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최대 국적 원양 정기선사 HMM이 과도기를 지나고 있다. 정치권과 부산시를 중심으로 본사 부산 이전론이 거론되면서다. 본사 이전의 경제효과와 지역발전효과 등을 두고 찬성과 반대 측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 중이다.
다만 실무자들은 HMM이 당면한 어려움이 본사 이전 문제에만 한정되지 않는다고 경고한다. 글로벌 통상 환경이 복잡해지면서 국제 시황에 크게 영향받는 해운업계의 앞날에 먹구름이 드리웠기 때문이다. 이는 곧 해운에 무역의 99.7%를 의지하는 대한민국 경제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기에, 지금이라도 바다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실히 알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해상운임 폭락 중…힘 잃은 반등 요인들
가장 직관적인 위기는 운임 하락이다. 운임이 떨어지면 항차 대비 수익이 줄어들고, 해운사 실적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대표적 해상운임지수인 상하이컨테이너운임지수(SCFI)는 6월 첫째 주 이후 두 달 가까이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트럼프 정부의 관세 정책과 이스라엘-이란 교전 등, 그간 단기 운임 상승을 부추기던 요소들이 효과를 잃었다는 평가다.
특히 이번 운임 하락은 전통적인 물류업계 성수기인 3분기에 시작된 것이라 위기감을 부추긴다. 업계에선 향후 예고된 운임 대폭락과 해운사 치킨게임의 시발점이 아닐지 긴장하고 있다.
상하이해운거래소에 따르면 7월 25일 기준 SCFI는 1592.59p를 기록 중이다. 지난 6월 6일 2240.35p를 찍으며 6개월 최고 수준을 기록했던 때가 무색하게 떨어지고 있다.
그간 아시아권 화주들을 중심으로 미국의 고율 관세가 부과되기 전에 물량을 먼저 미국으로 보내는 ‘프론트 로딩’이 횡행했으나, 이 과정에서 미래에 발생했어야 할 선박 수요까지 미리 소진된 탓이다. 7월 들어서는 신규 화물 수요가 사라지는 수요 절벽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문제는 앞으로 해상운임이 더 회복될 가능성이 낮다는 점이다. 물류업계 전통적 성수기인 3분기임에도 물동량이 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7월부터 시작되는 3분기는 중국 국경절과 여름 휴가철 등으로 물동량이 늘어나기 때문에, 주요 선사들은 이 시기에 맞춰 GRI(일반운임인상)를 단행하곤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하지만 올해는 오히려 3분기 수요 자체가 조기 소진된 상황에서 무턱대고 운임 인상을 감행했다간 물동량이 더 줄어들 위험이 크다”며 “HMM 역시 당분간은 운임 방어 차원에서라도 GRI를 시도하긴 힘들어 보인다”고 내다봤다.
물동량은 줄었는데 선박 공급은 더 늘어나고 있다. 지난 코로나 19 팬데믹 시기 글로벌 선박 부족과 운임 폭등으로 수혜를 입은 선사들은 신조선을 대거 발주했고, 해당 물량들이 2023년부터 본격적으로 선사에 인도되는 중이다.
한국해양진흥공사(해진공)에 따르면 2025년 컨테이너선 총 선대 예측치는 328만TEU(1TEU=6m 길이 컨테이너 1개)다. 지난해 대비 6.3% 증가 전망이다. 2026~2028년 증감률 예측치를 상회한다. 공급이 과잉되고 있는 신호로 해석된다.

할 일 많은 HMM, 투자는 느린 박자
운임 하락과 공급 과잉은 치킨게임으로 이어진다. 한국은 이미 치킨게임의 여파에 가장 뼈아프게 당했던 과거가 있다. 한진해운 파산이다.
10년 전 해운업계에는 극심한 불황이 찾아왔고, MCS와 머스크 등 상위권 선사들이 선제적 선대 확충을 통한 저가 운임 공세를 펼치자 글로벌 5위 선사였던 한진해운이 버티지 못하고 파산했다.
한진해운 파산 사례는 주요 선사들에게 타산지석이 됐다. 당시 사선(자체 보유 선박)보다 용선(대여해 운영하는 선박)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한진해운이 불황기 운임 하락에 유연히 대처하지 못한 것을 본 것이다. 결국 현재 선사들은 불황을 앞두고 오히려 선박을 전투적으로 발주하고 있다. 자체 선박량을 늘리고, 노선을 다양하게 확보해서 외부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포석이다. 오히려 공급 과잉을 두려워하며 발주량을 줄였다간, 수년 뒤 일방적으로 체급을 키운 경쟁 선사들에게 치킨게임에서 밀릴 수도 있다는 게 업계의 시선이다.
해운시황전문기관 알파라이너 집계에 따르면, 글로벌 10위권 선사들 중 HMM을 제외한 9개 선사가 보유 선복량의 10% 이상의 발주 잔량(오더북)을 유지하고 있다. 1위 MSC와 3위 CMA CGM은 선복량의 30%를 넘는 물량을 발주 잔량으로 보유 중이다. 2~3년 후 해당 선박들이 건조되고 바다에 풀린다면 공급 과잉과 운임 하락세는 더 강해질 수 있다는 평가다.
HMM도 투자 의지는 확고하다. 지난해 9월 2030 중장기 전략을 발표하며 2030년까지 총 23조5000억원을 투입하는 목표를 세웠다.
항만과 컨테이너, 벌크 등 다양한 사업으로 포트폴리오를 확대해 종합 물류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계획이다. 선대 확충에도 총 16조6000억원을 쓴다.
문제는 아직 눈에 띄는 발주가 없다는 점이다.
물론 참작할 만한 사유는 있다. 먼저 신조선가가 지나치게 높아져 가격 부담이 커졌다는 점이다. 영국 조선해운시황 분석기관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지난 6월 기준 신조선가지수는 187.11p를 기록하며 5월 대비 0.42포인트 상승했다. 지난해 2월 이후 줄곧 180대를 유지하고 있는 신조선가지수는 과거 조선업 초호황기 최고치였던 191p에도 거의 근접했다.
특히 HMM의 핵심 선종인 초대형컨테이너선의 가격 상승세가 예사롭지 않다. 6월 기준 척당 3700억원 이상을 호가하며 대표적 고부가선인 LNG운반선의 가격을 뛰어넘었다. 글로벌 선사들의 발주 지속이 선가를 유지시키는 상황에 HMM마저 쉽사리 발주 전쟁에 뛰어들기 어려운 셈이다.
둘째로 HMM의 보유 선대 상황이 비교적 여유롭다. 2024년말 기준 평균 선령은 8.53년으로 글로벌 30위권 내 주요 선사 중 가장 낮은 편이다. 노후 선박 교체 압박에서 자유롭다. 친환경 선박 전환률도 동종업계 대비 우수한 편으로, 국제해사기구(IMO) 환경 규제로 인한 신조선 확보도 마냥 급하지 않다.
또한 HMM은 보유한 선박 94만TEU 중 사선이 79만TEU에 달한다. 용선은 단 15%에 불과한 수준이다. 특히 사선 중 1만TEU 이상 중대형급 선박이 차지하는 비율이 89% 이상이다. 반면 글로벌 1~5위 선사의 용선비율이 40% 이상, 9위 이스라엘 ZIM라인은 89%에 달한다. 타 선사들과 비교해 아직 신규 발주와 사선 확충에도 여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요인들이 장기적으로도 지속되리란 보장은 없다. 신조선 발주가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 올해 6월 세계 선박 수주량은 256만CGT(84척)이다. 지난해 동기 1326만CGT와 비교해 81% 감소했다. 이미 대량 발주를 끝낸 선사들이 숨고르기에 들어가는 추세다.
HMM 역시 단기적으론 보수적인 시야를 갖고 투자 적기를 기다릴 순 있어도, 너무 늦으면 안된다는 평가다.
부산 이전론에 밀린 민영화론…정부 지분 끝까지 함께하나
업계 일각에서는 수년째 민영화되고 있지 않은 정부 지분이 HMM의 보수적이고 느린 투자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HMM은 산업은행과 해양진흥공사가 각각 36.02%, 35.67%의 지분을 보유하고 1, 2대 주주로 머무르고 있어 장기적 관점 대규모 투자 실행이 어렵다”며 “CEO조차 2년 임기제인 만큼 민간기업에 비해 굵직한 투자를 책임지기도, 결정에 속도를 내기도 어려운 구조”라고 지적했다.
전준수 서강대 경영학부 석좌교수는 “앞으로 본사 부산 이전 등이 현실화되면 HMM이 받는 정치적 영향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며 “경영 자율성이 없어지기 전에 대주주 산업은행이 용단을 내려야 한다. 해운 산업을 위해 적격의 주인을 찾아 민영화 시키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금융감독원은 최근 산업은행의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 산출 시 HMM 지분을 3년간 제외하는 방안을 승인했다.
BIS 비율은 위험 가중 자산이 자기자본에서 차지하는 비율이다. 현재 13% 후반을 유지 중이다. 만일 13% 밑으로 떨어지면 건전성 관리에 들어가야 한다. BIS 규정상 은행이 자기자본 대비 특정 기업 지분을 15% 이상 보유하면, 15%가 넘는 지분에 위험가중치 1250%를 매긴다. 최근 HMM 주가가 높아지면서 산은이 보유한 HMM 지분이 산은 총자본의 15%를 상회하게 됐고, BIS 비율에 직접적으로 악영향을 주게 된 것이다.

주목할 건 ‘해법’이다. 산업은행과 금융당국은 HMM 지분 매각 일정을 앞당겨서 건전성을 해소하는 게 아닌, 산출 기준을 3년 동안 바꾸는 방안을 선택했다. HMM 시가총액이 높아지면서 매각이 힘들 것으로 관측되자 사실상 이를 3년 유예하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전 교수는 “정권 교체 시기인 만큼 산업은행 실무자들로서도 무리한 인수보다는 시간을 끄는 방향을 선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새 정부 입장에서도 본사 부산 이전을 위한 의결권 행사를 위해서라도 매각 시기를 늦추는 것이 좋은 만큼, 서로의 눈높이가 맞아떨어졌다는 해석이다.
전 교수는 “적어도 1대주주인 산업은행 지분만이라도 빠르게 매각해야 한다”며 “남은 해양진흥공사 지분은 정부가 ‘의결권은 제한된’ 담보 형식으로 보유하면서 경영 위기 발생 시 백기사 역할을 하는 용도로 머물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로운 인수자가 소신껏 회사를 인수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설명이다.
한편 HMM을 둘러싼 민영화 논의는 해운업계 호황 시절부터 꾸준히 거론됐다. 2022년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해상운임이 치솟으며 HMM 역시 10조원 이상의 유보금을 확보했고, 산업은행과 해양진흥공사를 향해서도 HMM에 투입한 공적자금을 회수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쳤다.
2023년부터 2024년까지 추진된 1차 HMM 민영화는 실패로 끝났다. 정부에서 아직 주식 전환되지 않은 영구전환사채를 끝까지 손에 쥐고 매각 대상 기업에게 경영권 보장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하림그룹 역시 “경영권을 보장해주지 않으면 어떤 기업도 인수에 참여할 수 없다”며 끝내 인수를 포기한 바 있다.
업계에서는 부산에 해양 클러스터 조성과 해운업 발전을 위해선 오히려 HMM 민영화가 우선돼야 한다는 시선도 나온다.
한 관계자는 “현대상선 시기 망할 위기에 놓인 HMM을 산업은행과 해양진흥공사가 적시에 지원해서 완전히 살려놨다. 당시 투자한 금액의 2배, 3배에 이르는 수익도 낸 만큼, 이제는 매각을 통해 막대한 재원을 확보하고 국가 산업에 재투자해야 할 시기”라며 “특히 해양진흥공사는 매각 자금을 바탕으로 부산 해양 클러스터 조성과 중소 선사 지원, 지역 경제 활성화를 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HMM 경영, 최선의 방안 찾아야
글로벌 해상 물류는 격변을 맞고 있다. 이스라엘 하마스 전쟁으로 인한 홍해 사태는 1년이 넘도록 해소되지 않고 있으며, 상위 선사들은 동맹관계를 재편하며 구도를 어지럽게 만든다. 지난해 말부터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발 무역전쟁으로 불확실성이 한층 더 커진 상황이다. 바다 위 풍랑이 여느 때보다 거센 시기다.
이런 상황에서 HMM은 대한민국 대표 해운사로서 짊어진 짐이 많다. 한국 해운 역사와 발걸음을 함께 했다. 한진해운 파산과 채권단 관리 체제부터 팬데믹 대호황과 매각 이슈, 글로벌 해운 동맹 재편까지 굵직굵직한 사건의 중심엔 항상 HMM이 있었다.
글로벌 과도기는 다시 해석하면 도약의 발판이 될 수도 있다. 여력은 충분하다. 현금성자산만 3조1000억원, 유동금융자산은 12조6000억원이 넘는다. 국가 해운 100년 대계를 그릴 수 있는 상황이다. 부산 이전론부터 매각까지, HMM 경영을 둘러싼 움직임에 이목이 쏠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