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충격과 재생에너지 확대에 대한 장밋빛 전망 속에 탈원전의 거센 물결이 전 세계를 휩쓸었다으나 지금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에너지 안보에 대한 절박함, 탄소 중립 목표 달성의 시급성과 더불어 재생에너지의 간헐성 및 공급 불안정이라는 현실적 한계가 부각되며 원자력 발전의 역할이 극적으로 재조명받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태양광 패널 등 재생에너지 공급망을 특정 국가(중국)가 장악하는 상황에 대한 견제 심리도 일부 국가들의 에너지 정책 선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프랑스의 강력한 원자력 드라이브, 영국의 야심찬 확장 계획, 미국의 '원자력 르네상스' 선언, 심지어 탈원전을 선언했던 독일의 미묘한 입장 변화까지 감지된다.

당장 북유럽과 동유럽 국가들도 에너지 자립과 탈탄소화를 위해 원자력 도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으며, 소형모듈원자로(SMR)를 비롯한 차세대 기술은 원자력의 미래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중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미국 '원자력 르네상스' 선언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25일(현지시간) 원자력 산업 기반 활성화 등 4개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원자력 르네상스'를 공식 선언, 미국의 에너지 지형에 중대한 변화를 예고했다. 

행정명령에는 에너지부(DOE)가 설계를 마친 신규 대형 원자로 10기를 2030년까지 건설하고, 2050년까지 원자력 발전 용량을 현재의 4배로 확대하는 야심 찬 목표가 담겼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등 첨단 산업에 필요한 안정적인 대규모 전력 공급을 위해 원자력이 최선의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이제는 원자력 시대"라며 "이것은 미국을 '진짜 파워'로 다시 만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원자력 발전을 미국 에너지 우위, 경제 재활성화, 국가 안보의 핵심 초석으로 삼겠다는 비전을 공식화했다. 침체된 자국 원자력 산업을 부활시켜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중국 및 러시아 등 경쟁국들에 대한 미국의 기술적·산업적 리더십을 재확립하려는 '미국 우선주의' 의제 연장선이다.

원자력규제위원회(NRC)의 대대적인 개혁이 지시됐다. 신규 원전 허가 결정을 18개월 이내로 단축하고, 마이크로리액터 및 SMR의 신속 인허가 경로 마련 등이 주요 내용이다. 더그 버검 내무부 장관은 이를 "원자력 산업에 대한 50년 이상의 과도한 규제 시계를 뒤로 돌릴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NRC의 독립성 훼손 및 안전 기준 약화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고 있으나 '원자력 산업 기반 재활성화' 행정명령을 통한 우라늄 채광·변환·농축·고순도 저농축 우라늄(HALEU) 생산 등 핵연료 주기 전반의 국내 역량 강화와 사용후핵연료 재처리·재활용 방안 모색도 추진된다. 나아가 행정명령에는 차세대 원자로 개발 및 배치 가속화를 위해 실험용 원자로 시험 관련 규제를 완화하고, 군사 기지 및 AI 데이터센터를 포함한 연방 부지에 원자로 건설을 허용하며 단기 배치가 가능한 기술에 자금 지원을 우선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프랑스 "원자력 종주국 부활"

프랑스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2022년 발표한 원자력 부흥 계획을 재확인하며 원자력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2025-2035년 신규 에너지 로드맵(PPE)이 대표적이다. 원자로 폐쇄를 요구했던 과거 정책에서 벗어나 에너지 독립을 강화하고 증가하는 저탄소 전력 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전략적 전환을 명확히 했다.

주목할 점은 전력 시장 시스템의 변화다. 2025년 말 규제된 원자력 전기 요금인 ARENH 메커니즘이 종료되고, 국영전력회사 EDF의 초과 이익에 세금을 부과하고 장기 계약(CAPN)을 도입하는 '탈-ARENH 시스템'으로 전환된다. 이는 EDF에 시장 기반 가격 결정권을 부여하는 동시에 소비자 보호와 수익 안정성을 도모하려는 조치다. 

신규 원전 건설 자금은 국채와 차액결제계약(CfD)을 통해 조달되며 현재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의 승인을 앞두고 있다. 프랑스 국민의 원자력 지지도는 5대 1로 압도적이며, 에너지 독립이 주요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프랑스의 이러한 전환은 원자력 경제 모델의 중대한 재조정으로 성공 여부는 프랑스의 에너지 미래뿐 아니라 다른 원전 보유국에도 중요한 참고 사례가 될 전망이다. 과거 ARENH는 저렴한 전기료(MWh당 42유로)를 제공했지만 비판 속에 종료 수순을 밟고 있으며, 새로운 시스템은 EDF의 재정적 실행 가능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소비자 부담을 최소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설명이다.

영국, 야심찬 확장 노린다

영국은 2024년 민간 원자력: 2050 로드맵을 발표하며 2050년까지 최대 24GW의 원자력 발전 용량 확보라는 야심찬 목표를 세웠다. 

노동당 정부 역시 원자력의 중요성을 재확인하며 정책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신규 프로젝트 추진을 위해 영국원자력청(GBN)이 설립되었으며, 2025년 말 발표될 새로운 국가정책성명(NPS EN-7)은 SMR 및 첨단모듈형원자로(AMR)를 포함하고 기존 부지를 넘어선 유연한 부지 선정을 허용할 예정이다.

현재 힝클리 포인트 C와 사이즈웰 C 프로젝트가 추진 중이다. 다만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디언 등에 따르면 현재 힝클리 포인트 C는 상당한 건설 지연과 비용 초과 문제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사이즈웰 C에 적용될 규제자산기반(RAB) 모델은 건설 기간 중 소비자에게 비용을 전가할 수 있어 논란이 있으며, 심각한 기술 격차 해소도 시급한 과제다.

쉽게 말해 기술 격차를 따라잡기 어렵다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영국은 대형 원자로 건설과 SMR 도입이라는 이중 전략을 통해 기저부하 전력 확보와 비용 효율성 증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하고 있다. 영국의 원자력 확장 의지에 시선이 집중되는 이유다.

독일, 탈원전에서 실용으로

독일은 2023년 4월 공식적으로 원자력 발전 단계적 폐지를 완료한 바 있다. 탈원전의 모범사례로 여겨졌다. 

최근에는 미묘한 변화가 감지된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 하에서 원자력을 녹색 및 저탄소 기술로 취급하는 것에 대한 오랜 반대를 철회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EU 녹색 분류체계와 관련해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실용적인 조치로 해석된다.

다만 현 상황에서 아직은 정중동이다. 자국 내 원자력 발전으로의 복귀는 여전히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25년 연립 정부 협약에는 원자력 에너지가 명시적으로 빠져 있으며, 폐쇄된 발전소 재가동이나 국내 SMR 추진 계획은 없다. 그런 이유로 독일의 최근 전향적 움직임은 EU 내 현실 정치와 관계 개선을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보인다.

독일 원전. 사진=연합뉴스
독일 원전. 사진=연합뉴스

북유럽 및 동유럽도 "원자력 열망"
스웨덴 의회는 최근 전력 가격 안정화와 장기 에너지 안보 확보를 위해 최대 5000MW 규모의 신규 원자력 프로젝트에 대한 국가 지원 프레임워크를 승인했다. 정부 보증 대출과 차액결제계약(CfD)을 통한 금융 지원이 핵심이며 국민들의 지지율도 매우 높다.

폴란드는 석탄 의존에서 벗어나기 위해 2036년경 첫 원자력 발전소 가동을 목표로 총 6기의 원자로(6~9GWe) 건설을 계획 중이다.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AP1000 노형이 선정되었으며 약 150억 달러의 정부 자본 투입, 국가 보증, CfD 등 강력한 금융 지원책이 마련되었다. 폴란드 국민의 차세대 원자력 지지율은 조사 대상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벨기에 역시 5월 2기 원자로의 수명을 2045년까지 연장하고 신규 원전 건설을 허용하는 법안을 채택하며 2003년의 단계적 탈원전 정책을 공식적으로 폐기했다. 이 외에도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 등 다수 동유럽 국가들이 기존 원전 운영과 함께 추가 건설을 적극 검토하고 있으며, 특히 루마니아는 미국 SMR 배치의 핵심 파트너로 부상하고 있다.

이들의 친원자력 행보는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 탈피, 산업 탈탄소화 요구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서방 원자력 공급업체들에게 새로운 시장을 열어주고 있다는 평가다. 다만 막대한 국가 재정 지원이 필수적이라는 점과 EU의 국가 지원 승인 여부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원자력 르네상스가 올까?

각 국가들이 원자력 로드맵을 공격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나 문제는 막대한 자금 조달이다. 실제로 IEA는 신속한 원자력 성장을 위해 2030년까지 연간 투자 필요액이 현재의 두 배인 12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공급망 확보와 인력 양성 또한 시급한 문제다. 특히 러시아산 농축 우라늄 의존도는 심각한 위험 요소로 공급망 다변화가 절실하다. 마치 특정 국가가 태양광 패널 공급망을 장악한 것과 유사한 지정학적 리스크다. 그 정도로 핵연료 공급망의 자립과 다변화는 에너지 안보의 핵심 과제로 부상했다. 여기에 숙련된 원자력 전문 인력 부족은 원전 확장을 추진하는 모든 국가의 공통된 고민거리다.

이를 고려할 때 소형모듈원자로(SMR)가 답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최대 300MWe급으로 비교적 크기가 작고 공장에서 제작되어 현장 조립이 가능한 SMR은 확장성과 유연성, 향상된 안전성을 바탕으로 차세대 원자력 기술의 총아로 떠오르고 있다. 짧은 건설 기간, 낮은 초기 자본 투자, 단계적 용량 증설이 가능해 금융 비용 부담을 덜 수 있으며 원격지나 특정 산업단지(공정열, 수소 생산, 데이터센터 등) 맞춤형 에너지 공급원으로도 주목받는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80개 이상의 SMR 설계가 개발 중이다. 미국 기업들이 선두를 달리는 가운데 중국, 러시아, 한국, 유럽이 경쟁에 가세하고 있다.

성과는 나오고 있다. 미국 뉴스케일파워의 SMR은 서방 세계 최초로 규제기관의 설계 인증을 획득했으며, 유럽 최초의 SMR은 2029년 루마니아에 건설될 예정이다. 더 나아가 4세대(Gen IV) 원자로는 핵연료 효율을 극대화하고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양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기술로 기대를 모은다.

다만 SMR의 경제적 타당성은 또 다른 문제다. 공장 제작과 표준화된 설계를 통한 연속 생산의 경제 달성에는 의문부호가 달리기 때문이다. 대규모 공장 투자를 정당화할 만큼 충분한 초기 주문 물량 확보가 필수적이지만 아직 검증되지 않은 첫 호기(FOAK) SMR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 유치가 어려워 선순환의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결국 정부의 적극적인 위험 완화 정책과 수요 통합 노력이 SMR 상용화의 관건이 될 전망이다.

나아가 러시아가 전 세계 HALEU 생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과, 사용후핵연료 재활용 및 재처리에 대한 기술적 접근에도 관심이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