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교동 한화 빌딩. 출처=한화
장교동 한화 빌딩. 출처=한화

방산 사업에서 호황을 맞고 있는 한화가 그룹 내 차기 성장 동력으로 반도체와 바이오를 낙점했다. 이를 바탕으로 후계 구도에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한화, AI 반도체에 손 뻗다

한화정밀기계는 올초 삼성전자에게 반도체 전공정 장비를 공급한 것에 이어 SK하이닉스에게 후공정 장비까지 공급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전후공정을 아우르는 종합 반도체 장비 기업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7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한화정밀기계는 TC 본더 장비를 SK하이닉스에 납품하기 전 마지막 단계에 돌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반도체 장비는 납품 전 제조사에서 일차 테스트가 이뤄진 다음, 제조사에서 한 번 더 테스트가 행해지는데 현재 한화정밀기계는 이 단계를 모두 끝마친 상태로서 최적화 단계를 진행 중인 것으로 확인된다. 

통상 제조사와 고객사 테스트 기간이 몇 년 동안 이뤄진 것을 감안하면, 한화정밀기계의 TC 본더 장비가 사실상 SK하이닉스의 테스트에 통과돼 가까운 시일 내에 대규모 발주가 발생할 것이라는 게 업계 시각이다. 

TC 본더는 HBM(고대역폭메모리)을 만들 때 반드시 필요한 장비다. HBM은 여러개의 D램을 수직 적층해 만든 메모리로, 이 수직 적층 과정에서 TC 본더는 일종의 ‘초벌’ 장비 역할을 한다. D램을 접착제로 결합시키기 전, TC 본더로 일정한 간격으로 쌓고 고정시키는 가접합 작업을 하는 것이다. 

HBM 시장이 폭발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HBM을 만드는 데 필요한 TC 본더 장비의 수요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실제 한미반도체는 그동안 SK하이닉스에 HBM3·3E용 TC 본더 장비를 독점 공급하면서 올해 매출액이 지난해 대비 3배 이상 증가한 5000~6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한화정밀기계 또한 이 시장에 발을 담그면서 성장 가도를 달릴 것으로 기대된다. 

한화정밀기계는 이외에도 차세대 후공정 장비인 하이브리드본딩 장비 개발에 착수했으며, 올해 초에는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에 ALD(원자층증착), PECVD(플라즈마강화화학기상증착) 평가 장비를 출하하기도 하면서 반도체 전후공정을 모두 아우르는 종합 반도체 장비 회사로 거듭나고 있다. 

한화는 그룹사 차원에서 반도체 장비 사업을 키우기 위해 유상증자에 참여 및 인적분할에 나선다. 앞서 지난 3월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한화정밀기계를 상대로 1700억원을 출자했다. 한화정밀기계는 이 자금으로 반도체 장비 사업 확대와 재무건전성을 위해 사용할 방침이다. 

이어 한화정밀기계는 한화비전과 함께 한화에어로스페이스에서 인적분할돼 한화인더스트리얼솔루션즈에 편입된다. 이후 한화인더스트리얼솔루션즈는 한화 그룹의 3남인 김동선 ㈜한화 부사장이 이끌 예정이다. 

바이오, 그룹사와 시너지 볼 수 있는 영역에 집중

반도체와 함께 바이오에도 진입한다. 한화는 현재 시약과 배양육 등의 영역에서 바이오 사업을 진행하며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한화가 준비 중인 바이오 시약은 ‘트리스(Tris·트리스버퍼)’이다. 트리스는 바이오의약품 개발에 필수적으로 쓰이는 약제로 무독성이고 약한 알칼리성이라 식염수 등에 사용된다. 전기장을 가해 물질을 분리하는 전기영동 실험과 유전자 DNA 확인 과정에서 자주 사용된다. 또 질병을 유발하는 단백질에 특정 약물이 제대로 결합해 반응하는지 살필 수 있어 신약 개발에 필수적이다. 

하지만 국내에선 지금까지 트리스버퍼를 전량 수입에만 의존했기에 한화가 트리스버퍼 양산에 성공할 경우 국내 바이오산업 경쟁력에도 이바지할 것으로 보인다. 

앞서 한화는 2016년 바이오의야품 제조사업에 철수한 전례가 있는 만큼, 이번에는 그룹사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바이오소재 분야를 선택한 것으로 분석된다. 바이오 소재업의 고순도의 품질 관리가 화학 사업과 비슷하고, 밸류체인 면에서 무역업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한화는 석유화학업과 무역업을 포트포리오 내 갖고 있다. 

트리스의 연구개발은 끝난 것으로 전해지며, 사업화를 위해 몇 가지 검토가 진행된 후 공장을 세우는 등 구체적인 투자가 단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또 한화솔루션은 배양육 사업화를 위해 기술 개발과 투자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올해 1분기 보고서에 따르면 한화오션은 박진희 한화솔루션 케미칼 부문 바이오ENG 담당 임원을 해촉한 뒤, 후임으로 구옥재 담당을 선임했다. 

구 담당은 2022년까지 툴젠에서 유전자교정 연구와 그린바이오 신사업 등을 총괄한 후, 최근까지는 해조류 기반의 배양육 생산 원천 기술을 보유한 씨위드에서 최고운영책임자(COO)로 재직했다. 특히 씨위드는 가축 사육이나 도축 없는 클린미트를 추구하는 기업으로 대체육 시장 성장과 함께 빠르게 성장 중이다. 

지속가능한 미래 식량 사업으로 주목받는 배양육 연구를 추진하기 위해 한화솔루션 케미칼 부문은 이미 지난해 바이오ENG 연구센터를 신설했다. 배양육 소재 생산에 필요한 미생물 균주 개발 플랫폼도 구축했으며, 사업화를 앞당기기 위해 배양육 관련 스타트업인 다나그린에 22억을 투자하기도 했다.

기반을 미리 다져놓은 한화솔루션은 향후 구 담당의 진도지휘 하에 배양육 사업을 진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룹 내 차기 성장 동력 필요

한화그룹이 이토록 차세대 먹거리 찾기에 분주한 이유는 그룹 내 주력 사업인 방산, 신재생에너지 및 화학, 금융업 중 방산을 제외한 업종에선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산업을 맡고 있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K9 자주포, 다연장 유도무기 천무 등을 폴란드에 수출하며 매출액이 2020년 5조3214어억원에서 2023년 9조3590억원으로 3년 만에 75.9% 성장했다. 그러나 중국 태양광 업체들의 저가 공세에 한화솔루션의 영업이익이 올 1분기 적자전환하고, 국내 보험업이 포화상태에 이름에 따라 한화손해보험과 한화생명보험 모두 2020년 이후 매출액이 정체 상태이다. 

이런 상황 속 올해 3월 김승연 한화 회장은 5년 4개월 만에 현장 경영 활동을 재개했다. 김승연 회장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한화로보틱스, 한화생명을 순차적으로 찾아 사업 현황을 보고 받고, 임직원들을 격려했다. 

재계에서 김 회장이 사업장 방문을 늘리면서 방산·우주·화학, 금융, 유통·호텔·로봇 사업을 나눠 경영하는 세 아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 회장이 직접 나서 힘을 실어주는 만큼 김동관 부회장, 김동선 부사장은 반도체와 바이오 등 미래 먹거리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