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네이버가 'AI 주권(Sovereign AI)'이라는 독자 노선을 선언하며 세계 무대에 도전장을 던졌다. 

7년 만에 경영 전면에 복귀한 이해진 창업자의 지휘 아래 자체 개발한 초거대 AI '하이퍼클로바X'를 심장으로 삼아 기존 서비스 생태계를 혁신하는 '온서비스 AI'와 특정 문화권에 최적화된 AI를 수출하는 '소버린 AI'라는 투트랙 전략을 시도하는 중이다.

여기에 최근 이재명 정부의 100조 원 규모 '국가대표 LLM' 프로젝트가 공식화되면서, 네이버의 이러한 행보는 거대한 기회의 장을 맞이하고 있다.

사진=네이버
사진=네이버

두 개의 탑, 기술 독립과 생태계 강화
네이버의 AI 전략은 두 개의 강력한 탑 위에 세워져 있다. 

첫째는 '소버린 AI' 철학이다. 각 국가가 자국의 언어, 문화, 가치에 기반한 AI를 통해 기술적, 문화적 독립을 이뤄야 한다는 비전이다. GPT-4보다 6500배 많은 한국어 데이터를 학습한 하이퍼클로바X는 이 철학의 결정체로 한국의 역사와 사회적 맥락에 대한 깊은 이해도를 자랑한다는 설명이다. 

이해진 의장의 복귀는 이 비전을 가속하기 위한 '전시 상황' 돌입 선언으로 해석되며, 소버린 AI는 기술 독립을 넘어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이 AI 자립을 모색하는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핵심 외교 및 수출 전략으로 기능하고 있다.

두 번째 기둥은 '온서비스 AI' 전략이다. 네이버가 보유한 검색, 커머스, 콘텐츠 등 막강한 플랫폼 생태계 전반에 AI를 깊숙이 통합해 수익성을 극대화하는 전략이다. 

이미 AI 기반 개인화 광고 및 커머스 부문은 2024년 1분기 실적 성장을 견인하는 등 가시적인 성과를 낸 상태다. 업무용 협업 도구 '웍스 AI'의 이메일 초안 작성 기능이나 네이버 쇼핑의 'AI 큐시트 헬퍼'도 마찬가지다.

그 범위는 조금씩 넓어져 이제 검색 전반의 AI 전략 투영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막대한 사용자 기반을 활용해 AI 투자의 수익률(ROI)을 신속하게 증명하고, 새로운 AI 네이티브 제품 개발에 따르는 위험을 최소화하는 현실적인 접근법으로 평가된다.

네이버의 사우디 진출. 사진=네이버
네이버의 사우디 진출. 사진=네이버

'하이퍼클로바X'와 반도체 동맹
네이버 AI의 기술적 근간인 하이퍼클로바X는 특히 한국어와 문화 중심의 평가에서 글로벌 모델들을 압도하는 성능을 입증했다. 한국형 LLM 평가 벤치마크인 'KMMLU'에서 GPT-3.5나 Gemini-Pro를 능가했으며, 이순신 장군의 표준 영정을 정확히 인식하는 등 한국 특화 지식 부문에서는 GPT-4를 앞서는 모습을 보였다는 설명이다.

약점은 있다. 특히 범용 다국어 능력에서는 일부 약점을 보여 초고도화된 전문성과 광범위한 일반화 능력 사이의 트레이드오프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네이버는 모델 크기를 40% 줄이면서 성능은 강화하고 운영 비용은 50% 절감하는 등 효율성 중심으로 이 문제를 풀어나가고 있으나 아직은 더 지켜봐야 한다.

한편 네이버는 여세를 몰아 AI의 '두뇌'인 반도체 확보를 위해 '탈(脫)엔비디아'를 목표로 한 다각적 동맹을 구축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비용 절감을 넘어 공급망 안정성과 기술 주권 확보를 위한 전략적 행보다. 인텔의 '가우디' 칩 생태계 구축을 위한 공동 연구센터(NICL) 설립, AI 반도체 스타트업 '퓨리오사AI'에 대한 D2SF의 초기 투자 등은 특정 공급사에 종속되지 않으려는 네이버의 정교한 포트폴리오 전략을 보여준다.

반도체 동맹의 핵심 목표는 LLM 추론 단계에서 발생하는 GPU의 고비용·고전력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네이버클라우드는 인텔과 소프트웨어-하드웨어 공동 설계에 착수, 하이퍼클로바X의 토큰 처리 구조 등 핵심 데이터를 공유하고 인텔은 이를 기반으로 최적화된 연산을 수행하는 반도체를 구현하는 전략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

이를 통한 연산 배치와 파이프라인 최적화를 통해 LLM 운영 비용의 급격한 절감이 기대된다. 

네이버클라우드가 경량화된 AI 연산에 특화된 자체 '저전력 IP(지식재산) 솔루션' 개발에 직접 나선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이는 단순 질의응답이나 요약처럼 고성능 연산이 필요 없는 기능들을 GPU 없이 저비용으로 처리해 기업 및 공공 고객의 클라우드 AI 서비스 평균 단가를 획기적으로 낮추기 위함이다. 이처럼 자체 솔루션과 외부 협력을 병행하는 전략은 외산 GPU 의존도를 낮추고, 저렴하면서도 최적화된 AI 컴퓨팅을 제공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네이버와 엔비디아의 만남. 사진=네이버
네이버와 엔비디아의 만남. 사진=네이버

중동 넘어 동남아로 향하는 '소버린 AI'
네이버의 글로벌 AI 야망은 중동을 넘어 동남아시아로 빠르게 확장되며 '소버린 AI' 수출 전략의 성공 가능성을 입증하고 있다.

그 첫 번째 쇼케이스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비전 2030'에 발맞춰 가장 구체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지난 5월 28일 사우디 국영주택공사(NHC)와 전략적 합작법인(JV) '네이버 이노베이션' 설립 계약을 완료한 것이 단적인 사례다.

이 법인은 네이버의 중동 거점 '네이버 아라비아' 산하에서 지도 기반 '슈퍼앱' 구축을 핵심으로 1억 달러 규모의 디지털 트윈 플랫폼 구축 등 기존 사업과 연계해 사우디의 스마트시티 전환을 주도한다.

네이버의 '소버린 AI' 전략은 최근 동남아시아로도 확장되며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태국의 대표 AI 기업 '시암 AI 클라우드'와 태국어 기반 LLM 및 AI 에이전트 공동 개발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이번 협력은 대만에서 열린 엔비디아 클라우드 파트너 행사에서 공식화되었으며, 이는 네이버가 엔비디아와 '소버린 AI'에 대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사업 모델을 구체화한 첫 결실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시암 AI는 태국 총리의 외사촌이 대표를 맡고 있으며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사업 추진에 강력한 동력을 확보한 것으로 평가된다. 네이버는 LLM 구축 경험을, 시암 AI는 방대한 태국어 데이터와 GPU 인프라를 활용해 우선적으로 수요가 높은 관광 특화 AI 에이전트를 선보이고, 향후 헬스케어·공공 등 다양한 산업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특히 협약식에는 이해진 의장과 최수연 대표가 직접 참석했으며, 대만 엔비디아 오피스에서 젠슨 황 CEO와 별도 미팅을 갖고 소버린 AI와 데이터센터 사업 확장 방안을 논의하며 동남아 시장 공략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100조 원 규모 '국가대표 LLM' 프로젝트 노린다

이재명 대통령 당선으로 국내 플랫폼 업계의 시선은 그의 핵심 공약인 '국가대표 거대언어모델(LLM)' 개발 사업에도 쏠리고 있다. AI 분야 100조 원 투자를 공언한 이 대통령은 국가 주도로 LLM을 개발해 오픈소스로 제공하고, 이를 통해 민간의 다양한 AI 서비스 출시를 유도하겠다는 구상이다. 

공약의 핵심이 'AI 주권' 확보인 만큼, 정부가 발주하고 민간 기업이 수주하는 사업 방식이 유력하며, 오픈AI 등 해외 기업보다는 국내 기업과의 협업에 무게가 실린다.

이 거대 프로젝트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네이버가 꼽힌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LLM을 공개한 기술력과 방대한 한국어 데이터는 물론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와 손잡고 현지 LLM을 구축한 '소버린 AI' 사업 수행 경험은 다른 경쟁자가 갖지 못한 압도적인 강점이다.

경쟁도 치열할 전망이다. KT는 통신사로서 보유한 인프라와 자체 LLM '믿음'을 앞세워 수주에 나설 것으로 보이며, LG AI 연구원 역시 상용화된 '엑사원' 모델과 LG유플러스의 AI 에이전트 '익시'의 성공적 안착을 발판으로 경쟁에 참여할 가능성이 높다. 이미 네이버와 KT는 현대차그룹 자회사 포티투닷의 GPUaaS 사업을 나란히 수주하는 등 데이터센터 시장에서 격돌한 바 있어, 국가 LLM 사업을 두고 또한번의 대결이 불가피하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최근 네이버클라우드가 '무늬만 국산 소버린 AI를 경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밝혀 사실상 MS와 협력한 KT를 저격한 가운데, 두 기업의 격돌에 시선이 집중된다.

풀어야 할 숙제도 있다

네이버의 AI 전략은 거침없고 선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담대한 비전과 새로운 기회 뒤에는 냉정한 재무적 현실도 있다. 

특히 네이버의 R&D 투자 비중은 2024년 기준 매출의 17.3%로, 과거 20%를 상회하던 기조에서 다소 감소했으며, AI 인프라에 천문학적 자본을 쏟아붓는 미국 빅테크들과 비교하면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이는 AI 경쟁력에 대한 일부 투자자들의 우려로 이어지며 주가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1분기에는 AI 관련 인건비와 마케팅 비용 증가로 영업이익 성장에도 불구하고 순이익이 감소하는 등 전형적인 '투자 사이클'의 초기 단계를 지나고 있다. 네이버는 한국은행과의 B2B 계약 등을 통해 2025년 2분기부터 AI 부문의 본격적인 수익 창출을 기대하고 있으나, 투자 대비 성과를 입증해야 하는 압박은 계속될 전망이다.

여기에 공정거래위원회의 AI 데이터 수집 관행 조사 등 강화되는 규제 환경과, 카카오 등 국내 경쟁자와의 치열한 시장 다툼도 네이버가 헤쳐나가야 할 파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