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PSA항에서 하역 작업 하는 HMM 오슬로호. 사진=HMM
싱가포르PSA항에서 하역 작업 하는 HMM 오슬로호. 사진=HMM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권 항만이 물동량 폭증으로 혼란에 빠졌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개전 이후로 수에즈 운하 일대가 막히며 ‘대체 항로’로 주목받은 여파다. 홍해 사태 이전에도 국제 물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던 동남아시아 일대지만, 갑작스러운 선박 집중을 모두 소화해내지 못하며 점차 적체율이 치솟는 상황이다.

홍해 막히자 아시아로

4일 온라인 수출입 물류 플랫폼 ‘트레드링스’에 따르면, 최근 동남아시아 지역이 세계 항만 혼잡도의 16%를 차지하고 있으며, 싱가포르항과 말레이시아 포트클랑 등 주요 허브항의 선박 대기 시간도 크게 늘어났다.

특히 싱가포르항의 혼잡도가 상당한 수준이다. 컨테이너 시장정보업체 ‘라이너리티카’가 발표한 6월 1일 기준 글로벌 컨테이너선 항만 혼잡 현황을 보면, 선박이 직접 접안한 싱가포르항구에만 36만7118TEU가 적체돼있고(1TEU=6m 길이 컨테이너 하나), 접안하지 못한 선박이 대기하는 정박지 ‘앵커리지’에도 29만6135TEU가 하역을 기다리고 있다.

싱가포르항 앵커리지 TEU 변화 추이. 자료=라이너리티카
싱가포르항 앵커리지 TEU 변화 추이. 자료=라이너리티카

후티 반군이 지난해 12월부터 홍해를 봉쇄하며 글로벌 해운사들이 수에즈 운하 대신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우회하기 시작했다. 운항 일정이 10일에서 2주 가량 늘어나며 추가 연료비와 인건비 등 부담이 커졌다. 운임도 급상승 중이다. 대표적 컨테이너선 운임지수인 상하이컨테이너 운임지수(SCFI)는 5월 31일 기준 3044.77포인트까지 치솟으며 평년 대비 1500~2000포인트 가량 높게 형성되고 있다. SCFI는 5월 한 달 동안 50%가량 올랐다.

홍해 리스크는 곧바로 아시아 물류 혼란으로 이어졌다. 트레드링스 관계자는 “싱가포르와 포트클랑 등은 동서양을 잇는 요충지인 한편, 현대적 물류 시설과 숙련된 인력을 갖춘 최적의 환적 허브 대안”이라고 설명했다. 단순 화물 처리뿐 아니라 현대화된 첨단 장비를 바탕으로 신속하고 안전한 환적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이들 항구의 독보적인 신속성과 안정성은 ‘정시성’을 중시하는 글로벌 선사들에겐 가장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글로벌 해운업계는 지난 팬데믹 시절 물동량 폭주 사태 이후부터 지정학적 위기 등을 겪으며 정시성 준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팬데믹 이전 80%에 달했던 정시성은 최근 50% 안팎으로 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전체 선박 중 절반이 제때 화물을 운송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선박이 몰리며 물동량이 폭주하자 오히려 앵커리지 정박 시간이 길어지며 정시성이 훼손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싱가포르항에는 260척의 선박이 입항했는데, 홍해 사태 이전 대비 두 배에 달하는 수다. 2024년 4월 기준 싱가포르 선박등기소에 등록된 선박의 총 톤수는 이미 1억톤을 넘어섰다.

싱가포르항의 컨테이너 처리 능력은 세계 최고수준이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에 따르면, 지난해 싱가포르항 선석생산성(접안 시간당 컨테이너를 싣고 내리는 빈도)은 시간당 82.2회로 세계 5위였다. 세계 평균 64.2회를 상회하는 처리 능력을 자랑하지만, 몰아치는 물동량에 최근 평균 선박 체류시간이 기존의 1일에서 2일로 두 배 늘어났다. 싱가포르항만청은 “선박 급증으로 선석과 야드가 크게 부족하다”고 발표했다.

“중장기 인프라 구축해야”

홍해 사태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자, 업계에서는 항구 현대화에 기반한 다양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파시르 판장 터미널과 투아스 신항을 하나로 통합해 세계 최대 규모의 자동화 항만을 조성하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2024년 4000만TEU 처리가 목표다.

부산항 신항 전경. 사진=부산항만공사
부산항 신항 전경. 사진=부산항만공사

대한민국 최대 항구인 부산항에도 아시아권 물동량 증가 영향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트레드링스가 오션 비져빌리티 솔루션 ‘ShipGo’를 통해 확인한 결과, 부산항의 평균 체류 시간 역시 홍해 사태 전과 비교해 약 9.8% 증가했다. 최근 2위 선사 머스크와 5위 선사 하팍로이드가 결성한 ‘제미니 협력’이 부산항을 ‘전용 셔틀 노선’에 포함시킴에 따라, 2025년부터 부산항 이용 화주들의 노선 선택 자유도는 더 높아질 전망이다. 더 많은 선박 입항을 대비해야 한다.

부산항은 인프라 구축에 힘쓰는 중이다. 부산 강서구와 창원 진해구 사이에 부산 신항을 조성하고, 첨단 기술을 도입한 국내 최초 완전 자동화 부두도 갖췄다. 지난달 공식 개장한 동원글로벌터미널부산(DGT)은 위험성이 높은 컨테이너 상·하역 구간을 무인으로 운영 중이다. 부산항만공사는 “무인 자동화 지역을 추가로 넓혀 컨테이너 선적부터 야드에 이를 쌓고 외부로 방출하는 것까지 전 과정에서 모두 무인화를 이룰 계획”이라고 밝혔다.

부산항만공사(BPA)는 부산신항에 이어 부산항 진해신항도 조성할 예정이다. 지난달 17일에는 진해신항 컨테이너 부두 1-1단계 1공구 축조 공사를 발주했다. 이밖에도 야드 증설과 장비 현대화 등에 투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AI와 같은 첨단 기술을 항만에 적용해 데이터를 분석하고 물류 시스템을 효율화하는 대대적 인프라 고도화가 필요하다”며 “대한민국 수출입의 상당부분을 책임지는 부산항인 만큼 자동화 부두 조성 등에 정부 차원 TF 장기 운영과 대대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