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정유업계가 ‘빙하기’에 갇혔다. 내수침체와 중국발 공급과잉, 글로벌 경기침체에 따른 전방 사업 수요 부진과 정제마진 하락을 겪으며 ‘N중고’를 겪고 있다. 실제로 국내 정유 빅4(SK이노베이션, 에쓰오일, HD현대오일뱅크, GS칼텍스)는 지난 3분기 약 1조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하며 업황 악화에 신음하고 있다.

전통적 사업 모델 한계가 경고음을 올리는 가운데 정유업계는 기존 정유 사업을 넘어 스페셜티(고부가가치) 석유화학 제품, 바이오 연료, 친환경 에너지 등 신사업 분야로 눈을 돌리고 있다.

국내 정유업계, 상반기 수출 신기록에도 정제마진 악화로 ‘먹구름’

사진=에쓰오일
사진=에쓰오일

대한석유협회는 지난 1∼6월 국내 정유 4사의 석유제품 수출량이 2억 4530만배럴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석유협회 통계 집계 이후 역대 상반기 기준 최고 수출물량으로, 지난 2018년 상반기(2억 3700만배럴) 이후 6년 만에 최대치다.

상반기 석유제품 수출량은 전년 동기 대비 7.3% 증가해 3년 연속 증가세다. 전년 동기 대비 9% 증가한 237억6224만달러(약 32조 9344억원)를 기록하며 우리나라 산업 수출 품목별로 보면 반도체와 자동차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석유제품 중 최다 수출 품목은 경유로 전체 수출량의 40%를 차지했고, 휘발유(23%), 항공유(18%), 나프타(8%)가 뒤를 이었다. 협회는 수출 증대 요인으로 휘발유와 항공유 등 글로벌 석유 수요 증가에 국내 정유사가 가동률 증대로 대응한 영향으로 분석했다.

올해 상반기 국내 정유업계의 가동률은 80%로, 지난 2021년 72.6%(상반기) 이후 매년 꾸준히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국가별 수출량 순위로는 호주(18.6%), 싱가포르(13.0%), 일본(11.5%), 중국(9.0%), 미국(8.7%) 순으로 집계됐다.

다만 이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업계 상황은 암울하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지난 1분기 싱가포르 정제마진은 배럴당 10.0달러였지만 2분기에 4.8달러로 급감했고, 3분기에는 평균 3.6달러를 기록했다. 중국과 인도 등의 석유제품 수출 증가 등으로 정제마진이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는 뜻이다. 중장기적으로도 글로벌 경기둔화, 전기차 전환 흐름 등에 따라 석유제품 수요 증가세가 둔화될 것으로 전망되는 이유다.

“석유는 얼지 않는다… 다만 변화할 뿐”

사진=SK이노베이션
사진=SK이노베이션

19세기 말 처음으로 국내에 유입된 석유는 100여년이 넘는 세월을 거치며 산업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그리고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해 외국 석유기업의 지배를 받아온 국내 석유산업은 1960년대 정유사들이 등장하며 본격적으로 태동했다.

보호와 규제의 시대를 지나 치열한 시장 경쟁의 시대에 접어드는 동안 석유산업은 변화와 발전을 거듭했으나 현재는 큰 위기에 직면한 상태다. 전통적 사업 모델이 한계에 달하며 업계 분위기가 심상치않기 때문이다.

다만 ‘위기’란 ‘위험과 기회’가 합쳐진 말이라는 표현처럼, 국내 정유사들은 세계 탄소중립 기조에 대응하고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며 신성장 동력 확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이다.

실제로 에쓰오일은 총 9조 2580억원을 투입한 ‘샤힌 프로젝트’를 통해 석유화학 사업을 대폭 강화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고부가가치 석유화학제품 생산시설을 신설하는 사업으로, 국내 석유화학 분야 최대 규모로 꼽힌다. 오는 2026년 울산에서 연간 에틸렌 180만t을 추가로 생산할 계획이다.

GS칼텍스도 바이오 항공유와 액침냉각유 등 친환경 연료와 신소재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바이오 항공유는 항공산업의 탈탄소화 트렌드에 부응하며, 향후 고성장이 기대되는 분야로 꼽힌다. 지난해 9월에는 산업통상자원부의 ‘바이오 연료 실증 연구’에 참가해 국내 최초로 총 6회에 걸쳐 바이오 항공유 급유를 성공적으로 마친 바 있다.

SK이노베이션은 전기차 시장을 겨냥한 냉매제와 탄소 전환 기술 등 친환경 포트폴리오 구축에 힘쓰고 있다. 화석연료 중심의 사업 구조에서 벗어나 탈탄소가 요구되는 대형 선박, 트럭 등의 대형 상업용 운송수단과 최근 성장하는 무탄소 지게차, 농기계, 드론 등 친환경 산업용 모빌리티 시장에 적용할 수 있는 친환경 신재생 에너지 투자도 병행하고 있다.

윤활유 자회사 SK엔무브도 냉·난방 성능을 개선한 차세대 차량용 냉매를 개발해 시장 선점에 집중하고 있다. 

HD현대오일뱅크는 블루수소와 탄소포집‧저장(CCS) 기술을 통해 수소경제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석탄 가스화 기술로 생산되는 블루수소는 생산 과정에서 나오는 이산화탄소를 포집해서 환경 부담을 줄일 수 있는 방식이다.

현대오일뱅크는 블루수소를 기반으로 한 수소 복합 단지를 구축해 탄소 배출량 저감에 기여한다는 계획이다. 또 CCS 기술을 활용해 기존 사업에서 발생하는 탄소를 효과적으로 포집하고 저장하는 시스템 도입을 통해 탄소중립 목표 달성과 글로벌 수소 시장에서의 입지 강화를 도모하고 있다.

세계 ‘脫탄소’ VS. 트럼프 ‘親화석연료’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사진=연합뉴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사진=연합뉴스

전통적 비즈니스 모델의 한계, 이어진 시장 다각화 노력 등이 발 빠르게 벌어지는 가운데 내년 1월 20일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출범에 따라 국내 정유·석유화학업계는 더욱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은 ‘드릴 베이비 드릴(drill, baby, drill)’을 수 차례 언급하며 석유와 석탄, 가스 등 화석 연료 기반 에너지 산업의 규제 완화와 활성화를 강조해왔다.

삼정KPMG의 ‘트럼프 당선과 국내 산업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의 에너지 산업은 파리 기후협약 재탈퇴와 화석 연료 생산 확대 등 친환경 정책을 약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 분석했다.

반면,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 정책 기조와 ‘관세 폭탄’이 세계 석유 수요 정체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도 존재한다. 무역 수요가 줄어들면 수송용 석유 수요가 감소하며 석유 시장에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석유 수요가 감소하면 정제마진이 나빠져 석유 업황이 악화될 수 있다.

정제마진이란 정유업계의 수익성 지표로, 석유 제품 가격에서 원유 가격, 정제시설 운영비용, 운반비용 등 생산비용을 차감한 금액을 말하는데, 실제로 지난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 미·중 무역 분쟁으로 글로벌 교역량이 줄며 정유업계에 악영향을 끼친 바 있다.

호재든 악재든,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변화는 국내 정유업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은 분명하다. 국내 업계의 비용 효율화와 새로운 수익원 발굴이 더욱 중요해진 시기다.

석유는 우리 일상생활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할 뿐만 아니라 산업의 원료로 사용하는 현대 기초 산업의 에너지원이자 ‘혈액’이나 다름없다. 어느 때보다 큰 위기를 맞이한 국내 정유·석유화학 업계는 세계적인 탈탄소 흐름에 부합하면서도 트럼프 행정부의 에너지 정책 시나리오에 다각도로 대비해야할 때라는 분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