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이 단행하고 있는 '리밸런싱'은 선제적인 전략 수정이 아닌, 그룹의 존립을 건 위기 대응의 결과물이다. 

시작은 위기다. 배터리 자회사 SK온의 심각한 재무 위기에 따라 그룹 전체의 부채 급증과 유동성 압박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SK그룹은 위기를 극복하는 것을 넘어 포트폴리오의 급진적 단순화, '양적 팽창'에서 AI·배터리·반도체(ABC) 중심의 '질적 성장'으로의 전환, 그리고 대규모 자본 재배치로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액션플랜은 일사분란하다. SK이노베이션과 SK E&S의 합병, SK스페셜티와 같은 핵심 자산 매각,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한 천문학적 투자 등 과감한 조치가 실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최창원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의 주도 아래 과거의 분권화된 '따로 또 같이' 문화에서 벗어나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제와 실행력을 강조하는 새로운 경영 체제도 들어서고 있다. 

리밸런싱의 초기 성과로 부채 감소 등 재무 건전성 지표는 일부 개선됐다는 평가다. 다만 SK온의 근본적인 턴어라운드와 대규모 자산 매각의 성공 여부 등 중대한 실행 리스크는 여전히 남아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사진=연합뉴스
최태원 SK그룹 회장. 사진=연합뉴스

'서든데스'의 절박함 "위기에 직면한 거대 기업"
리밸런싱의 서막은 2023년 말 최태원 회장이 7년 만에 다시 꺼내 든 '서든데스(돌연사)'라는 경고에서 시작됐다. 이는 그룹 전반에 만연한 방만한 투자와 비효율적 경영에 대한 최고 경영진의 날카로운 문제의식의 표출로 여겨진다.

실제로 2024년 초 기준 SK그룹의 계열사 수는 219개로, 경쟁 그룹인 삼성(63개), 현대차(70개)를 압도했다. 최창원 의장이 "이름도 다 알지 못하고 관리도 안 되는 계열사가 많다"고 지적할 정도로 통제 범위를 벗어난 상태였다. 전기차 충전 사업에 SK㈜, SK E&S, SK네트웍스 등 다수 계열사가 중복으로 뛰어든 것이 대표적 비효율 사례다.

재무 건전성은 벼랑 끝에 몰렸다. 그룹 전체 합산 차입금은 100조 원을 돌파했고, 지주사 SK㈜의 부채는 3년 반 만에 41.5% 급증했다. 이자 비용 부담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위기의 중심에는 배터리 자회사 SK온이 있었다. 2021년 분사 이후 10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한 SK온은 그룹의 자본을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지난 3년간 무려 20조 원이 투입됐고 2024년에도 7조 5000억 원의 추가 투자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결국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반도체 특수가스 세계 1위 기업인 SK스페셜티와 같은 초우량 자산 매각 결정이 내려졌다. SK온의 막대한 자금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풀이된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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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로 핵심을 재정의하다
SK그룹은 성장 전략의 무게 중심을 기존 'BBC(바이오·배터리·반도체)'에서 'ABC(AI·배터리·반도체)'로 옮겼다. 그룹의 역량을 집중할 전략적 우선순위를 재정립했음을 의미한다.

특히 AI는 그룹 전략의 최종 목적지이자 모든 사업을 통합하는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했다. SK하이닉스가 HBM(고대역폭메모리)을 공급하고(업스트림), SK텔레콤이 데이터센터 인프라를 구축하며(미드스트림), 다양한 AI 서비스를 개발(다운스트림)하는 완결된 가치사슬 구축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질적 성장'으로의 전환은 최태원 회장이 강조해 온 '딥 체인지(Deep Change)'의 구체적인 실행으로 평가된다. 현재의 재무 위기를 해결하기에 바이오 사업의 현금 창출력은 부족한 반면, SK하이닉스가 주도하는 AI 반도체는 그룹의 가장 강력한 경쟁력이자 핵심 현금 창출원이다. 결국 그룹의 가장 성공적인 부문을 활용해 가장 어려운 부문의 회생을 지원하는 현실적이고 전략적인 선택인 셈이다.

당장 재무구조 개선과 미래 투자 재원 확보를 위한 자산 매각은 리밸런싱의 핵심 축이다.

SK스페셜티 매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반도체용 특수가스(WF6 등) 분야 세계 1위이자 안정적인 현금 창출 능력을 자랑하던 SK스페셜티를 사모펀드 한앤컴퍼니에 약 2조 7000억 원에 매각한 것은 이번 리밸런싱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통적인 포트폴리오 조정이 아닌, SK온의 긴급 자금 수혈을 위해 '알짜 자회사'까지 내놓은 비상 조치에 가깝다. 고수익의 안정적 사업을 포기하고 배터리라는 고위험 사업에 명운을 걸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SK렌터카 및 비주력 자산 정리도 주효했다. SK네트웍스가 SK렌터카를 8200억 원에 매각한 것은 단순히 현금을 확보하는 것을 넘어, 회사의 정체성을 'AI 중심 사업형 지주회사'로 전환하기 위한 전략적 행보로 봐야 한다. 이는 그룹의 ABC 전략에 맞춰 각 계열사가 핵심 사업 위주로 포트폴리오를 재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SK실트론·SKIET 매각 추진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웨이퍼 제조사인 SK실트론(기업가치 최대 5조 원)과 분리막 자회사 SKIET(지분가치 약 1조 5천억 원) 매각은 대규모 실탄 확보의 핵심이지만 이들 매각은 '실행 리스크'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SK실트론은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자산이며, SKIET의 기업가치는 최대 고객사인 SK온의 성공에 깊이 연동되어 있어 제값을 받기 어려운 딜레마가 있다. 매각의 성공 여부가 리밸런싱 전체의 자금 계획에 중대한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SK이노베이션 & SK E&S 합병은 시너지 창출을 위한 리밸런싱이다. 당장 자산 105조 원의 '에너지 거함'으로 재탄생한 통합 SK이노베이션은 이번 리밸런싱의 하이라이트다. 핵심 목표는 SK E&S의 연 1조 원대 안정적 현금흐름을 통해 SK온의 재무 불안정성을 해소하고 대규모 투자를 뒷받침하는 것이며 나아가 정유(SK이노베이션), LNG(SK E&S) 등 기존 화석연료 사업과 수소, 신재생에너지, 배터리를 아우르는 '에너지 전환 종합 솔루션 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장기적 포석도 깔려 있다.

장용호 총괄사장 부임 후 SK이노베이션은 SK엔무브를 완전 자회사로 편입, 이 과정에서 자사주를 활용한 교환사채 발행 방식을 택해 리밸런싱 자체에 힘을 주는 장면도 눈길을 끈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 제도 도입 전 자사주를 적극 활용하면서 현금 여력을 높이고 중복 상장 논란까지 피하는 일석삼조의 전략이다. 이 과정에서 SK온과 SK엔무브의 합병설도 나오는 중이다.

SK에코플랜트의 수직계열화도 비슷한 결이다. 실제로 업계에서는 SK에코플랜트가 반도체 소재 자회사 4곳을 흡수한 것은 시너지 창출의 모범 사례로 평가한다. 기존의 반도체 공장 건설(EPC) 역량에 산업가스 공급(SK에어플러스), 핵심 소재 생산, 폐기물 재활용(SK테스)까지 통합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SK하이닉스 등 고객사에게 공장 설계부터 소재 공급, 운영, 재활용까지 전 주기에 걸친 '원스톱 솔루션'을 제공하는 종합 서비스 기업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SK텔레콤이 T커머스(T-commerce) 사업 자회사 SK스토아 경영권 매각을 추진하는 것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매각 주관사로는 삼일PwC를 선정했다는 설명이다.

최창원 수펙스 의장이 이천포럼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최창원 수펙스 의장이 이천포럼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턴어라운드 나오나
성과는 고무적이다. 먼저 SK온의 벼랑 끝 턴어라운드가 이뤄지고 있다. 

SK온은 생산 수율 안정화, 비용 구조 개선 등 운영 효율화에 사활을 걸고 2024년 3분기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SK E&S와의 합병으로 재무적 숨통을 틔운 만큼, 이제는 지속 가능한 흑자 구조를 만드는 것이 과제라는 분석이다. 장기적으로는 알짜 자회사인 SK엔무브와의 합병을 통한 우회상장 가능성 등 다각적인 생존 전략이 모색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여전히 그룹의 심장이자 성장 엔진이다. 그룹 리밸런싱의 재정적 기반을 제공하는 '중앙은행'이자 전체 전략의 '린치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HBM 시장의 압도적 지배력은 80조 원 규모의 AI 투자 계획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아로 평가된다. 총 120조 원이 투입될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와 차세대 HBM 기술 리더십 유지는 그룹의 미래가 걸린 과제며, SK하이닉스의 독보적인 존재감은 그룹 리밸런싱에 맞춰 더 입체적인 가능성 타진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다만 SK스퀘어는 갈 길이 멀다. 산하 부실 자회사들이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11번가는 수천억 원대 누적 적자로 매각에 난항을 겪자, 외형 성장을 포기하고 수익성 개선을 통해 '매력적인 매물'로 거듭나는 전략으로 선회했으며 이는 생존을 위한 처절한 체질 개선에 나선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웨이브는 단순 매각 대신 경쟁사 티빙(CJ ENM)과의 합병을 선택했다. 매각이 어려운 사업은 통합을 통해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고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는, 리밸런싱의 실용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사례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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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리더십, 시장의 평가는?
균형 전문가 최창원 의장의 등장은 SK 고유의 '따로 또 같이' 문화에서 벗어나,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제와 실행력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로 평가된다. 나아가 2025년 정기 임원인사에서 기술·현장 전문가를 대거 전진 배치한 것 역시 이러한 전략적 변화를 명확히 보여준다.

리밸런싱의 효과로 그룹 순차입금과 부채비율은 개선되는 추세이며, 시장 역시 중장기적 재무구조 개선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SK그룹의 리밸런싱은 실질적인 위기에 대한 대담하고 시의적절한 대응으로 평가된다. 포트폴리오 단순화, 중앙집권적 통제, 핵심 역량 집중이라는 전략 방향은 타당하며 부채 감축 등 초기 성과 역시 긍정적이다.

하지만 앞으로 해결해야 할 중대한 과제들도 남아있다. 무엇보다 SK실트론, SKIET 등 대규모 자산 매각이 계획대로 성사될지는 미지수이며, 배터리 사업의 지속 가능한 흑자 전환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미중 무역 갈등과 같은 지정학적 변수와 내부적인 문화 변화의 어려움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SK실트론 사익 편취' 의혹과 관련해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SK가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받은 과징금 부과 처분에 대한 취소가 확정되는 등 몇몇 사법 리스크가 걷히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아직은 더 지켜봐야 할 것들이 많다.

결론적으로 SK그룹은 '서든데스'의 급박한 위기는 성공적으로 넘겼다. 그러나 '위대한 재편'의 장기적인 성공은 복잡한 자산 매각 및 투자 계획을 얼마나 정교하게 실행하는지, 그룹의 핵심 수입원인 SK하이닉스의 독주가 계속될 수 있는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과제인 배터리 사업을 성공적으로 본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