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젠가는 갚아야 할 부채이긴 한데 만기가 10년 이상 길고 변제 순위가 후순위라면, 이같은 채권을 발행함으로써 유입된 돈을 기업의 고유 자금으로 볼 수 있을까?
롯데손해보험이 후순위채 조기상환 콜옵션 행사를 유보한 이후, 채권 시장과 보험업계에서의 파장이 작지 않다. 이같은 자본성증권의 제도적 효용성과 감독기준의 실효성 등 여러 면을 살펴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보험사의 새 회계기준(IFRS17) 도입 이후 경영자의 재량권과 역할을 강조하는 '원칙주의 회계'가 안착화되는 과정과 맞물려 롯데손보 후순위채 문제는 더욱 주목을 받았다. 이와 관련한 원인, 쟁점, 해결법을 짚어봤다. <편집자주>
롯데손해보험이 후순위채 조기상환(콜옵션)을 사실상 포기하면서 보험업계 전반은 물론 채권시장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겉보기에는 한 보험사의 개별 결정처럼 보이지만, 자본성 증권에 과도하게 의존해온 보험업계의 구조적 취약성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는 점에서 파장은 더욱 커지고 있다.
특히 킥스(K-ICS) 비율이 금융당국의 권고 기준선에 근접한 중소형 보험사들은 비슷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우려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번 사태는 보험사의 자본조달 전략에 경고음을 울리는 동시에, 변화한 금융당국의 감독 기조에 업계가 어떻게 대응해 나갈지에 대한 고민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킥스 150% 턱걸이 보험사 잇따라..."자본 건전성 빨간불, 롯데손보만의 문제 아냐"
롯데손해보험은 최근 금융감독원에 후순위채 조기상환을 보류하고 구체적인 자본확충 방안을 마련해 제출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금감원이 "롯데손보의 지급여력비율(킥스, K-ICS)이 150%를 크게 밑도는 상황에서 계약자 보호 측면상 적절하지 않다"며 제동을 건 데 따른 것이다.
킥스는 보험사의 자본 건전성을 평가하는 지표로, 보유자본을 요구자본으로 나눈 비율이다. 금감원은 최소 기준으로 100%를, 감독상 권고 기준으로는 150%를 제시하고 있으며, 이 기준을 넘지 못할 경우 경영개선 권고 등 제재가 이뤄질 수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롯데손보는 지난해 말 기준 킥스 비율이 154.6%를 기록했지만, 올해 3월 말 기준으로는 127.4%까지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무·저해지보험 해지율에 원칙모형을 적용한 결과로, 감독당국이 제시한 권고 기준인 150%를 크게 밑도는 수치다.
롯데손보 측은 "자본 확충을 위한 여러 방안을 검토 중이며, 하반기 중 자본확충을 실행해 후순위채 조기상환 일정을 확정하겠다"고 밝혔다.
금감원은 롯데손보의 후순위채 조기상환 보류와 관련해서 구체적인 자본확충 방안을 기다리고 있다는 입장이다. 이세훈 금감원 수석부원장은 15일 현안 브리핑에서 "롯데손보도 주주와 협의해 구체적인 계획을 설립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당국과 긴밀히 협의해 이른 시간 안에 정상화될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고 말했다.
5년 관행 깨진 후순위채 조기상환...시장 '술렁'
후순위채는 일반 채권보다 변제 순위가 낮아 파산 시 원금·이자 회수가 어려운 대신, 높은 금리를 제공하는 것이 특징이다. 회계상으로는 부채로 분류되지만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자기자본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 보험사에서 킥스 비율 관리의 주요 수단으로 활용돼왔다. 실제, 보험업계의 자본성 증권 발행 규모는 2022년 13조1800억원에서 지난해 21조7000억원으로 크게 증가하기도 했다.
후순위채의 만기는 통상 10년 이상이지만, 국내 채권시장에서는 통상적으로 콜옵션(조기상환)을 통해 5년 만기 시점에 맞춰 조기상환 되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롯데손보의 콜옵션 보류는 금융 시장에 적잖은 충격을 안겼다. 자본성 증권의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크게 흔들린 것이다.
실제, 롯데손보의 제8회 후순위채는 조기상환 보류 소식 직후 수익률이 급등하며 가격이 급락했다. 2일 1만118원이던 채권 가격은 12일 9809원까지 하락했고, 같은 기간 평가수익률은 3.3%에서 6.39%로 뛰었다. 유통금리는 민간채권사 4곳의 평균 평가금리(민평금리) 대비 70bp 이상 높게 형성되며 투자자들의 불안 심리를 반영했다.
한국기업평가 관계자는 "이번 사례로 자본성 증권의 조기상환 지연 가능성에 대한 경각심이 커졌다"며 "킥스 비율이 낮은 보험사는 투자 수요 위축으로 발행이 어렵거나, 높은 금리를 감수해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킥스 기준 강화와 경과조치 종료로 대체 자본조달 수단이 부족한 보험사는 자본성 증권 확충이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킥스 규제 턱걸이' 보험사들 지본확충 '비상'
이번 사태는 단순히 롯데손보 한 곳의 문제가 아니라, 보험업계 전반이 자본성 증권에 과도하게 의존해온 구조적 리스크를 드러냈다는 분석도 나온다. 킥스 기준을 간신히 웃도는 보험사들이 다수 포진해 있는 상황에서, 유사한 사례가 반복될 경우 자본 조달 시장의 불안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많은 보험사들은 킥스 비율 유지를 위해 후순위채와 같은 자본성 증권에 의존해왔다. 문제는 금리 인하기에 이 같은 구조가 자본 조달의 어려움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금 조달이 필요한 보험사의 입장에서 보면, 금리 인하 국면에서 후순위채 발행은 여러 제약에 부딪힌다. 낮은 금리로는 투자자들의 관심을 끌기 어렵고, 그렇다고 높은 금리를 제시하자니 자본 조달 비용이 크게 늘어난다.
반면, 과거 고금리로 발행된 후순위채는 금리 인하로 인해 조기상환 시점에 더 많은 자금을 들여 상환해야 한다는 부담이 커진다. 조기상환이 어려워지면 시장 신뢰가 흔들리고, 이는 다시 신규 자본성 증권 발행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렇듯, 자본성 증권에 의존하는 방식은 금리와 시장 상황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조달 여건이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롯데손보 사태는 이러한 구조적 한계가 실제 위기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이처럼 자본성 증권의 구조적 한계가 드러난 가운데, 유사한 상황에 놓인 보험사들도 안심할 수 없는 처지다. 실제, 킥스 비율이 150%를 가까스로 넘는 보험사로는 푸본현대생명(157.3%), KDB생명(158.2%), 동양생명(155.5%), ABL생명(153.7%), 현대해상(157%), 하나손보(154.9%), 캐롯손보(156.2%) 등으로 다수 존재한다. 보험업계에서는 이들 역시 자본 확충에 대한 대응 전략을 강화하지 않으면, 추후 롯데손보와 유사한 리스크에 직면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롯데손보 사태 이후 후순위채 발행을 앞둔 보험사들은 물론, 이미 발행해 상환 시점을 앞둔 곳들까지 모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자본성 증권을 새로 발행하더라도 시장에서 매력적인 상품으로 인식되지 않아 판매 자체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킥스 비율이 높은 보험사는 굳이 후순위채에 의존할 이유가 없고, 비율이 낮은 보험사는 금리 부담과 투자 수요 위축으로 발행이 더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롯데손보의 상황을 두고 "현실적으로 유상증자나 사모 전환 등 기본자본 중심의 확충 외에는 뚜렷한 해법이 없는 상황"이라며 "이번 사례는 과거 흥국생명이 조기상환 포기를 선언했던 것과는 또 다른 양상으로, 롯데손보는 상환 의지를 밝혔음에도 당국이 제동을 건 사례라는 점에서 업계 혼란이 더 크다"고 덧붙였다. 특히 "대주주가 사모펀드인 롯데손보는 유상증자 시 기존 주주의 참여 가능성이 낮아, 현실적으로 자본 확충 여건이 매우 제한적인 '사면초가'에 몰려 있다"고 진단했다.
'기본자본' 늘려라...'질 좋은 자본' 요구 커져
금감원은 자본 건전성 강화를 위해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방식의 자본 확충을 강조하고 있다. 금감원은 롯데손보 사태에 대해 "발행 요건만 충족된다면 콜옵션 행사를 막을 이유는 없다"고 밝혔지만, 실질적으로는 유상증자 등 기본자본 중심의 직접적인 확충을 우선 고려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보험업계는 당국의 이 같은 방향성에 주목하고 있다. 자본성 증권에 대한 시장 신뢰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감독당국의 기조마저 기본자본 확충 쪽으로 전환될 경우, 일부 보험사들은 자본 확충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보험업계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보험사들이 킥스 비율을 맞추기 위해 후순위채 등 자본성 증권에 지나치게 의존해온 현실이 우려스럽다"며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작년 금리 하락기에는 보험사들이 주로 후순위채를 통해 자본을 확충했지만, 이는 결국 언젠가는 상환해야 하는 부채에 불과하다"며 "자본비율을 단기간 높이는 데는 효과가 있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자본의 질을 다양화하고 시장 충격에 견딜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최근처럼 시장 환경이 조금만 악화돼도 상환 여건이 크게 나빠지는 만큼, 보다 견고한 자본관리 전략이 요구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유상증자 등 기본자본 중심의 확충 방식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작동하기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공동재보험, 계약이전, 파생상품 확대 등 다양한 제도적 수단이 보험개혁회의를 통해 마련되었고, 최근에는 만기 30년 국채선물처럼 자본 확충을 위한 새로운 수단들도 도입됐지만, 아직은 시장에서 활발히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공동재보험은 보험사가 계약자의 위험을 다른 보험사들과 함께 나누는 방식으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위험 분산을 가능하게 해준다. 계약이전은 특정 보험사의 계약을 다른 보험사로 이전해 책임을 넘기는 방식이며, 파생상품 확대는 금리·환율 등 금융시장 리스크를 분산해 자본 부담을 줄이는 데 활용된다. 이 같은 제도들은 보험사 입장에서 자본 확충의 다양한 우회로가 될 수 있지만, 제도 자체가 아직 활성화되지 않았고 시장의 신뢰도도 낮아 실효성 확보에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그는 "자본 확충을 위한 우회로는 마련돼 있지만, 아직 제도 활용도가 낮고 시장의 신뢰도도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다"며 "과거보다 선택지는 늘었지만, 실효성 있는 대안으로 정착하려면 업계와 당국 간 보다 긴밀한 조율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롯데손보가 대주주가 사모펀드라는 특성상 유상증자에 제약이 있다는 상황에 대해서는 "사모펀드가 대주주라는 이유로 자본 확충을 포기한다면 그 자체가 문제"라며 "회사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시간을 두고 지급여력비율을 회복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당국에도 충분한 준비 기간을 요청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타포괄손익누계액(팔지 않고 보유 중인 주식 채권의 시세 변동과 같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회계상 기록되는 손익) 감소 완화 등 유상증자 외의 보완책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며 "롯데손보만의 문제가 아닌 만큼, 유사한 상황에 있는 여타 보험사들도 함께 기본자본 관리를 위한 계획을 수립해 나가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