무지막지한 권력의 횡포를 보여주고 있다. 고민이 깊어지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삼성 파운드리에 대한 업계의 관심이 커지는 배경이다.

"2나노 가격 물어보기 겁난다"
TSMC는 글로벌 파운드리 업계의 왕중왕이다. 지난 7월에는 전년 동기 대비 25.8% 증가한 약 15조원의 매출을 기록했으며 올해 누적 매출 역시 사상 최고치를 경신 중이다.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60%를 훌쩍 넘는다.
TSMC의 독보적인 위상은 국제정치에서도 위력을 발휘한다. ‘실리콘 방패(Silicon Shield)’로 활동하며 중국의 대만 침공을 막는 든든한 안보 방패막이 되고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만 전체 GDP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수출의 핵심 동력 역할도 해내는 중이다.
대만인들은 이러한 TSMC를 호국신산(조국을 지키는 신성한 산)이라 부른다.
TSMC도 그 독특한 지위를 강렬히 자각하며 또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대만 정부로부터 특별한 지위를 요구하는 한편 파운드리 1위 사업자로서 각 팹리스들에게 충분히 돈을 빨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TSMC에게 간택되어 반도체를 만들 수 있기를 원하는 실정이라 가능한 일이다.
최근에는 이러한 기조가 더 심해지고 있다. 무자비한 가격 인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버리기 때문이다. 당장 3나노미터(nm) 웨이퍼 가격을 5% 이상, 첨단 패키징(CoWoS) 가격은 10~20%가량 인상한다는 계획이 나와 업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AI 칩 생산에 필수적인 4나노 공정의 경우 최대 10%, 미국 애리조나 공장에서 생산되는 물량은 30%까지 인상될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되어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2나노도 마찬가지다. IT매체 WC테크에 따르면 TSMC는 4월부터 2나노 공정 주문을 받기 시작했으며 가오슝 등 대만 내 4개의 공장에서 가동을 시작한다는 방침이다. 이런 가운데 2나노 가격은 3나노 대비 무려 50% 높아질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WC테크는 "TSMC는 어떠한 할인 정책도 생각하지 않는 중"이라며 "기존 동일한 테스트 웨이퍼 등을 활용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사이버셔틀(CyberShuttle) 서비스가 시작될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2나노 가격은 상당히 올라갈 것"이라 말했다.
이러한 TSMC의 '배짱'은 역시 압도적인 기술력과 시장 점유율에서 비롯된다. 현재 고성능 AI 칩을 안정적으로 양산할 수 있는 곳은 사실상 TSMC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TSMC가 가격을 올릴경우 테크 업계는 상당한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TSMC의 일방적인 결정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다는 점이다.
실제로 타이페이 타임즈 등 외신은 TSMC의 실적 발표 후 "웨이퍼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 67.6%를 가진 TSMC의 독점적 지위는 더욱 강해지는 중"이라며 "상반기에는 계절적 요인으로 출하량이 다소 감소했으나 전체 시장 점유율은 여전히 압도적"이라 분석했다.
글로벌 파운드리 1위 사업자라는 왕중왕의 옥좌에 올라 파격적인 가격 후려치기를 구사하는 것도 모자라, 이를 견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마저 없다는 절망적인 해석이다.

"테크 인플레이션, 모든 가격이 올라간다"
TSMC 가격 인상의 배경에는 폭발적인 AI 칩 수요 외에도 ▲미국 등 해외 공장 건설에 따른 비용 증가 ▲연구개발(R&D) 투자비 회수 ▲강대만 달러 환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TSMC의 가격 인상을 두고 색안경만 낄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반도체는 산업의 쌀이면서도 근본이자 정체성이다. 글로벌 경제에 거대한 영향을 미치는 아이템이다. 비록 여러가지 고려사항이 있다지만 TSMC가 1위 사업자로 군림하며 시장 전체를 아무렇지도 않게 주무르는 것은 공포 그 자체라는 반응이 대다수다.
무엇보다 TSMC가 제조의 최하단에서 가격을 올려버리는 바람에 최종 소비자들의 부담도 커지고 있다는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TSMC가 가격을 올리면 테크 업계도 울며 겨자 먹기로 상승한 가격을 소매 가격에 포함시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소비자들의 비판이 TSMC가 아닌 B2C인 테크 업체에 쏠린다는 점이다.
천하의 애플도 마찬가지다. 당장 폰아레나에 따르면 TSMC의 ‘2025년 웨이퍼 가격 10% 인상’은 애플 M 시리즈 칩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줄 전망이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가격 상승으로 이어져 고스란히 소비자 부담이 될 것으로 보인다.
폰아레나는 "아이폰 17 모델은 이미 디자인 변경으로 인해 온라인에서 비판을 받고 있으며, 관세 문제로 가격이 올라가고 있어 역시 타격이 크다"면서 "맥북 노트북에 혁명을 일으킨 애플의 경이로운 M 시리즈 칩이 TSMC의 결정으로 가격이 오르고, 결과적으로 애플의 컴퓨터와 다양한 아이패드 모델 가격도 더 비싸게 만들면 소비자들도 비판할 것"이라 말했다.
TSMC에서 촉발된 '테크 인플레이션'이다.

삼성 파운드리에 쏠리는 기대
"가격을 마음대로 올려도 견제받지 않는 TSMC의 독주, 심지어 안전장치도 없고 소비자들에게 비판을 받지도 않는다" 파운드리 시장의 오랜 공식이다.
최근에는 업계의 기류가 약간 달라지고 있다. 세계 최대 빅테크인 애플과 혁신의 아이콘 테슬라가 연이어 삼성전자의 손을 잡으면서, 공급망 다변화를 넘어선 '전략적 파트너'로서 삼성의 가치가 재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애플이 차세대 아이폰에 들어갈 핵심 칩 생산을 삼성전자 미국 텍사스 공장에 맡기기로 한 장면이 대표적이다. 업계는 이 칩이 '스마트폰의 눈'으로 불리는 이미지센서 '아이소셀'일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지난 30년간 이어져 온 애플과 일본 소니의 독점적 협력 관계를 깨는 일대 사건이다.
삼성전자 파운드리의 실력이 주효했다. 웨이퍼 두 장을 수직으로 쌓아 접착하는 '3D 스태킹'과 같은 신기술을 통해 초고화소 이미지센서 분야에서 경쟁사를 압도하는 기술력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설계(시스템 LSI)와 생산(파운드리) 조직을 통합해 고객 맞춤형 '원스톱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는 역량도 높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분석된다.
애플에 앞서 전해진 테슬라와의 계약은 삼성전자 파운드리의 미래 가치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테슬라와 약 23조 원에 달하는 차세대 인공지능(AI) 칩 'AI6' 생산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내년부터 삼성의 최첨단 2나노 공정을 통해 미국 텍사스 테일러 공장에서 양산될 예정이다.
이 협력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 위탁생산을 넘어 양사가 '기술 동맹'에 가까운 관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삼성의 오스틴·테일러 공장은 테슬라의 핵심 생산기지인 '기가 텍사스'와 불과 30분 거리에 위치하며 '텍사스 트라이앵글'을 형성한다. 이는 단순한 지리적 인접성을 넘어 자율주행(FSD)부터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 슈퍼컴퓨터 '도조'로 이어지는 테슬라의 거대 AI 생태계에 필요한 맞춤형 반도체를 공동 개발하고 신속하게 공급하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할 전망이다.
TSMC가 2028년에야 미국 애리조나 공장에서 2나노 공정을 가동할 계획인 반면, 삼성전자는 내년부터 테일러 공장에서 2나노 칩 양산에 돌입한다. 미국 정부가 자국 내 반도체 생산을 강력하게 압박하는 가운데 삼성전자 파운드리가 판을 흔들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는 뜻이다.
규칙을 만들고 바꾸는 것에 익숙한 'TSMC 왕중왕'에 시달리던 업계에게는 한줄기 희망이다. 물론 삼성전자 파운드리의 부침은 있었다. 그러나 애플과 테슬라 수주 사례를 보듯 삼성전자 파운드리는 글로벌 거점을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그 기술적 완성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무엇보다 단순하게 TSMC의 대안을 무리하게 찾다 울며 겨자 먹기로 삼성전자를 택한 것이 아닌, 삼성전자 파운드리가 스스로 강력한 기술력을 보여줬다는 측면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는 자연히 공급 다변화를 끌어내어 파운드리 시장, 나아가 반도체 시장 전체의 경색된 흐름을 뚫어줄 수 있다.
업계 전문가는 "TSMC의 독점적 지위와 가격 인상에 부담을 느낀 빅테크들이 안정적인 공급망과 기술 협력이 가능한 삼성을 대안으로 선택하기 시작했다"라며 "이번 계약들은 삼성 파운드리가 시장의 '게임 체인저'로 부상하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