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클레어튼의 US스틸 공장 전경. 사진=AP연합뉴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클레어튼의 US스틸 공장 전경. 사진=AP연합뉴스

일본제철이 미국 US스틸 인수에 이어 현지 새 제철소 건설까지 결정했다. 조강 생산량 자체를 늘려 중국의 저가 철강 무량 공세에 대응하고, 고급강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미국 시장에 효과적으로 진출하겠다는 전략이다.

이들의 거침없는 공세에 글로벌 철강업계의 판도 역시 크게 변화할 예정이다. 한국 역시 현지 진출을 시도하는 현대제철과 포스코 등이 직·간접적인 영향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 퍼주는’ 일본제철, 결국 US스틸 따냈다

아사히신문은 하시모토 에이지 일본제철 회장이 미국 현지 새 제철소 건설 계획을 밝혔다고 지난 11일 보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약속한 투자 계획을 이행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일본제철은 US스틸 인수 성사를 위해 2028년까지 110억달러(약 15조원)를 현지 철강 시설 등에 투자하기로 트럼프 정부에 약속했다. 신규 제철소 건설에 관한 투자 역시 2028년까지 개시할 예정이다. 트럼프 임기 만료인 2029년 이전까지 미국 시장 진출을 확정 짓겠다는 초강수다.

일본제철이 약속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미국 정부에 US스틸의 황금주 1주를 무상 지급한다. 의결권은 없으나, 단 한 주만으로도 회사 안건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주식이다. 일본제철의 경영전략이 미국 정부의 뜻과 다를 경우 언제든 이를 뒤집을 수 있는 카드를 넘겨준 것이다.

본사 소재 역시 펜실베니아 피츠버그에 그대로 유지한다. CEO를 포함한 핵심 경영진도 미국인으로 두고, 미국 공장에서의 철강 생산과 공급 능력도 일정 수준 이상 유지한다. 소유권은 일본제철에 있더라도 미국 정부의 입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협상 조건이다.

내수 성장 기대 접고 해외 노린다

일본제철이 이런 ‘큰 출혈’까지 감수하면서 US스틸 인수에 집중한 이유는 ‘리스크 극복’에 있다.

중국산 철강 공급과잉, 보호무역주의 확산, 트럼프의 철강 관세 등 향후 직면한 리스크가 만만치 않으리란 시선이다. 여기에 자국 내수 수요도 점차 둔화되며 실적 악화를 피할 수 없게 됐다.

일본제철이 지난 5월 9일 발표한 2026년 3월기(2025년 4월~2026년 3월) 실적 예상치에 따르면, 연결 순이익은 2000억엔(약 1조8755억원)으로 전기 대비 43% 감소할 전망이다. 5년 만의 최저 수준으로 시장 예상치를 약 60% 하회한다.

이미 일본제철의 2025년 3월기 순이익 역시 전기 대비 36% 감소한 3502억엔을 기록한 바 있다. 2020년대 들어 코로나 19와 글로벌 통상 환경 악화로 지속적인 하락세에 접어든 것이다.

일본 내수 철강산업은 이미 성숙산업으로 분류되는 만큼, 더이상 시장 확대를 기대하기에도 힘든 상황이었다.  

타개책으로 꺼내든 것이 해외 진출이다. 미국과 인도에 새로운 생산 거점을 두면서 해외 판로를 다각화 하겠다는 포석이다. 세계 3위 철강 소비국으로 고급강 수요가 많은 미국과, 2위 철강 소비국으로 사회간접자본 등 대규모 인프라 건설용 철강재 수요가 많은 인도에 집중 중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제철이 일본을 축으로, 인도와 미국 등 세 개 시장을 ‘철의 트라이앵글’로 만들려 한다”고 해석했다. 

이런 일본제철의 미국 진출 거점으로 낙점된 게 US스틸이다. 쇠락했지만 주요 생산 설비를 갖추고 있는 US스틸을 인수하면서 조강생산량을 대폭 늘리고, 글로벌 3위권을 바라본다는 전략이다. 더불어 자동차 강판 수요가 많은 미국 시장에 새로운 판로를 확보하겠다는 심산도 있었다.

비싼 ‘미국의 자존심 값’…출혈 감내한 일본제철, 웃는 트럼프

US스틸 인수로 글로벌 철강기업 청사진을 그리고 있던 일본제철이지만, 상상치도 못한 복병을 만났다. 

미국 정부의 반발이 예상 이상으로 심각했다. US스틸이 단순 철강사가 아닌 ‘미국 산업화의 자존심’이란 사실을 간과했다.

US스틸은 올해로 설립 124년째 되는 미국 제조업의 상징이다.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와 존 피어몬트 모건이 설립한 이래 미국 산업 발전사와 발자국을 나란히 해왔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일본과 한국의 저렴한 인건비와 국가 차원 철강업 육성에 밀려 현재는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다.

2023년 12월. 일본제철이 US스틸과 인수합병 합의하자, 바이든 정부가 퇴짜를 놓기 시작했다. “국가 안보와 매우 중요한 공급망에 위험을 초래한다”는 이유다.

일본제철은 당시 미군의 연간 철강 수요가 국내 생산량의 3%에 불과하다는 점, 국가 안보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US스틸 이사회의 대다수를 이중 국적이 아닌 미국 시민권자로 구성하겠다는 점 등을 거론하며 바이든 정부 설득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이런 기조는 트럼프 정권 들어서도 유지됐는데,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US스틸 매각으로 얻는 실익과는 별개로 흔들릴 유권자 표심을 의식한 결과다.

결국 인수 무산 시 위약금 5억6500만달러(약 7801억원)을 물어야 할 일본제철로서는 미국 행정부에게 인수 허가의 명분을 주기 위해 ‘상당한 이권’을 양보해야 했던 셈이다.

이는 보호무역주의를 강조하며 외국산 철강에 50%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는 트럼프에게도 나쁘지 않은 방향이었다. 마침 철강 품목관세 시행 이후 국내 유통 열연강판 가격이 40% 가까이 치솟는 등, 철강 경쟁력 제고보다 부작용을 먼저 감내해야 할 처지였다.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를 최종 승인하면서 이권을 챙기고. 미국 내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게 된 배경이다.

일본제철의 현지진출, 한국 영향은?

이번 US스틸의 미국 진출 가속화로 국내 철강업계는 더 큰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

이미 미국의 철강 품목관세가 기존 25%에서 50%로 강화된 마당에 미국 현지 시장에서도 새로운 경쟁자가 생긴 모양새다.

당장 단기적 생산 능력부터 차이날 전망이다. 일본제철은 이미 가동 중인 US스틸을 인수하는 만큼, 소규모 물량이라도 즉시 현장 생산 가능하다. 반면 한국은 현재 미국 현지 제철소 생산 계획만 잡혀 있어 실제 생산 돌입까지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전망이다. 여기에 일본제철의 신규 제철소까지 추가된다면 본격적인 현지 경쟁구도가 심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현대제철은 지난 3월 루이지애나주에 270만톤 생산능력의 전기로 일관 제철소를 신설한다고 밝혔다. 투자 금액만 58억달러(약 8조74억원)에 달한다. 현대차그룹 다른 계열사들과 협력해 미국 현지에 철강부터 자동차 완제품까지 이르는 밸류 체인을 구상 중이다. 다만 해당 제철소의 상업 생산 시점이 2029년인 만큼 일본제철보다 빠르게 시장을 선점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양국 철강업계의 핵심 판매 제품이 고부가가치 제품이라는 점도 잠재적 걸림돌이다. 특히 일본 도요타는 미국 내 자동차 판매 2위, 한국 현대자동차는 4위를 차지한다. 양국 주력 철강 제품의 시장 점유율 확대가 현지 진출 전방산업과의 연계 측면에서도 중요하다는 방증이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과 일본은 중국의 철강 덤핑과 미국의 고율 관세 때문에 더 이상 중저가형 철강 제품으로 수익을 내기 힘들어진 상태”라며 “고부가가치 시장에서 본격적인 경쟁 구도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일본제철의 핵심 생산 라인업은 자동차 강판보다 동일본제철소 등을 중심으로 한 판재, 형강, 강관 등”이라며 “일본제철이 미국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한다면 자동차 강판 등 고급강 제품에서 중장기 경쟁이 심화되겠지만, 당장은 일본제철로서도 준비할 게 많기에 단기 경쟁 부담은 크지 않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현대제철 당진제철소 전경. 사진=현대제철
현대제철 당진제철소 전경. 사진=현대제철

실제로 일본제철은 이제 인수 초기 단계일 뿐, 갖춰야 할 점이 많다. 노후 설비 해결이 대표적이다. 유럽의 CBAM(탄소국경조정제도) 등 철강업계에도 친환경·탄소중립 요구가 강해지고 있다. 일본제철 역시 US스틸을 단순히 미국 내수용 철강사로만 내버려두지 않고, 수출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해선 노후 설비의 최신화와 친환경화가 반필수적이다.

현대제철이 현지 철강사 인수가 아닌 ‘전기로’ 일관제철소를 처음부터 건설하려는 이유와 맞닿아 있다. 고로보다 탄소저감이 용이한 전기로를 도입해 원료부터 제품까지 일관 공정을 갖춘 일관 제철소를 완성해 고부가가치와 친환경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전략이다.

실제로 일본제철의 110억달러+α 투자 내역에는 미국내 전기강판 및 자동차용 고강도 강 등 고급강 수요 확대 대응, 전기로 기반 탈탄소 생산 역량 강화, 친환경 철강 공동 R&D 등이 포함돼 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다.

또한 한국은 철강업계뿐만이 아닌 관련 산업이 대거 미국 현지에 진출한다는 점에서 경쟁력을 지닌다

대표적으로 현대제철이 건설 예정인 일관제철소는 자동차강판 특화 제철소다. 미국 시장 진출에 가속도를 내고 있는 현대자동차와 시너지를 만들겠다는 전략이다. 현대차그룹은 조지아주에 xEV 전용 공장 ‘메타플랜트 아메리카’를 짓고 2024년 10월부터 아이오닉5를 양산 중이다. 아이오닉9와 제네시스, 기아 차량도 이곳에서 생산될 예정이다. 현대차그룹은 향후 미국 연간 현지 생산 120만대를 목표로 잡았다.

현대제철 관계자는 “트럼프 리스크만 겨냥해 대응한다면 일관제철소를 친환경 설비로 지을 필요는 없으나, 그룹 자동차 사업의 전반적 탄소중립과 결부해 탄소 저감 공정 도입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투자했다”고 설명했다.

현대차그룹은 글로벌 보호무역주의가 점차 확산되는 만큼, 트럼프 정부 이전부터 극복 방안을 다양하게 검토해 왔다. 미국 제철소 건설 목표 역시 단순 일본과 시장 점유율 경쟁 및 철강 판로 확장에만 있지 않다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