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이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기존의 '필요한 만큼 지원한다'는 기조에서 벗어나 전쟁의 조속한 종결을 최우선 목표로 설정하는 전략적 재평가를 단행하는 한편, 날로 격화되는 중국과의 전략 경쟁에 미국의 자원과 외교적 역량을 집중시키려는 거대한 지정학적 구상을 가감없이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강대국이 결정한다"는 냉혹한 국제정치의 큰 전략적 줄기를 따라가면서, 지금 이 순간 그 이면에 깔려있는 미중 패권전쟁의 거대한 흐름을 기민하게 파악해야 하는 이유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아시아 우선'과 종전 압박
트럼프 행정부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있어 평화 달성을 위해 미국의 영향력을 총동원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전 행정부의 가치 중심적 접근과는 확연히 다른, 국익과 비용-편익 분석에 기반한 거래적 외교로의 전환을 시사한다.

구체적으로 ▲휴전 협상 적극 추진(회담 제안, 러시아 고위급 접촉) ▲원조를 협상 지렛대로 활용(일시적 군사 원조 중단 후 재개) ▲유럽 동맹국에 방위 분담 증대 요구 등의 압박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이 "이제 아시아와 미국 국경에 우선순위가 있다"고 공언했듯, 이러한 정책 변화의 근본적인 이유는 미국의 재정적, 군사적, 외교적 역량을 중국과의 경쟁에 집중하기 위함이다.

미국의 지원 방식 또한 변화 조짐을 보인다. 과거 대규모 무상 원조(2022년 2월 이후 약 665억달러 군사 지원)와 달리, 우크라이나가 향후 지원 패키지를 구매할 준비가 되었다는 언급은 지원 형태가 무상 원조에서 차관이나 구매 방식으로 전환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는 미국의 지원이 우크라이나의 협상 태도와 연계되는 조건부적 성격을 띨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크라이나 군 전사자 명단. 사진=연합뉴스
우크라이나 군 전사자 명단. 사진=연합뉴스

유럽의 고군분투
유럽은 당황하고 있다. 미국의 달라진 접근에 '자체 역량'을 키워야 하는 급격한 변화의 순간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당장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공약을 대폭 늘리며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EU와 회원국들은 ▲수백억 유로 규모의 신규 군사 지원 약속 ▲동결된 러시아 자산 수익금 활용(G7 주도 ERA 구상, EU 자체 활용) ▲EU 우크라이나 시설(Ukraine Facility) 통한 장기 지원(2027년까지 최대 540억 달러) ▲방위 산업 기반 강화 및 공동 조달 추진(200만 발 포탄 목표) ▲대규모 군사 훈련(EUMAM 통해 7만 3천 명 이상 훈련) 등 다방면에 걸쳐 노력을 증대하고 있다.

2025년 초까지 유럽(EU+회원국)의 총 지원 약속액은 약 1490억 달러에 달하며, 이는 미국의 약속액(약 1280억 달러)을 상회하는 규모로 추정된다

최근 영국 국방장관 존 힐리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방위연락그룹’(UDCG) 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군사지원 규모가 기록적으로 증가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영국은 노르웨이와 함께 군사용 드론, 레이더 시스템, 대전차 지뢰를 제공하고 독일은 올해 우크라이나에 이리스-T 방공시스템 4기, 300발의 유도미사일, 100대의 감시레이더 등을 추가 지원할 계획이다. 말 그대로 총력 지원이다.

문제는 현실성이다. 

첫째, 공중 전력, 정보·감시·정찰(ISR) 등 핵심 군사 역량에서 미국과의 격차는 여전하며, 유럽 주도의 안보 구상(예: 억지력 파견군) 성공 여부는 여전히 미국의 지원에 의존적이다.

둘째, 수십 년간의 투자 부족과 분절화된 방위 산업 기반은 생산량 증대에 한계를 보이며, 야심찬 목표 달성을 어렵게 만든다. 그리고 셋째로 전쟁 종결 방식, 비용 부담,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등에 대한 유럽 내 여론 및 국가 간 이견(헝가리의 반대 등)은 정책 추진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다. 

미국의 지원 공백을 유럽이 완전히 메우기에는 역량, 산업, 정치적 통합 면에서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며 이는 자칫 러시아에게 유리한 '위험한 공백기'를 만들 수 있다. 유럽연합의 '단결'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에 힘을 실어주는 이유다.

러시아 기계화 보병 사단. 사진=연합뉴스
러시아 기계화 보병 사단. 사진=연합뉴스

"시간은 누구의 편인가?
러시아는 미국의 조급함을 역이용하며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 하고 있다. ▲휴전 제안 지연 및 거부 ▲서방의 모든 군사 지원 중단, 제재 완화 등 수용 불가능한 전제 조건 제시 ▲우크라이나의 휴전 위반 주장 등을 통해 협상을 지연시키는 전술을 구사하는 중이다.

현 상황에서 푸틴의 목표는 단순한 휴전이 아닌, 우크라이나의 완전한 복속(정권 교체, 비무장화, 추가 영토 할양 요구 등)으로 분석된다. 그렇기에 미국이 먼저 손을 내미는 최근의 협상은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이거나, 군사 작전 지속을 위한 시간 벌기로 간주될 뿐이다. 러시아는 전장에서의 우위, 서방 제재 속 경제 회복력, 약화되는 서방 지원 등을 고려할 때 시간이 자신들의 편이라고 판단하는 듯 보인다.

물론 리스크도 있다. 자신감의 이면에는 막대한 인명 피해(총 50만 명 이상 사상자 추정)와 장비 손실(전차 약 1만 대 손실/손상 추정), 그리고 장기적 취약성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손실률이 지속될 경우, 12~18개월 내(2025년 말~2026년) 러시아는 심각한 물자(구소련 비축 물자 고갈 가능성), 인력, 경제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고 예측된다. 만약 서방이 러시아에 대한 압박을 결의를 유지하고 이를 지속한다면, 러시아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수 있는 상황이 또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 단정하기 어렵다.

파괴된 키이우. 사진=연합뉴스
파괴된 키이우. 사진=연합뉴스

중국의 모호한 행보 "균형 외교 속 영향력 극대화"
중국은 우크라이나 전쟁 국면에서 복합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러시아에 대한 결정적인 경제적 생명줄(2023년 교역액 2400억 달러)을 제공하면서도, 직접적인 살상 무기 지원은 자제하며 평화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자처하는 등 모호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북한과 러시아의 간격이 좁아지며 중국 입장에서는 입체적인 '사고의 포석'이 더 촘촘해질 수 밖에 없다.

우선 중국 입장에서 우크라이나 장기전으로 미국의 국력이 소모되는 것은 나쁘지 않다. 러시아를 미국의 영향력에 대항하는 파트너로 유지하며 중국 스스로가 자국의 핵심 이익(미국 약화, 순응적 러시아)에 부합하지 않는 평화 협정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유인은 적다는 뜻이다. 다만 러시아에 대한 중국의 상당한 영향력은 인정되며, 유럽이 주도하는 방식으로 신중하게 관여시킬 경우, 러시아를 압박하는 데 일정 부분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여기에는 생각보다 이르게 시작된 트럼프 행정부 '발' 관세전쟁의 추이를 지켜봐야 한다는 전제가 깔린다. 트럼프 대통령은 특유의 민주주의 제도에 따라 시간이 제한적이고, 글로벌 경제 재편의 큰 틀에서 이스라엘 및 및 중동은 물론 우크라이나 전쟁 등의 이슈를 재조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목표는 위대한 미국이며 관세와 전쟁 등 모든 현상들은 철저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그 수단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판을 바꾸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전 세계에는 중요한 이슈가 된다. 이를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 국익을 극대화하는 방안이 될 것이며, 중국의 전략적 행보도 이러한 트렌드 아래에서 예측가능한 패턴을 보여줄 가능성이 높다. 

한편 현 상황에서 가장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는 현재 전선을 기준으로 한 '현상 유지 휴전(Ceasefire-in-Place)'이다. 이 경우 러시아는 점령지(우크라이나 영토 약 20%)를 계속 통제하게 된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러시아의 목표, 안보 보장 부재)가 해결되지 않은 휴전은 불안정하며, 러시아에게 재무장 및 재침략의 기회를 제공할 위험이 크다.

대안 시나리오로는 ▲협상 결렬 시 장기 소모전 ▲공식 합의 없는 동결 분쟁 ▲오판에 의한 확전 ▲서방 지원 약화 시 우크라이나 붕괴 및 러시아 승리 등이 거론된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장기 안보 보장은 NATO 가입이 사실상 어려운(가상 2025년 미국 입장 기준) 상황에서, 미국-우크라이나 양자 안보 협정 및 유럽 주도 구상, 그리고 우크라이나 자체 방위력 강화("무장 중립" 또는 "고슴도치 전략")에 의존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미국의 확고한 지원 없이는 이러한 보장이 러시아를 억지하고 재건 투자를 유치할 만큼 충분한 신뢰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이 핵심 과제다.

향후 전쟁의 전개는 ▲미국의 개입 축소 속도와 유럽의 역량 강화 속도 간의 균형 ▲우크라이나에 대한 실질적이고 신뢰성 있는 안보 보장 마련 여부 ▲러시아의 장기적 소모 능력과 정치적 안정성 ▲동결 자산 활용 등 우크라이나 재건 재원 확보 및 관리 ▲중국의 건설적 역할 유도 가능성 등 복잡한 변수들의 상호작용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어떤 시나리오로 귀결되든 우크라이나 전쟁이 남긴 지정학적 상흔은 깊고, 그 여파는 향후 수십 년간 국제 질서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미국, 유럽,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긴밀히 공조하며 단기적 종전 압력과 장기적 안정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어려운 외교적 줄타기를 이어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단기적 측면으로 봐도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결정권은 강대국이 철저하게 갖고 있다. 그렇기에 그 끝은, 안타깝지만 낙관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