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와 여당이 반대한 야당 주도의 감액 예산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국회 헌정 사상 첫 감액예산안으로, 내년도 추가경정예산안(추경) 편성이 사실상 불가피해졌다.
본회의를 통과한 예산안은 수정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삭감한 예산을 채울 유일한 수단은 추경밖에 없는 상황이 됐지만 이 조차 실현 가능 여부는 논란이다.
극단적 정치 대립이 나라의 한 해 살림살이마저 합의하지 못한 채 다수당이 일방 처리하는 비정상적 상황을 초래했다는 비판이 확산되고 있다.
국회는 10일 본회의에서 673조3000억원 규모의 내년도 예산안을 의결했다. 올해 예산 656조6000억원보다 16조7000억원(2.5%) 늘었지만, 당초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예산안 677조4000억원에서 4조1000억원(0.6%) 줄었다.
세부적으로 ▲정부 예비비(-2조4000억원) ▲국고채 이자 상환(-5000억원) ▲대왕고래 프로젝트 관련 예산(-497억원) ▲검찰·경찰·감사원 등 특정업무경비 및 특수활동비(-678억원) 등이 정부안보다 감액됐다.
이 가운데 예비비는 예측할 수 없는 예상 밖의 지출 또는 초과 지출에 충당하기 위한 자금으로 이른바 '정부 비상금'이다. 국회가 총액만 승인하면 신속하게 집행할 수 있기 때문에 재해·재난, 농산물 가격 폭등 등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사용된다.
향후 산업·통상·기후변화·전염병 등 비상시 신속한 대응이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 정부 설명이다.
'대왕고래 프로젝트'로 불리는 동해영일만 심해가스전의 1차 시추 작업 예산도 사실상 전액 삭감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미 시작된 시추 작업을 중단할 수는 없기 때문에 부족분은 한국석유공사가 채워야 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그러나 한국석유공사의 재정이 여유롭지 않아 사업을 정상 추진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애초 민주당은 예산안 처리 법정기한인 지난 2일 본회의에서 예산안을 처리할 계획이었지만, 우원식 국회의장은 여야 합의안을 이날까지 마련해달라며 상정을 보류했었다. 하지만, 지난 3일 비상계엄 사태 이후 여야 간 협의가 사실상 이뤄지지 못했고 이날 본회의 직전 여야가 뒤늦게 협상을 벌였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민주당은 감액 예산안이라도 빠르게 처리해 현재의 경제 불안과 불확실성을 조금이라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 운영 및 민생을 위해 필요한 예산이 있다면 추후 정부 요청 등에 따라 추경으로 보완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추경 요건이 부합하는지에 대해선 논란이 일고 있다. 국가재정법에 따르면 추경 편성 요건은 ▲전쟁이나 대규모 재해(자연재난과 사회재난) ▲경기침체·대량실업·남북관계 변화·국제협력 같은 대내외 여건의 중대한 변화 ▲법령에 따라 국가가 지급해야하는 지출 등이다. 내수 부진이 해당 요건에 부합하는지 확실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기획재정부는 예비비 1조8000억원 등 총 2조1000억원을 복원해달라고 민주당에 요구했지만, 민주당은 이재명 대표의 간판사업인 지역사랑상품권(지역화폐) 발행 사업 예산 1조원 등 정부 요구에 상응하는 규모의 예산 증액을 강경하게 고수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예산 편성 권한이 있는 기재부가 최대 4000억원의 지역화폐 예산을 편성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민주당이 이를 거부해 협상이 최종 결렬됐다.
민주당 소속 박정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은 "정부 예산안에서 0.6%를 삭감했을 뿐"이라며 "국민과 기업에 피해가 간다는 정부와 여당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했다.
반면 정부는 예산안 처리 직후 야당의 일방적 예산안 의결을 비판하는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했다.
금융투자소득세 폐지내용을 담은 소득세법 개정안은 이날 국회 문턱을 넘었다.
그러나 정부·여당이 추진한 상속세 최고세율 인하(50%→40%), 최대주주 할증(20%) 폐지 등의 상속·증여세법 개정안은 민주당 등 야당 반대로 부결됐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여야 합의를 통해 국민과 기업의 경제 활동을 원활하게 지원할 수 있는 예산이 됐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정부는 내년도 예산 집행이 시작되는 즉시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 준비에 착수해달라"고 요청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