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림청이 인증한 명품 숲길 예산군의 ‘백제부흥군길 3코스’를 걷다 보면 임존성에 다다른다.
임존성은 고즈넉한 풍광이 돋보이는 ‘관광지’이다. 하지만 1300여 년 전 이곳은 난공불락의 ‘요충지’였다. 백제 부흥을 열망한 이들과 하나의 세상을 열망한 이들이 이 곳에서 한민족의 전쟁사에 남을 사투를 벌였다.
660년,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에게 백제의 수도 사비성(부여)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무릎을 꿇었다. 백제가 멸망했다. 하지만 나당 연합군에 항복한 것은 백제의 왕과 지배계층이었다. 백제의 민초들은 달랐다. 그들은 주저없이 나당연합군에 대한 저항운동에 돌입했다.
백제인들은 임존성과 주류성(충남 서천군 한산면)으로 모여들었다. 후대는 그들을 ‘백제부흥군’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들은 멸망한 나라를 부흥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여전히 존재하는 백제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
임존성에 흑치상지가 합류했다. 그는 의자왕과 함께 당에 항복했던 백제 최고의 장수였다. 그는 백제부흥군에겐 천군만마였다. 그가 합류하자 열흘 만에 3만 명이 모였다는 기록이 있다.
소정방이 임존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흑치상지가 지휘한 백제부흥군은 승리했고, 이후 나당연합군 손에 들어갔던 성 200여개를 되찾았다.
663년, 백제부흥군 내부 분열이 시작됐다. 지도부는 서로 죽였다. 백제부흥군이 점령했던 성들은 궤멸 직전이었다. 이번에도 임존성만 남았다. 최초의 보루가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
그해 10월 21일, 나당 연합군이 임존성을 둘러쌌다. 30여일을 공격했다. 하지만 지수신이 지휘한 임존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더는 연합군의 공성전이 아니었다. 백제부흥군이 연합군을 압박하는 농성전이 됐다. 11월 4일, 연합군이 퇴각했다.
난공불락의 임존성이 불타기 시작했다. 7척 장수가 이끄는 당 군이 진입했다. 백제부흥군은 적장을 보고 경악했다. 분노했고 좌절했다. 당의 장수는 다름아닌 흑치상지였다. 얼마 전까지 자신들을 독려하고 이끌던 자였다. 흑치상지는 당의 회유에 넘어가 당에게 항복하고는 자신이 지키던 임존성을 불태웠다.
임존성이 함락됐다. 지수신은 고구려로 망명했고, 백제 부흥운동은 끝이 났다.
다 옛일이다. 지금은 고요하다. 근처에 소정방이 배를 타고 와 묶어 놓았다는 느티나무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