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기술 패권전쟁이 끝을 모르고 폭주하는 중이다. 반도체에 이어 AI, SaaS 등 ICT 전 산업에서 중국에 대한 미국의 압박이 최고조에 달한 가운데 그 격렬한 충돌은 '전투'를 넘어 '전쟁'으로 확장된 상태다. 최첨단 기술을 확보하는 자가 승리하는 게임. 미중 기술 패권전쟁은 단순한 신경전을 넘어 세계의 주인을 가리는 혈투가 됐다.

최근에는 새로운 국면이 펼쳐지고 있다. 기술 패권전쟁이 장기화되며 서로를 향해 증오의 주먹을 날리던 두 슈퍼파워에게 숫자로 채워진 청구서가 날아들고 있기 때문이다. 싸움에는 대가가 필요한 법이다. 전쟁에는 결국 돈이 필요하다. 팬데믹 이후 빠르게 경제 기초체력을 강화하고 있는 미국과 달리 디플레이션의 공포에 빠진 중국의 조급함도 커지는 상황. 글로벌 경제를 들썩이게 만든 대전쟁의 중앙에 떨어진 청구서는 이 아슬아슬한 힘의 충돌을 더욱 예상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이 거대한 슈퍼파워의 싸움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없는 제3국, 특히 대한민국의 미래도 중요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과 중국의 거대한 싸움 틈바구니에 끼어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나서던 중이다. 이 때 두 슈퍼파워의 앞으로 날아든 청구서의 존재감은 전형적 수출주도형 경제구조를 가진 대한민국 입장에서도 새로운 변수다.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벼랑 아래에 떨어진다.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배경이다.

미국의 중국 반도체에 대한 대규모 제재가 1000일을 갓 넘긴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미중 기술 패권전쟁의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두 슈퍼파워가 벌이는 난타전의 행간은 무엇인가? 이들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전황의 흐름은 어떤가? 대한민국이 감수해야 하는 위기는 무엇이고, 또 기회는 어디에 있는가? 파괴적 힘의 충돌이 향하는 선명한 단서를 치밀하게 따라가야 한다. 미중 슈퍼파워가 받아든 청구서의 내용을 파악하고 이에 걸맞는 맞춤형 전략도 구상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생존을 위해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2023년 APEC 정상회담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2023년 APEC 정상회담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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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미국)와 용(중국)의 미중 패권전쟁이 기술 패권전쟁으로 확장, 글로벌 경제를 예측불허의 안개속으로 밀어넣고 있다. 팬데믹,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란-이스라엘 전쟁 등 국제사회의 온갖 변수들이 춤을 추는 과정에서도 미중 기술 패권전쟁은 비록 소강상태를 맞이하기는 했어나 끊임없이 이어지며 균열을 일으킨 바 있다.

미국, 중국의 손을 잡다
흥미로운 대목은 두 슈퍼파워가 처음부터 충돌한 사이는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가까운 사이이자 서로 돕는 사이였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 후 영국으로부터 글로벌 패권을 가져온 미국은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를 중심으로 하는 대외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미국이 경찰국가이자 지구수호대로 우뚝 서는 순간이다. 여세를 몰아 소련과의 냉전도 사실상 승리로 이끌며 명실상부 패권국이 된 미국은 때로는 테러와의 전쟁으로, 때로는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신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 곳곳에서 강력한 힘을 자랑했다.

미국은 1979년 소위 핑퐁외교를 통해 사회주의국가 중국과도 수교한다. 중국이 주장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하며 대만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나선 파격적인 조치다. 다행히 중국도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국제사회에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했다. 도광양회(韬光养晦)라는 지극히 조심스러운 대외정책을 추구하던 중국은 미국이 내민 손을 덥썩 잡았고, 미국은 중국이 팍스 아메리카 체제로 들어와 ‘상식적인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기를 기원했다.

미국은 중국을 국제사회에 데뷔시키기도 했다. 냉전을 거치며 대립했던 과거를 잊고 빠르게 움직였다.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도왔으며 자국 기업의 중국 시장 진출도 장려했다. 이 때 중국 시장으로 들어간 미국 기업들이 나이키와 애플, IBM 등이다. 두 나라의 경제 협력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국제사회의 패러다임이 순항하는 순간이다.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일대일로 국제협력 정상포럼이 열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일대일로 국제협력 정상포럼이 열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전쟁의 안개 깔리다
미국과 중국의 아름다운 동행에 온 세계가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의 평화로운 공존은 오래가지 않았다. 중국의 경제력이 상승하며 어느덧 미국 주도의 글로벌 경제가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표면적으로는 공존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이던 2015년 3월, 미국 의회 외교위원회에 특별 보고서가 보고되며 잔잔한 파장이 일었다. 미국이 중국을 인정하고, 중국을 강력한 경쟁자로 정의하는 문구가 담겼기 때문이다. 헨리 키신저 수석 연구원인 로버트 블랙윌과 애쉴리 텔리스가 작성한 '미국의 중국 전략 수정'이라는 보고서에는 중국의 팽창에 대비해 미국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전략이 담겼다.

심지어 중국을 잠재적 적대국으로 묘사했으며, 이를 명확한 문서로 남겨 미국 정부의 정책적 방향성을 명확히 했다. 당시만 해도 미국 정부가 중국 화웨이 장비의 공공시설 철회에 나서기는 했으나 본격적인 전쟁을 치르지는 않을 때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중국을 ‘경쟁자’로 인식하며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중국의 존재감을 의미심장한 지켜보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한 판이 흔들린 것은 노골적인 보호 무역주의를 들고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등장하면서부터다. 

다만 시작부터 중국과 날을 세우며 거칠게 충돌한 것은 아니다. 시작은 우회전략에 가까웠다. 초기 해외에 진출한 미국 기업이 자국에 공장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압박했기 때문이다. 대표 사례가 애플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아이폰 생산 시설의 미국 이전을 집요하게 주장하며 애플을 흔들었고 미국에 공장을 건설하지 않는 기업에는 세금 폭탄을 운운하며 압박했다. 포드가 멕시코 공장 설립 계획을 철회한 이유도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다음 타깃은 미국에서 사업하는 외국기업이었다. 미국에서 '장사'를 하려면 합당한 '대가'가 있어야 하며, 이 과정에서 미국이 손해를 볼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도 이에 휘말려 대가를 치러야 했다. 미국은 자국에 가전공장을 운영중인 삼성전자와 LG전자 세탁기를 대상으로 세이프 가드를 발동하는 한편, 전통적 우방인 유럽과도 경제 측면에서는 날을 잔뜩 세웠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워싱턴DC 메리어트 마르퀴스 호텔에서 열린 극우 성향의 싱크탱크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연구소 주최 콘퍼런스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워싱턴DC 메리어트 마르퀴스 호텔에서 열린 극우 성향의 싱크탱크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연구소 주최 콘퍼런스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자국 기업에 대한 압박과 자국에 진출한 외국 기업에 대한 공세는 조금씩 국가간 전쟁으로 비화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상식적인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기를 바라며 도움의 손을 내밀었던 중국이 타깃이 됐다. 미국의 본심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미국이 중국을 상대로 기록적이고 불합리한 무역적자에 시달리고 있다는 논리가 나왔다. 나아가 중국이 자국 기업을 통해 일종의 스파이 행위를 하고 있으며, 이는 미국의 국가 안보에 커다란 리스크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미중 관계는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았다. 예감은 적중했다. 트럼프 당시 대통령이 2018년 3월 중국산 철강과 알루미늄에 30억달러의 폭탄관세를 매기며 본격적인 미중 무역전쟁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최초 관세전쟁으로 시작된 미중 패권전쟁은 이내 '기술 패권전쟁'으로 그 패러다임이 변했다. 패권의 결정적 도구가 기술이라는 점에 착안, 중국의 기술굴기를 꺾어야 완전한 패권경쟁에서의 승리가 가능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중국 화웨이가 희생양이 됐다. 정지작업은 오래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 하원은 2012년 10월 ‘중국 통신업체 화웨이 ZTE 관련 국가안보 문제 조사 보고서’를 통해 이들 기업을 강력하게 규제하는 한편 미국에서 사업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으며, 미국 정부는 2018년부터는 아예 동맹국들을 대상으로 반 화웨이 행렬에 참여하라는 압박에 나서기도 했다. 여기에는 화웨이가 중국 정부와 유착되어 있으며 소위 백도어를 운용하고 있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결국 화웨이는 직격탄을 맞았다. 2019년 5월 트럼프 행정부가 행정명령을 통해 화웨이와 70개 계열사를 '수출통제명단'에 포함시킨 후 급격하게 위축됐기 때문이다. 

런정페이 화웨이 창업주가 기자들과 만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런정페이 화웨이 창업주가 기자들과 만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극적인 타협점을 찾으려는 시도는 있었다. 행정명령 직전인 2018년 12월, 미국과 중국 정상이 G20 정상회담에서 휴전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런정페이 화웨이 창업주의 딸인 멍완저우 당시 부회장이 미국 정부의 요청으로 캐나다에서 전격 체포됐기 때문이다. 캐나다 주재 중국 대사관은 “캐나다 경찰 당국은 미국 측의 요구에 따라 미국과 캐나다 법을 전혀 위반하지 않는 중국 공민을 체포했다”면서 “심각한 인권 유린”이라고 비판했다. 이후 중국에서는 캐나다와 미국을 규탄했고, 미국은 “당연한 조치”라며 멍 부회장 체포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패턴이 반복됐다. 그 결과 멍완저우 당시 부회장은 일단 중국으로 무사 귀국했으며, 미국에 대항한 영웅이 되며 새로운 아이콘이 됐다. 이와 동시에 전쟁의 큰 흐름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런정페이 화웨이 창업주는 전면에 나서 “우리는 30년동안 170여 개국과 30억명의 인구에게 네트워크 서비스를 제공했고, 그동안 사이버 보안 문제가 일어난 일은 없었다”면서  “사이버보안 및 개인 정보와 관련해 애플의 사례를 본받고 있다. 고객들의 이익에 해를 끼치는 행위를 하기보다는 차라리 회사 문을 닫는게 낫다”고 주장하는 등 호소에 나섰지만 상황은 역시 달라지지 않았다. 미 상무부의 제재까지 받으며 최악의 시나리오로 내몰렸다.

화웨이는 유럽의 손을 잡기도 했다. 실제로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2020년 1월 역내 네트워크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며 안보 위험이 있는 공급자에 대해서는 핵심 부품 공급을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 있도록 했으나 명시적으로 화웨이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코어 네트워크에는 화웨이 장비를 사용하지 않아도 그 외 네트워크에는 화웨이 장비 진입을 허가했다는 평가가 중론이다.

미국의 파이브 아이즈 중 하나인 영국은 화웨이와 더욱 노골적으로 협력 전선을 구축했다. 당시 브렉시트를 앞 둔 불확실한 상황에서 화웨이와의 협력을 통해 중국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의지가 강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가이드라인이 발표된 후 불과 한 달이 지난 2020년 2월 영국 정부의 선임 보안 책임자가 더 메일 온 선데이 기고를 통해 “국가 안보와 영국에 대한 경제적 이익 사이의 균형은 우리가 관리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강조하는 일도 있었다.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보리스 존슨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미친듯이 화를 냈다는 파이낸셜타임즈의 보도가 나온 것도, 영국 런던에 화웨이 5G 이노베이션 & 익스피리언스 센터 설립이 발표된 것도 이 즈음이다. 이어 영국을 시작으로 네덜란드, 나아가 중국의 일대일로와 관련을 맺은 이탈리아 및 동부 유럽이 미국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속속 중국 화웨이와 손을 잡았다.

이후 홍콩 민주화 시위 및 코로나19 팬데믹 정국의 본격화로 중국과 유럽연합의 관계가 멀어지기는 했다. 현지 화웨이 퇴출도 많아졌다. 다만 유럽연합이 화웨이에 크게 의존하는 상태에서 화웨이의 강력한 기술력을 배제하기는 어렵다는 주장도 나온다. 실제로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화웨이 장비 배제 촉구를 발표하기 불과 며칠 전, 현지 언론은 화웨이가 11개 프로젝트로 구성된 유럽연합의 최대 연구혁신 프로그램 '호라이즌 유럽'에 참여해 389만유로를 지원받았으며 이는 프로젝트당 14%에 달하는 비율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현재까지도 이와 관련된, 느슨하지만 확실한 연대는 계속되고 있다.

그 연장선에서 화웨이는 미국의 압박으로 핵심 영역인 통신장비 시장에서 다소 주춤하고 있으나, 지난해 약 53조7129억원의 매출을 내며 전체 매출 성장세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전히 기초체력이 강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직은 어려운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와 별도로 미국의 중국에 대한 반도체 압박도 점점 심해졌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 의지를 사실상 말살하려는 전략이다. 이 과정에서 화웨이가 지난해 SMIC가 만든 7나노 칩이 들어간 메이트60 프로를 출시하는 등 제재 우회 가능성을 보이기도 했다.

멍완저우 화웨이 현 회장이 캐나다 억류 후 성명서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멍완저우 화웨이 현 회장이 캐나다 억류 후 성명서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한편 반도체 장비 측면서도 치열한 난타전이 벌어졌다. 올해 1월 바이든 미 행정부가 네덜란드 ASML의 심자외선(DUV) 장비의 마지막 중국 수출을 틀어 막은 것이 단적인 사례다. 블룸버그 등 외신에 따르면 ASML은 지난해 말까지 DUV의 중국 수출 라이선스를 보유하고 있었고, 올해 1월까지만 DUV 3개를 판매하려고 했으나 판매는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DUV는 이미 대중 수출이 막힌 EUV와 비슷한 개념이지만 주로 범용적인 반도체를 제작할 때 사용된다.  EUV의 파장은 13.5나노 제작도 가능하지만 DUV는 193나노로 굵다. 

미국의 DUV 조치는 이미 예고된 일이라는 말도 나온다. 미 상무부가 2023년 12월 중국산 저가 반도체를 사용하는 자국 기업들에 대한 조사에 착수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미국 정부는 중국을 배제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구축에도 나서고 있다. 인텔과 TSMC 및 삼성전자 등에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며 미국 중심의 반도체 생산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주요 기업에는 미국 정부의 지원금 규모가 결정된 상태다. 미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해 중국을 배제하려는 전략은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사실 미국이 중국 반도체에 대한 압박에 나서는 이유는 하나가 아니다. 팬데믹 여파도 컸다. 집단 감염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셧다운되자 산업이 쌀인 반도체 유통이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28나노 자동차용 반도체 품귀난까지 벌어지며 백신과 함께 반도체가 전략자산이 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런 이유로 현재 미국의 중국에 대한 반도체 압박은 팬데믹의 공포와 중국 반도체 잠재력에 대한 재발견이 동시에 발현된 것으로 봐야한다. 그 연장선에서 미국 중심의 반도체 생산 전략이 완성되고, 이를 위한 액션플랜으로 대중 반도체 압박이 벌어지는 셈이다.

물로 미국의 대중 반도체 압박 실효성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는 이들도 많다. 중국이 자체 기술력을 키우며 최신 전용 반도체들을 속속 개발하는 정황이 포착되기 때문이다. 논란은 있으나 화웨이 7나노 설계를 두고 일각에서 "대중 압박 전략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에 대해 지나 러몬도 장관은 4월 21일(현지시간) 방송된 CBS뉴스의 ‘60분’과의 인터뷰에서 화웨이 반도체 설계 기술이 낙후됐고, 이는 미 상무부의 압박이 주효했다는 증거라 밝혔으나 아직은 이견도 분분한 상태다.

중국 반도체 공장. 사진=연합뉴스
중국 반도체 공장. 사진=연합뉴스

미국은 왜 중국을 때릴까
현재 중국은 인공지능 및 사물인터넷, 로봇 등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 빠르게 미국을 추격하고 있다. 그 선봉장이 5G며 화웨이다. 이에 트럼프 행정부는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하는 글로벌 기술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을 제압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 연장선에서 화웨이 제재 카드를 꺼냈다는 말이 나온다.

더 큰 관점의 그림을 그릴 필요도 있다. 중국의 일대일로가 벌어지고 G7 국가가 중국과 손을 잡는 한편, 트럼프 행정부 특유의 보호 무역주의로 2차 세계대전 후 마련된 미국과 유럽의 공동 패권 시스템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시 주석의 중국이 ‘굴기’를 시작한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글로벌 패권 경쟁이다. 남중국해 분쟁, 대만 논란 등 복잡한 군사 및 정치, 외교적 현안들이 혼재되며 글로벌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미국의 큰 그림은 미중 무역전쟁도 하나의 장기말에 불과하다는 평가다. 2030년 미국 경제 규모를 추월할 것으로 전망되는 중국의 예봉을 꺾으려는 미국의 행보에는 경제는 물론 글로벌 패권 경쟁 주도권을 쥐려는 확고한 결단이 내재되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근원적 공포를 거론하기도 한다. 19세기 일본이 급격한 근대화를 통해 강대국으로 발전하자 당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황화론을 거론하며 아시아의 굴기를 경계한 바 있다. 이러한 공포가 미국 주도의 패권 구도에 은밀한 균열을 내기 시작했고, 팽창을 시작한 중국에 대한 우려로 이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다만 미중 패권전쟁, 특히 미중 기술 패권전쟁의 기저에는 역시 급성장하는 중국에 대한 견제심리가 짙게 깔렸다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정치, 외교, 국방 등 다양한 영역에서 동시다발적 압박이 이어지는 한편 무엇보다 국력의 척도인 기술에 주목한 '집중타격'이 벌어지는 것이 단적인 증거다.

한편 최초 미중 패권전쟁을 일으킨 트럼프 행정부와 달리 현 바이든 행정부가 일종의 다자주의 관점에서 큰 그림을 그리는 것도 눈여겨 볼 포인트다. 실제로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전 행정부처럼 과격하고 극단적인 아메리카 퍼스트 전략에서 한 발 물러나 최소한 국제사회에서는 동맹국과 보폭을 맞추며 온건한 '자유세계의 리더' 지위를 활용하는 전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국익을 위해 움직인다는 기본 철학은 두 행정부의 입장은 동일하지만, 바이든 행정부는 다자주의에 방점을 찍고 자연스러운 리더로의 추대를 통해 미국의 국익을 챙기는 것을 선호한다.

이러한 다자주의 관점은 현재 미국의 '적'을 상대할 때 상당히 효과를 볼 수 있다.

20세기 미국의 적은 이데올로기나 안보, 자원확보 차원에서 충돌하는 소련이나 이란 등과 같은 나라들이었다. 미국이 이끄는 자유세계와는 커다란 벽이 가로막고 있으며 온전히 싸워 물리칠 수 있다면 표면적으로는 모든 문제와 갈등이 해결될 수 있었다.

미국의 적인 중국은 다르다. 구 소련처럼 미국과 세계를 양분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나 1990년대 데땅트 기조를 타고 양국이 수교를 맺은 후 지금도 경제적 교류가 상당한 상태다. 이미 서로 '얽혀있는 것'이 많은 상태에서 일대일로 맞서 싸워봤자 미국의 피해도 막심하다. 미국은 물론 중국과도 '얽혀있는 것'이 많은 유럽, 일본, 대만 등의 동맹국들을 중심으로 하는 다자주의가 대중국 포위전선에서 효과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