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공백은 끝났으나 상처는 깊다. 지난 4월 4일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대통령의 파면을 결정하면서 대한민국 정치 리스크가 해소되기 시작했지만 4개월에 걸친 구심점 부재는 한국 경제에 큰 타격을 줬다. 특히 중국의 기술 궐기와 미국발 관세전쟁에 맞서 정부와 공조가 절실한 산업계는 그간 정치적 무관심 속에 외로운 싸움을 지속해 왔다.

조속한 리더십 회복으로 민관이 함께 위기에 대응해야만 한다. 여전히 한국 경제 중심에는 산업계가 있다. 이들은 글로벌 불확실성의 파도를 넘을 수 있도록 정부 주도로 사활을 걸어야 할 시기라고 입을 모은다.

사진=이코노믹리뷰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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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이성’의 미국, 정부 주도적 협상 이뤄내야

최우선 대응 과제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비이성적 무역 정책이다. 대한민국 기간산업과 12대 수출 주력산업이 모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나마 미국과 협력 논의가 활발한 조선업계나, 대미 수출 비중이 그리 크지 않은 방산업계 정도나 한숨 돌릴 뿐이다.

특히 불확실한 관세 정책이 발목을 잡는다. 트럼프는 “한국은 자유무역협정(FTA)를 체결하고도 비관세 장벽으로 미국에 실 세율 50%를 부과했다”고 주장하며 고율 관세를 예고했다.

근거는 없다. 애초에 비관세 장벽 산정 기준조차 주먹구구식이다. 2024년 미국의 대한 무역 적자(662억달러)가 전체 수입 금액(1330억달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49.8%이기 때문에 50%로 산정한 것이다. 미국이 한국에 거둔 107억달러에 달하는 서비스 흑자는 언급하지 않았다.

문제는 현재 대한민국이 이런 주먹구구식 정책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휘둘리고 있다는 점이다. 산업통상자원부와 외교부가 주축으로 대응해 왔지만, 한계는 있다는 평가다.

피해는 고스란히 산업계로 돌아왔다. 국가기간산업인 철강업계는 이미 3월 12일부터 25% 관세 피해를 보고 있다. 미국은 한국 철강업계의 3위 수출국으로, 관세 조치로 인해 불황에 시달리던 업계의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는 말이 나온다. 5월부턴 자동차 부품 대상 관세 부과가 시행된다. 트럼프는 반도체와 바이오 산업에도 관세 부과를 고려 중이다.

경제계에서는 트럼프의 노림수가 FTA 재개정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미 상무부와 함께 관세 정책을 주도하는 무역대표부(USTR)이 최근 행정부에 기존 무역협정들의 개선을 건의하는 보고서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USTR은 한국을 겨냥해 “쌀 등 농산물 시장과 제약 분야 무역 비관세장벽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 담당 고문 역시 “관세율보다 비관세장벽 완화가 더 중요하다”고 발언했다.

미국이 불합리하다고 주장하는 한국식 인증제도, 부가세 등은 무역협정에서 다뤄질 가능성이 높다. FTA 재협상이 거론되는 이유다. 현재 미국이 고율관세 행정명령만으로 FTA를 무력화하고 있는 만큼, 마음이 급해진 한국이 먼저 차악(FTA 개정)을 제안할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과도한 요구사항을 먼저 제시한 뒤 원하는 것을 타협해 얻어내는 전형적인 트럼프식 협상 방식이라는 평가다.

돌고 돌아 정부의 중요성이 더 커졌다. FTA 재개정에는 국회 동의가 필요하다. 여당과 야당의 협조를 구하면서 미국과 주도적 협상을 이어나가기 위해선 대통령이라는 구심점이 필수다. 조기 대선을 통해 들어올 차기 행정부의 어깨가 무거워진 이유다.

이윤희 포스코경영연구원 상무는 지난 4월 3일 한국경제인협회가 개최한 ‘트럼프 상호관세,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세미나에서 “아직은 불확실성이 커서 섣불리 투자 의사결정을 내릴 수 없는 상태”라며 “관세문제는 정부 간 협상으로 풀 부분이 많으므로 정부의 더 주도적인 역할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차기 행정부의 과제는 비단 관세 리스크 해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락가락하는 미국의 각종 산업 지원금 정책과 현지 산업 투자 건에서도 적극 협상이 필요하다.

미국은 바이든 전 정권 당시 자국 내 첨단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칩스법(반도체법)’과 ‘IRA(인플레이션 감축법)’ 등을 제정하며 한국 주요 기업의 투자를 유치했다. 미국은 현지 업체와 협력하고 현지에 생산기지를 건설하면 거액의 보조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턴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며 폐지 압박 중이다.

트럼프는 SK하이닉스 등 칩스법 수혜 대상 우방국 반도체 기업들에게 “보조금 지급을 철회할 수 있다”며 미국 내 투자 규모 확대를 강요하고 있다. 2차전지 역시 마찬가지다.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와 같은 세계 1위를 다투는 기업들이 50조원 이상을 투자해 현지 공장을 지었음에도, 정부 정책 변경으로 보조금을 지급 받지 못할 위기에 놓였다.

그룹 차원 대응에는 한계가 있다. 정부 대응이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4대 그룹 총수들은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과의 회동에서 “미국과 협상에 총력을 다할 것”을 요청했다.

미국과는 알래스카 LNG 투자, 현지 조선산업 투자 등 굵직한 이슈가 많이 남아있다. 트럼프 정권은 2029년 1월에 끝나지만, 해당 안건들은 그 이후 정부까지 장기간 이어진다. 한국 차기 행정부는 이를 모두 아우르며 협상을 이어나가는 것이 주요 과제가 될 전망이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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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중국 성장세…한국도 정부 차원 맞대응 해야

한국이 정치 혼란에 시달리는 동안 중국은 기술 굴기를 이뤄냈다. AI의 딥시크와 전기차의 BYD가 대표적이다. 미국 첨단산업을 대표하는 엔비디아와 테슬라의 주가가 이들의 급성장으로 연일 하한가다.

2020년대 들어 중국에 제조업 패권을 점차 빼앗기고 있는 한국은 대응에 더욱 애를 먹고 있다. 석유화학업계가 대표적이다. 석화업계는 2020년 이전까지 중국에 가공품을 대량으로 수출하며 큰 이득을 봤다. 그러나 최근 5년간 중국이 에틸렌 자체 생산량을 늘리며 전세가 역전됐다. 현재 중국의 기초유분 자급률은 100%를 웃돈다. 중국은 정부 주도하에 석화 설비를 대폭 증설했다.

정부의 지원을 받는 중국 석화업계와, 홀로 자생하는 한국 석화업계의 싸움이 된 셈이다. 한국 정부 역시 정부 차원 지원 필요성을 인지하고 지난해 12월 ‘석유화학 산업 경쟁력 제고 방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계엄 선포와 탄핵정국이 겹치며 지원책 추진 동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조선업계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 중국에 절대적 기술 우위를 지니던 조선업계는 최근 컨테이너와 벌크선 물량 대부분을 중국에 넘겨줬다. 여전히 LNG운반선과 초대형컨테이너선 등 고부가가치 선종은 중국보다 더 많이 수주하지만, 수주 선종 다양성은 예전만 못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중국은 중국제조 2025 계획을 발표하며 조선산업에 적극 투자 중이다. 2024년 말 기준 중국 조선 분야 R&D 인력은 1만8000명 정도로 집계됐는데, 한국은 이의 10분의 1도 안되는 1300명 수준이다. R&D 예산 집행도 매출액의 1%를 밑돈다.

현재 한국과 중국은 암모니아 추진선, 자율운항 선박 등 차세대 선박 기술을 선점하기 위해 경쟁 중이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은 고부가가치 선박 분야에서 한국과 중국의 기술 격차가 0.7년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정부차원 지원 차이는 AI와 양자컴퓨터 등 첨단산업 분야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지난 4월 6일 중국 정부는 첨단 산업에 국가 차원 200조원 규모 펀드를 설립하고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2024년 중국 전체 R&D 투자 규모는 약 716조원으로 한국의 4배를 상회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AIPRM은 “2023년 투자 금액 기준으로 AI 투자가 이어질 경우, 2030년 중국과 미국의 AI 기술 격차는 14년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같은 기준으로 한국은 183년이 책정됐다.

산업연구원은 최근 발간한 ‘미중 경쟁에 따른 중국의 AI 혁신전략과 우리산업의 대응’ 보고서를 통해 “정부 주도의 마중물 역할을 넘어 민간 자본이 대규모로 유입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고 정부와 민간이 공동으로 AI 빅펀드를 조성해 해외수주, 수출, 스타트업 육성 등의 사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며 “필드 맞춤형 AI 산업혁신이 가능하도록 학계·민간·정부의 공동 대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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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정부 정책에 기대할 수 있을까

산업계는 “향후 어떤 정부가 출범하든, 국내 산업과 관련한 주요 정책은 정무적 판단으로 흔들리지 않고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에너지 정책이 그렇다. 지금껏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은 정권이 전환될 때마다 내용이 조금씩 바뀌는 모습이 자주 연출됐다.

주요 현안은 원전과 신재생에너지산업 간 균형이다. 윤석열 정권은 AI 산업 발전 등으로 늘어나는 전력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원전 산업에 힘을 실었다. 윤 정권이 발표한 11차 전기본 실무안에는 오는 2038년까지 신규 대형원전 3기(4.2MW)를 추가로 건설하겠다는 계획이 담겼다. 한국수력원자력의 체코 신규 원전 수주 역시 외교 성과로 홍보할 만큼 적극적으로 원전 산업을 육성했다.

하지만 이런 투자 기조는 향후 어떤 정권이 들어오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지난 문재인 정권 당시 태양광 산업을 대대적으로 육성했으나, 윤석열 정권 들어 원전 산업 육성에 집중한 것과 비슷한 그림이다.

앞서 윤 전 대통령은 “정치로 인해 에너지 정책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겠다”며 2024년 중 ‘2050 중장기 원전 로드맵’ 발표를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2024년 12월 계엄과 함께 탄핵정국이 들어서며 로드맵 발표는 기약 없이 미뤄지고 있다. 당장 11차 전기본마저도 여야 협상 도구로 이용되는 실정이다. 실무안이 국회 보고를 거치며 원전 3기 건설에서 2기로 축소되고, 신재생에너지 비중이 올라간 것이다.

이밖에도 ‘대왕고래’로 알려진 포항 영일만 석유 시추 사업 등도 정권 교체로 인해 표류할 가능성이 높다.

산업계에서는 정치 판단에 휩쓸리지 않는 에너지 정책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국내 주요 제조업계 관계자는 “말단 제조업체까지 자동화와 첨단 기술을 도입하며 전력 수요는 점차 늘고 있는데, 정부가 화석·신재생·원자력 에너지 어느 한쪽에 치우친 정책을 펼친다면 피해는 고스란히 일선 업체들에 전가될 것”이라며 “당장 전기 수급 불균형이 발생해 산업용 전기요금이 10원이라도 오르면 업체들에겐 수십억, 수백억대 추가 지출로 이어진다”고 우려했다.

균형잡힌 에너지 산업 육성으로 업계 리스크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시선이다. 당장 유권자 표를 의식하며 탈원전을 외치던 유럽조차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산 천연가스가 끊기자 다시 원전을 가동하는 추세다.

국회와 행정부에 계류된 수많은 지원 정책 역시 조속한 처리를 요한다. 반도체 특별법이 대표적이다. 트럼프 정권의 반도체 압박에 맞서 국내 기업에 대해 정부가 재정 지원을 강화하고 규제를 완화하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야당이 반도체 연구진에 대한 주 52시간제 적용 예외 조항을 반대하며 계류 중이다. 주 52시간제와 관련한 논쟁은 전 정권부터 이어져 내려온 주요 쟁점 중 하나다. 국가 전략산업의 속도감 있는 지원책 통과가 국회 힘겨루기로 점차 늦어지는 셈이다.

반대로 업계가 반대하는 각종 규제책도 정치적으로 다뤄질 가능성이 크다. 정유업체 등의 부담을 키우는 ‘횡재세(초과이윤세)’ 역시 정치적으로 재논의될 가능성이 있다. 기업이 외부적 요인과 독과점 지위 등으로 초과 이윤을 얻었을 때 한시적으로 세금을 부과하도록 하자는 내용이다.

제조업계 전반이 반대하는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일부개정법률안)’ 역시 유력 쟁점 후보다. 협력사 구성원도 원청 상대로 강도 높은 쟁의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하는 법안이다. 윤석열 정권은 재의요구권을 행사하며 반대했으나, 차기 정권 구도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글로벌 경쟁시대에 자국 핵심산업 규제를 점차 완화하는 타국과 달리, 한국은 여전히 기업 규제가 정무적 카드로 사용된다는 비판이 따른다. 고물가로 인한 수요 둔화와, 중국 기술궐기, 미국발 관세전쟁 등 불확실성이 짙은 상황에 정부가 먼저 기업에 족쇄를 채우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는 우려다.

특히 한국 정치권과 산업계는 한술 더 떠 사공만 많고 선장은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과거처럼 개별 기업과 정부 부처가 각개전투를 이어나가는 게 아닌, 새로운 행정부가 구심점을 잡고 퀀텀점프를 도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