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13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 방문을 계기로 양국 간 약 6000억 달러(약 850조 원)에 달하는 전략적 경제 동반자 협정이 체결됐다. 백악관이 "역사적이고 변혁적인 합의"라고 평가한 이번 협정은 단순한 경제 협력을 넘어 양국 관계의 심층적인 발전을 예고하며 중동의 지정학적 지형에 큰 파장을 몰고 올 전망이다.

한국의 경우 에너지 시장 전반의 큰 그림을 살피는 한편 공급망 다변화 로드맵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과 빈 살만 왕세자가 악수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과 빈 살만 왕세자가 악수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석유-안보 동맹' 넘어 다층적 파트너십으로 진화
1933년 석유 채굴권 협정으로 시작된 미-사우디 관계는 1945년 루스벨트 대통령과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국왕의 USS 퀸시 함상 회담을 통해 '석유-안보'라는 상징적 초석을 다졌다. 이후 양국은 세계 에너지 안보와 역내 안정에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며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공고히 해왔다.

바이든 행정부 시절, 그 돈독한 관계가 삐걱인 적은 있다. 언론인 살해사건 및 글로벌 인플레이션 논란을 거치며 양국의 스텝이 서로 얽혔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며 이러한 분위기는 크게 달라졌다. 최근 사우디가 추진 중인 '비전 2030'까지 탄력을 받으며 양국의 협력이 더욱 탄탄해지는 중이다. 특히 협정에서 중요하게 거론된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첨단 기술 분야에 대한 강조는 '비전 2030'의 목표와도 정확히 일치한다. 

과거 '석유-안보'라는 거래적 관계에서 벗어나 기술, 관광, 첨단 제조업 등 새로운 경제 축을 구축하려는 사우디의 변화와 이 과정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보하고 중국의 역내 확장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전략적 이해가 맞물린 결과로 풀이된다.

협정 톺아보기

이번 협정은 국방, 에너지, 첨단 기술 등 광범위한 분야를 아우른다.

먼저 국방 및 안보 협력 분야에서는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인 약 1420억 달러의 방산 판매 계약이 체결됐다. 다수의 미 방산업체가 참여하여 첨단 항공기 도입을 통한 공군력 증강 및 우주 역량 강화가 포함된다는 설명이다.

RTX(구 레이시온), 록히드 마틴 등 주요 기업이 관여할 가능성이 있는 첨단 방공 시스템 및 미사일 방어 체계 구축도 중요한 부분이다. 해상 및 해안 안보 강화를 위해 해군 함정 현대화와 해안 감시 시스템 도입이 추진되며, 국경 안보 및 지상군 현대화를 위해 국경 감시 시스템, 장갑차 등 지상군 장비 현대화도 진행될 예정이다. 

정보통신 시스템 분야에서는 C4ISR(지휘, 통제, 통신, 컴퓨터, 정보, 감시 및 정찰) 시스템 업그레이드와 사이버 안보 역량 강화가 이루어지며, 이와 함께 미 국방부 및 관련 계약업체들이 사우디군을 대상으로 한 광범위한 훈련 프로그램, 군수 지원, 사관학교 및 군 의료 서비스 개선 등 제도 발전을 지원하게 된다. 사우디의 F-35 전투기 구매 가능성도 논의되었으나 이스라엘의 질적 군사 우위(QME) 유지라는 변수가 남아있다. 이 모든 국방 협력은 총 1420억 달러 규모의 패키지의 일환으로 추진된다.

에너지 분야에서는 사우디 기업 데이터볼트(DataVolt)가 미국 내 AI 데이터센터 및 에너지 인프라에 200억 달러를 투자하고, 미국 내 배치, 일자리 창출 및 혁신을 목표로 하는 50억 달러 규모의 에너지 투자 펀드가 조성된다. 

GE 버노바(GE Vernova)는 사우디에 142억 달러 규모의 가스터빈 및 에너지 솔루션을 수출할 예정이다. 나아가 양국 에너지 부처는 에너지 인프라 혁신, 개발, 자금 조달 및 배치에 협력하며, 특히 재생 에너지(태양광, 수소) 분야와 탄소 포집·활용·저장(CCUS) 기술 협력에 중점을 둔다. 사우디 민간 원자력 발전 산업 건설을 위한 미국 지원 논의도 진행 중이며, 이는 사우디의 에너지 다변화와 미국의 대중국·러시아 견제 의도가 맞물려 있으나 핵확산에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첨단 기술 및 AI 협력 분야에서는 구글, 데이터볼트, 오라클, 세일즈포스, AMD, 우버 등 양국 기업들이 변혁적 기술 분야에 총 800억 달러를 공동 투자하기로 약속했다. 

사우디는 2024년부터 2025년까지 AI, 데이터센터, 클라우드 서비스(AWS,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클라우드, 오라클, 그로크 등) 분야에서 130억 달러 이상의 미국 기술 투자를 유치할 계획이다. 특히 엔비디아는 사우디 국부펀드가 소유한 AI 스타트업 휴메인(Humain)과 파트너십을 맺고 신규 데이터센터 프로젝트에 최신 AI 칩을 공급하며 미국 기술 기업(애플, 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대규모 디지털 인재 양성 및 미국 대학(MIT, 스탠퍼드 등)과 협력한 우수 연구센터 설립도 추진된다.

미국 빅테크 입장에서는 '잭팟'이다.

이 외에도 인프라 분야에서는 미국의 힐 인터내셔널, 제이콥스, 파슨스, AECOM과 같은 기업들이 사우디의 주요 메가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약 20억 달러 규모의 서비스 수출에 기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항공우주 분야에서는 보잉이 사우디 아비리스(AviLease)에 48억 달러 규모의 737-8 여객기를 공급하고, 50억 달러 규모의 신시대 항공우주 및 국방 기술 펀드가 조성되며, NASA와 사우디 우주청 간의 아르테미스 II 임무 관련 협력도 이루어진다. 헬스케어 분야에서는 샤메크 IV 솔루션즈(Shamekh IV Solutions, LLC)가 미시간 주에 58억 달러 규모의 IV 수액 시설을 설립할 예정이며 스포츠 분야에서는 40억 달러 규모의 엔필드 스포츠 글로벌 스포츠 펀드가 조성되는 등 다양한 경제 및 기술 투자가 이루어질 계획이다.

사우디에서 열린 미래투자 이니셔티브. 사진=연합뉴스
사우디에서 열린 미래투자 이니셔티브. 사진=연합뉴스

미국의 '빅딜'… 이란 견제·중국 의식
이번 협정은 트럼프 행정부의 실용주의적 중동 정책 기조를 반영한다. 특히 이란의 역내 영향력 확대에 대한 공동 대응 의지가 강력하게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대규모 방산 판매는 사우디의 대이란 억지력 및 방어 능력 강화를 목표로 하며, 미국 주도의 역내 안보 구상과도 연결된다.

또한 미국은 에너지, 기술 분야 등에서 중동 내 영향력을 확대하는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의도도 분명히 하고 있다. 사우디와의 원자력 및 AI 기술 협력은 해당 분야에서 중국 등의 진입을 차단하고 미국 중심의 기술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이란과의 긴장 속에서 자체 방어 능력 강화, '비전 2030'을 통한 경제 변혁, 그리고 미·중 등 강대국 사이에서 실리를 추구하는 '다자 정렬(multi-alignment)' 외교 전략의 일환으로 이번 협정에 적극적으로 임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번 협정은 양국 모두에게 상당한 경제적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은 대규모 투자 유치와 일자리 창출, 수출 증대, 방위 산업 강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사우디는 경제 다각화, 기술 이전, 인프라 현대화, 군사력 증강 등을 통해 '비전 2030' 달성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우디의 인권 문제, 무기 판매가 지역 분쟁에 미칠 영향, 핵확산 우려 등은 여전히 비판의 목소리가 높은 부분이다. 과거 대규모 계약의 이행률이 낮았던 점, 트럼프 대통령 개인 사업과의 연관성 논란 등도 잠재적 위험 요소로 지적된다. 특히 첨단 AI 기술 이전은 미국의 기술 우위와 안보에 대한 전략적 위험을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브래들리 보우만 FDD 연구원은 "이번 협정이 미국 국방 산업 기반을 강화하고 이란에 대항하는 지역 안보 구조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서도 "워싱턴은 리야드의 베이징 및 모스크바와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주시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협정의 야심찬 규모만큼 실행 과정에서의 관료적 장애물, 사우디의 흡수 능력, 유가 변동성 등 현실적인 난관도 예상된다.

한국도 의식해야

미-사우디 간 밀착 강화는 국제 질서 및 한국 경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에너지 시장 안정 가능성은 긍정적이지만, 사우디의 에너지 전환이 장기적으로 글로벌 공급망에 미칠 변화도 주시해야 한다. 중동 역내 긴장 고조 가능성은 에너지 안보 및 지정학적 안정에 민감한 한국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특히 기술 및 인프라 분야에서 미-중 경쟁이 중동으로 확산되면서, 한국은 주요 교역국이자 동맹국인 미국과 최대 교역국인 중국, 그리고 주요 에너지 공급원이자 건설 시장인 사우디 사이에서 균형 잡힌 외교 전략을 펼쳐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됐다. 

미국의 기술 동맹 강화 움직임 속에서 한국 기업들은 새로운 경쟁 구도와 기술 표준 문제에 직면할 수 있으며, 편승 압박 또는 수출입 통제 강화 등의 어려움에 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이번 협정이 가져올 새로운 시장 기회와 함께 심화될 경쟁 구도 및 지정학적 복잡성을 면밀히 분석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