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5일 오전(현지 시각)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총회 참석차 방문한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호텔에서 기자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출처=한국은행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5일 오전(현지 시각)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총회 참석차 방문한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호텔에서 기자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출처=한국은행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지난 1월과 3월에 이어 이달에도 기준금리를 3회 연속 동결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압박에도 연준이 금리 인하에 신중한 태도를 보인 가운데 이달 말 예정된 한국은행의 통화 정책 방향에 시장의 관심이 쏠린다. 시장에서는 한은이 큰 이변이 없는 한 오는 29일 금리를 낮출 거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미 연준은 지난 6~7일(현지 시각) 열린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 기준금리를 현 수준인 연 4.25~4.50%로 유지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현재 2.75% 수준인 우리나라와의 금리 차는 상단 기준 1.75%포인트(p)로 유지됐다.

연준은 정책금리를 지난해 9월 0.50%p, 11월 0.25%p, 12월 0.25%p씩 잇달아 낮춘 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처음 열렸던 1월 FOMC부터 세 차례 연속 동결했다.

그동안 트럼프 대통령은 파월 의장을 향해 ‘미스터 투 레이트(Mr. Too Late·의사결정이 매번 늦어진다는 뜻)’, ‘루저(loser)’라고 비판하는 등 금리 인하를 압박해 왔다.

트럼프 대통령과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 등이 금리 압박을 지속하는데도 연준이 올해 들어 5개월 가까이 기준금리를 유지한 이유는 정책의 불확실성 때문이다. 연준은 관세 인상에 따른 수입 물가 상승과 경기 하강(고용 불안) 가능성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연준은 이날 성명에서 “경제 전망에 대한 불확실성이 더 커졌다”며 “실업률과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 더 높아질 위험이 커졌다”고 진단했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도 관세 정책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좀 더 명확해질 때까지 금리 인하를 서두르지 않겠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파월 의장은 “우리는 관세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좀 더 명확해지길 기다리는 동안 우리의 정책금리가 좋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라면서 “(금리 인하를) 서두를 필요가 있다고 느끼지 않고 인내하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미국 국민의 이익을 위해 고용 극대화와 물가 안정을 촉진하기 위해 우리가 가진 수단을 쓸 것”이라며 “경제 지표와 전망, 위험 균형이 우리가 고려하는 것의 전부”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에도 통화 정책 결정은 정치적 고려 없이 원칙대로 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기준금리 인하에 신중한 미국 연준과 다르게 한은의 금리 인하 기대감은 커지는 상황이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는 지난달 기준금리를 연 2.75%로 동결했지만, 올해 경제 성장률이 2월에 하향 조정한 1.5%에도 못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하며 이달 금리 인하를 예고했다.

지난달 24일 발표된 1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전기 대비 0.2% 감소하면서 한은이 지난 2월 제시한 전망치(+0.2%)를 큰 폭 밑돌았다. 연간 성장률 전망치인 1.5%도 달성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면서 이달 금리 인하 전망에 무게가 실렸다.

지난달 금통위에서 금융통화위원 6명 전원이 3개월 이내 기준금리 인하 가능성을 열어 둔 점도 5월 인하 기대감을 높이는 요인이다.

이창용 한은 총재도 최근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총회 참석차 방문한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기자들에게 “기준금리를 내린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라”면서 “경기 상황에 따라 금리를 충분히 낮출 것”이라고 밝혔다.

한은이 금리 인하에 나설 수 있는 여건은 갖춰졌다는 평가다. 원·달러 환율은 최근 1300원대에 진입해 안정세를 찾았다. 4월 소비자물가 상승률도 2.1%를 기록하며 최근 4개월 연속 한은의 물가 관리 목표치인 2.0%대를 유지하고 있다. 인플레이션 압력이 완화된 만큼 금리 인하에 따른 외환시장 충격도 과거보다 크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시장에서는 당초 예상보다 올해 한은의 금리 인하 횟수가 더 늘어날 거라는 예상도 나온다. 미국발 관세 전쟁의 강도가 예상보다 높고 추가경정예산(추경) 등 경기 부양을 위한 재정 정책의 집행 시기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금리라도 일단 더 낮춰야 소비와 투자에 숨통이 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올해 2월과 5월, 상반기 두 차례 인하로 올해 통화 완화 기조가 끝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지만, 이제 하반기 인하까지 포함해 ‘연내 3회 이상’이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로 거론된다.

이 총재는 밀라노에서 금리 인하 폭과 횟수와 관련한 질문에 “(연내 인하 횟수를 늘려 금리를 더 낮출 필요가 있는지) 5월 경제 전망 때 성장률이 얼마나 낮아지는지 보고 판단해야 할 것”이라고 답했다. 경기 부양을 위한 ‘빅컷(0.5%p 인하)’ 여부도 경제 데이터를 보고 결정하겠다는 원론적 입장을 밝혔다.

가계부채 증가세와 한미 금리차 확대는 금리 인하의 부담 요인이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전 금융권 가계대출은 지난달 5조원 이상 늘어난 것으로 추산된다. 한미 금리차가 커지면 외국인 투자 자금이 빠져나가고 원화 가치가 떨어질 위험이 있다. 원화 약세로 원‧달러 환율이 오르면 수입 물가 상승과 함께 국내 인플레이션 압력도 확대된다.

한은은 미국 연준의 통화 정책을 지켜보며 신중하게 대응할 방침이다. 유상대 한은 부총재는 8일 오전 ‘시장상황 점검회의’를 열고 “간밤 FOMC 결과가 시장 예상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국제금융시장이 대체로 안정세를 보였다”라며 “향후 금융·외환시장 변동성이 언제든지 확대될 수 있는 만큼 경계감을 가지고 시장 상황을 면밀히 점검해 나갈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