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뭐든 100번의 설명보단 한 번의 체험이 낫다. 항공 병력 훈련도 마찬가지다. 전투기도 실제로 조종하면서 훈련하고, 정비도 기체를 뜯어 보면서 연습해야 숙련도가 쌓인다. 다만 현실적인 여건을 고려하면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가 이런 공군의 고민 해결사로 나서고 있다. 실제 전투기 조종 환경을 99% 구현한 시뮬레이터와, 메타버스 공간에서 전투기를 직접 해체해 볼 수 있는 전자식 기술교범(IETM)을 개발하고 현업에 접목 중이다.
“어릴 적 꿨던 조종사의 꿈”…T50 시뮬레이터 직접 탑승해 보니
지난 4월 11일 KAI 사천공장을 방문해 시뮬레이터와 IETM을 직접 체험해 봤다. 취재는 핑계. 청소년기 내심 꿈꿔봤던 파일럿의 기분을 잠깐이라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괜히 설렜다.
준비된 T50 훈련 시뮬레이터를 탑승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실감난다. 설명을 담당한 강효석 M&S사업3팀 수석은 “실제 군 훈련기인 T50의 조종석을 그대로 구현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일까. 조종사 평균에 맞춰 좌석이 조정되어 키가 작은 기자로선 브레이크 페달이 다소 멀게만 느껴졌다. 이런 디테일은 슬프다. 갑자기 조종사의 꿈도 함께 아른거렸다.
마음을 추스려봤다. 그렇게 처음 잡아본 스로틀(엔진 추력 조절 장치)는 상당히 차갑고 묵직했다. 묘한 긴장감. 대한의 영공은 내가 책임진다. 오른손을 조종간에 올린 채 스로틀을 힘껏 밀어 이륙을 시도했다. 그러나 마음같지는 않다. 단순히 활주로를 주행하는 데도 세심한 조종간 조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경고음이 울리며 활주로를 벗어날 위기에 처했다.
도망쳐야 하나. 옆에서 보다 못한 강 수석이 무언가를 대신 조작하더니, 어느새 하늘 위에 떠 있었다.
360도로 구현된 KAI 사천공장 주변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전방 화면에 구현된 헤드업 디스플레이(HUD)가 어우러져 진짜 비행 중인 것 같은 느낌을 선사했다. HUD에는 항공기 고도, 상승각, 수평까지 전부 표기돼 있어 안정적인 운항을 도왔다.

강 수석의 인도 아래 배면비행과 수직회전 등 곡예비행까지 즐겼다. 조종간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미세하게 조작해야 했는데, 이번에는 곧잘 해내며 소질 있다는 칭찬도 들었다. 내심 파일럿의 꿈을 포기하지 말 걸 그랬나 싶었다.
다만 막상 착륙 때가 되자 활주로도 제대로 못 찾고 허둥대기 시작했다. 착륙 각도도 너무 가파르게 설정해 보다 못한 강 수석이 조종간을 대신 잡았다. 본디 자동차 운전도 주차가 가장 어려운 법이거늘, 고속도로 정속주행 한 번 해보고 “운전 쉽다”고 말한 꼴이었다. 역시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법이다. 대한의 영공은 역시 파일럿들에게 맡겨야 겠다.
기자가 운항에 소질이 없던 것과 별개로, T50 시뮬레이터는 일선에서 호평받으며 각 부대에 도입되고 있다.
KAI 관계자는 “시뮬레이터 사업은 당초 고정익과 회전익을 개발하며 부가적으로 마련한 시스템에서 시작했지만, 국내에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분야가 됐다”며 “항공용, 해상용 등 용도에 맞춰 별도 사업화 됐다”고 설명했다. 시뮬레이터는 한 기당 100억원 이상을 호가한다.
실제로 시뮬레이터 존은 KAI 미래 먹거리를 담당하는 우주센터에 있었다. 단순 고정익 회전익 사업부 지원 목적으로 출발한 사업이 하나의 당당한 사업부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KAI가 전통적인 항공기 제작에서 머무르지 않고, 연관 산업들로 적극적으로 먹거리를 확장한 전략이 결실을 거두고 있는 셈이다.
“가상공간에서 원제작사 엔지니어와 정비 협업”…사업화 기대되는 IETM
종합군수지원(IPS) 사업부에서는 메타버스 공간에 구현된 KF21 전자식기술교범(IETM)을 체험할 수 있었다.
메타버스는 가상을 의미하는 ‘메타’와 현실을 의미하는 ‘유니버스’의 합성어다. 3차원 공간에 가상세계를 접목하는 개념이다. 실제로 VR 기기를 착용하자 KF21의 내부 구성 부품을 입체 화면으로 낱낱이 살펴볼 수 있었다.
이런 메타버스 IETM의 가장 큰 장점은 정비사가 기체를 해체하지 않아도 내부 부품 구조와 작동 방식을 3D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정비 효율성은 물론, 훈련 효율이 급격히 상승할 수 있다.
기자는 직접 KF21 내부무장창에 탑재되는 기총의 작동 방식을 유심히 살펴볼 수 있었다. KF21의 M61A2 발칸은 현실 연사력이 분당 6600발에 달하기 때문에 작동 방식을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반면 메타버스 IETM 화면 속에선 발사 속도를 느리게 만들고 개별 톱니가 맞물리는 것까지 관찰할 수 있었다. 단순 기계가 작동하는 것뿐 아니라, 조종간에서 발사 명령을 입력한 후 전기신호가 기총까지 도달하는 과정도 세세하게 묘사됐다. VR 조작 방식만 익숙해진다면 충분한 공부 효과를 낼 것으로 보였다.

KAI는 앞으로 메타버스 기술과 MR(가상현실+증강현실) 기술이 발전한다면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가상현실에서 원격으로 정비 지원을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조유준 지원체계개발1팀 책임연구원은 “실제 항공기 실물에 정비사가 접근해 정비를 할 때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엔지니어가 가상공간에 원격 접속해 정비 조언을 건네는 등 협업하는 개념을 연구하고, 구현 단계까지 왔다”고 설명했다.
사업화만 잘 된다면, 향후 KAI의 수출 절충교역 비용 부담 절감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개념이다.
방산수출은 통상 무기체계 구입국에서 대규모 지출을 감행하는 만큼, 절충교역 의무가 요구된다. 무기를 구매할 때 계약 상대로부터 관련 지식 또는 기술을 이전받는 등 반대급부를 제공받을 것을 조건으로 하는 교역이다. 기존에는 절충교역에 따른 기술 이전을 위해 발주처 현지에 기능공을 파견·양성해야 했지만, MR IETM을 이용하면 수주처에서 원격으로 현장 확인과 장비 유지보수가 가능해 비용 부담을 줄일 수 있다.
KAI는 오는 ADEX 2025에서도 해당 기술 시연존을 꾸며 홍보에 나설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