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덴마크, 벨기에, 스웨덴 등 유럽 각국이 탈원전 정책을 잇달아 폐기하고 원자력 발전으로 회귀하는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도 지난 23일(현지시간) 원자력 산업 기반 활성화 등 4개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원자력 르네상스'를 공식 선언했다.
행정명령에는 미국 에너지부(DOE)가 설계를 마친 신규 대형 원자로 10기를 2030년까지 건설하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고, 2050년까지 원자력 발전 용량을 현재의 4배로 확대하는 야심 찬 목표가 담겼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등 첨단 산업을 위한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필수적인 상황에서 원전이 최선의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행정명령 서명식에서 "이제는 원자력 시대"라며 "우리는 오늘 엄청난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을 '진짜 파워'로 다시 만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아가 '원자력 르네상스'라는 기치를 내걸고, 원자력 발전을 미국 에너지 우위, 경제 재활성화, 국가 안보의 핵심 초석으로 삼겠다는 비전을 공식화했다.
침체된 자국 원자력 산업을 부활시켜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려는 의도도 담고 있다. 실제로 펜실베이니아에 본사를 둔 대표적인 원전 기업 웨스팅하우스는 1970~80년대 전성기 직원이 5만 명을 넘었으나 현재는 1만 명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행정부는 이번 정책이 중국 및 러시아 등 경쟁국들에 대한 미국의 기술적·산업적 리더십을 재확립하려는 '미국 우선주의' 의제의 핵심 요소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왜 원자력인가?
트럼프 행정부가 원자력 부활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배경에는 세 가지 주요 동기가 자리 잡고 있다.
첫째, 에너지 자립을 통한 국가 안보 강화다. 특히 핵연료 분야에서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 국방물자생산법(DPA) 발동까지 검토하며, 우라늄 채광부터 농축까지 핵연료 주기 전반의 국내 역량 강화를 위한 행정명령이 내려졌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에너지 안보가 곧 국가 안보"라며 군사 시설 및 AI 데이터센터 등 핵심 인프라에 대한 무중단 전력 공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둘째, AI 시대를 맞아 급증하는 전력 수요에 대응하고 경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함이다. AI 데이터센터는 24시간 안정적인 고신뢰성 전력을 필요로 하며, 간헐적 에너지원인 재생에너지만으로는 이를 충족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컨스텔레이션 에너지의 조셉 도밍게즈 CEO는 "하이퍼스케일러(대규모 데이터센터 운영 기업)들이 AI 구동을 위해 원자력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고 언급했다. 행정부는 원자력 산업 확장을 통해 "수만 개의 고임금 일자리" 창출과 대규모 민간 투자 유치를 기대하고 있다.
ICT 업계에서도 비슷한 주장은 나온 바 있다.
실제로 워너 보겔스 AWS 부사장 겸 CTO는 지난 12월 AWS 리인벤트 현장에서 <이코노믹리뷰>와 만나 에너지 효율성 시대를 맞아 원자력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는 "산업 전반에 걸치 생성형 AI의 광범위한 채택으로 컴퓨팅 파워에 대한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데이터 센터가 에너지를 소비하는 방식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며 현재 미국 데이터 센터만 해도 전국 전력의 4%를 소비하고 있으며, 향후 5년 동안 9%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나아가 "레거시 인프라에서 벗어나 하이퍼스케일 데이터 센터로 전환해야 한다"면서 "이를 통해 효율성 향상과 규모의 경제를 통해 에너지 소비를 거의 25%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소형 모듈형 원자로(SMR)에 관심이 집중되는 배경이다. 이미 아마존은 미 버지니아주 에너지 기업인 도미니언 에너지와 소형 원자로 개발을 위한 계약을 체결했다. 도미니언은 이미 버지니아에 있는 아마존의 452개 데이터 센터에 약 3500㎿(메가와트)의 전기를 공급하고 있다.
이번 계약으로 기존 도미니언의 원전 인근에 SMR 개발을 추진하기로 했다. 아마존은 이를 통해 300㎿ 이상의 전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나아가 워싱턴주에 위치한 공공 전력 공급 기업인 에너지 노스웨스트와도 계약을 체결하고, 노스웨스트의 4개 소형모듈원전 건설사업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들 원자로는 초기에 약 320㎿의 전력을 생산하고, 이후에 총용량을 960㎿로 늘릴 계획이다.
구글도 미국 스타트업 카이로스 파워가 향후 가동하는 SMR의 에너지를 구매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구글은 앞으로 카이로스가 가동하는 6∼7개 원자로에서 총 500㎿의 전력을 구매하기로 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도 미국 원자력발전 1위 기업인 콘스텔레이션 에너지와 20년간 전력 구매 계약을 체결했다. ‘챗GPT의 아버지’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는 2027년 가동을 목표로 한 소형모듈원전 개발사 오클로에 투자 중이다.
셋째, 지정학적 필요성과 미국 리더십 재확립이다. 2017년 이후 전 세계적으로 신규 건설된 원자로의 87%가 러시아 및 중국 설계에 기반한다는 점에 대한 위기감이 작용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러한 추세를 반전시키고 미국 원자력 기술 및 전문 지식 수출을 적극 장려하여 동맹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한편, 경쟁국의 잠재적인 산업 통제를 저지하겠다는 구상이다.
한편 트럼프 행정부는 원자력 산업 부흥을 위해 일련의 구체적인 행정명령과 정책 조치를 발표했다.
먼저 원자력규제위원회(NRC)의 대대적인 개혁을 지시했다. AP통신에 따르면, 신규 원자력발전소 허가 결정을 18개월 이내로 단축하고, 기존 방사선 피폭 모델 재검토, 마이크로리액터 및 소형모듈원자로(SMR)의 신속 인허가 경로 마련 등이 주요 내용이다. '에너지 차르'로 불리는 더그 버검 내무부 장관은 "이번 조치는 원자력 산업에 대한 50년 이상의 과도한 규제 시계를 뒤로 돌릴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산업계는 규제 지연 해소에 대한 기대를 나타내고 있지만, NRC의 독립성 훼손 및 안전 기준 약화에 대한 비판과 우려도 나온다.
국내 원자력 산업 기반 및 핵연료 주기 재건에도 총력을 기울인다. '원자력 산업 기반 재활성화' 행정명령을 통해 우라늄 채광·변환·농축·고순도 저농축 우라늄(HALEU) 생산 등 핵연료 주기 전반의 국내 역량 강화, 사용후핵연료 재처리·재활용 방안 모색 등을 추진한다.
차세대 원자로 개발 및 배치 가속화에도 박차를 가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특히 내년 7월 가동을 목표로 하는 3기의 새로운 실험용 원자로 시험과 관련한 규제를 완화하는 행정명령에도 별도로 서명했다.
에너지부(DOE)의 시험 절차를 간소화하고, 이들 시범 원자로를 포함해 2026년 7월 4일까지 최소 3기의 신규 원자로 가동을 목표로 하는 프로그램이 추진된다. 군사 기지 및 AI 데이터센터를 포함한 연방 부지에 원자로 건설을 허용하고, 단기 배치가 가능한 기술에 자금 지원을 우선한다.

원자력 시대가 오나
원자력 정책은 트럼프 1기(2017-2021) 당시 수립된 정책 기조를 계승하고 더욱 강화한 형태다. 이러한 정책 전환은 미국 내 경제, 기술, 규제, 환경 등 다방면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원자력 관련 기업들의 주가 급등 등 투자 증가 기대감과 함께, 높은 프로젝트 비용, 세제 혜택 불확실성 등 재정적 생존 가능성에 대한 도전 과제도 상존한다. 특히 NRC 개혁을 둘러싼 안전성 논쟁과 핵폐기물 처리, 우라늄 채광 과정에서의 환경 문제는 뜨거운 감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국제적으로는 글로벌 원자력 시장 재편, 핵 비확산 체제에 대한 영향 등이 예상된다. 미국의 공격적인 원자력 수출 전략이 영향력 확대에 기여할 수 있지만, 비확산 기준 완화 시 국제적인 핵 안보 환경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다만 전문가들은 2050년까지 원자력 발전 용량 4배 증설이라는 목표 달성이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한다. 현재 상업 가동 중인 차세대 원자로가 없고, 과거 대형 원전 건설 사례에서 막대한 비용 초과와 공기 지연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브레이크스루 연구소는 친원자력 인사들의 존재와 NRC 현대화 등은 긍정적이지만, 구체적인 정책 실행 방안 부재와 트럼프 대통령의 예측 불가능성을 불확실성 요인으로 꼽았다. 반면 원자력 과학자 회보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이 납세자와 공공 안전에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