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국제유가. 일견 시장논리와 자본 동향에 따라 등락이 결정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막은 조금 다르다. 원유시장은 국제 정치와 경제를 아우르는 막후의 체스판이기 때문이다.
주연은 중동을 중심으로 한 주요 산유국들이다. 세계 원유 매장량의 57%가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몰려있는 가운데 원유 수출량의 50%를 담당하는 이들은 막후 체스판이자 비정한 연극의 주연들이라 볼 수 있다.
산유국들은 100년이 넘도록 이어진 석유시대를 지나오며 원유를 때로는 무기로써, 때로는 협상 카드로써 이용해 왔다. 유가와 원유시장을 이해하려면 중동과 산유국 정세를 먼저 이해해야 하는 이유다. 여기에 미국과 중국 등 세계의 패권국가들도 이 팽팽한 힘의 연극에 적극 뛰어들며 검은황금이 그리는 시대의 파노라마는 더욱 극적으로 진행되는 중이다.

세계 패권국 만든 ‘아름다운 동행’
중동 정세는 ‘이슬람’이라는 거대한 종교가 관통한다. 그리고 중동의 대표적 패자이자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은 각각 대형 이슬람 종파인 ‘수니파’와 ‘시아파’의 수장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양국은 오랜 숙적 관계다. 서방과의 관계도 정 반대다.
먼저 수니파 맹주 사우디아라비아는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미국의 든든한 우방국이었다. 당시 신흥국이었던 사우디는 미국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두고 안보를 보장받는 대신, 미국의 안정적인 원유 공급을 담당했다.
제국주의가 종말을 맞고 얄타회담을 통해 국제 정세가 냉전 시대로 거듭나던 시기, 미국은 새로운 패권국으로 부상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마찬가지로 급부상하는 소련을 견제할 우방이 필요했고, 중동의 중심에 위치한 신흥국이자 자원부국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최우선 포섭 대상이었다. 종전 후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이집트 수에즈 운하에 정박한 미 해군전함에서 압둘아지즈 사우디 국왕을 만나 양국의 장밋빛 미래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양국의 동맹은 1970~1980년대 OPEC발 오일쇼크 이후로 더욱 돈독해졌다.
내막은 이렇다. 당시 미국은 세계 패권국으로서의 위상을 서서히 잃어가던 때였다. 1971년 닉슨 대통령이 “더이상 달러를 금으로 바꾸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닉슨쇼크’가 발생, 세계 외환시장에 혼란이 찾아왔다. 기축통화로서의 달러의 가치도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여기에 오일쇼크가 더해지며 미국의 원유가 부담도 심화됐다.
미국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OPEC의 수장격 사우디아라비아와 협정을 맺는다. OPEC에서 생산하는 원유 대금을 미국의 달러로만 결제하는 ‘페트로 달러’ 체제에 합의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를 통해 미국 달러는 세계 시장에서 독보적인 기축통화의 입지를 다시금 되찾았다. 반대급부로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를 향한 군사 지원을 약속하고, 사우디는 이란과 이스라엘의 군사위협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는 관계가 최근까지 이어졌다.
물론 양국의 동맹도 마냥 순탄하지 않았다. 2001년 9.11 당시 테러범 대다수가 사우디 출신인 것으로 확인되며 미국 내 여론이 험악해진 일도 있었으며 사우디의 숙적이자 시아파 맹주인 이란이 미국과 핵협정(포괄적 공동계획)을 타결하자 사우디와 미국의 관계가 냉랭해지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큰 틀에서 사우디는 안보불안 해소를 위해 미국이 필요했고 미국 역시 중동 역내 평화의 중요한 파트너로 사우디가 절실했다.
회의감 품은 군주, 빈 살만
미국과 사우디의 ‘아름다운 동행’은 근래 들어 서서히 틀어지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키맨’은 사우디의 젊은 실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다.
탈석유 정책과 엑스포 유치, 네옴시티 프로젝트, 온건한 이슬람 정책을 내세우는 개혁 군주 성향이 강한 그는 친인척을 숙청하고 권력을 잡은 무자비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빈 살만이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움직이자 양쪽의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오바마-트럼프-바이든 정권을 거치면서 쌓인 ‘서운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닌 데다, 중국 등 신흥국의 급성장으로 미국 주도적 국제정세의 유지가 이전만큼 쉬운 일이 아니게 됐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2019년 사우디 아람코 드론 피격 사건이 있다. 아람코의 정유시설 두 곳이 후티 반군의 드론 공격을 받아 파괴됐으나,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입은 타격이 아니다”며 선을 그었다. 사우디 입장에서는 씁쓸할 수 밖에 없다.

실패로 끝난 미국의 관계 개선 노력
사실 미국은 지속적으로 사우디와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를 피력해왔다. 지난 2020년 9월 트럼프 정권이 체결한 아브라함 협정이 대표적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오바마 정부의 이란 핵협상을 과감히 파기하고 가셈 솔레이마니 전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을 드론으로 사살하는 퍼포먼스까지 보여줬다. 미국이 주도하는 중동 질서의 주축에 수니파를 세우고, 이란의 시아파 벨트를 밀어내겠다는 포석이다. 미국은 수니파의 조력자로 아랍권의 ‘공공의 적’이었던 이스라엘을 끌어들이며 수니파와 이스라엘의 관계 개선 협정을 맺는다. 미국은 이란을 중심으로 하는 '시아벨트'의 팽창을 막는 한편 '수니벨트'에 힘을 실어주기로 결정하며, 이른바 수니벨트의 파트너로 이스라엘을 점지하는 파격을 보여준 셈이다.
그 결과 미국의 주도로 이스라엘은 아랍에미리트·바레인과 국교를 맺는다. 유대인의 조상인 이삭과 아랍인 조상인 이스마엘이 한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천명하고 향후 분쟁을 그만둘 것을 선언했다. 수단과 모로코도 뒤를 이어 협정에 서약했다.
트럼프의 뒤를 이은 바이든 행정부도 사우디와 관계를 회복하려 아브라함 협정의 확대를 시도했다. 노력의 효과도 없지 않았다. 지난해 여름 이후 사우디의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에 대해 “진지하다. 매일매일 가까워지고 있다”고 언급하고, 미국-사우디 간 안전보장 협상을 논의하는 등 곳곳에서 긍정적 시그널이 일었기 때문이다.
다만 스텝이 꼬인 것은, 역시 바이든 정부가 사우디의 ‘역린’을 제대로 자극한 이후다. 바이든 정부가 이스라엘과 사우디의 관계개선을 주도함과 동시에 다른 한쪽에서는 트럼프 정부에서 결렬시켰던 이란과의 핵협상을 재개한 것이다. 바이든 정부는 지난해 하반기 이란과 한국 내 이란 석유 자금 동결을 해제하기로 전격 합의했다. 이스라엘과 수니파 진영의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고, 대 이란 관계개선 등을 통해 중동 외교에서 성과를 거두고자 했던 의도로 풀이된다.
여전히 이란이 숙적으로 남아있는 사우디로선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빈 살만 왕세자는 미국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란이 핵무장을 한다면 우리도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사우디는 왕정, 이란은 혁명 국가다. 사우디로선 다른 종파 종주국에서 일어난 혁명이 자국에까지 영향을 미칠까봐 신경 쓰인다. 결국 이란을 견제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미국에 우라늄 농축 허용 등을 요구하며 관계가 다시금 악화됐다.
바이든 대통령과 빈 살만의 악연도 깊다. 지난 2018년 터키 이스탄불의 사우디 총영사관에서 워싱턴 포스트 소속 반체제 성향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살해되는 일이 벌어지자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후 꾸준히 빈 살만 왕세자가 흑막임을 주장하며 공개적 비난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변화의 기회는 있었다. 팬데믹 종식 이후 대대적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적 원유 수급도 불안정해지자 두 정상의 입장도 묘해졌기 때문이다. 다만 더 급한건 바이든 대통령이었다. 유가를 잡고 원유 공급망을 안정화하려면 사우디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사우디가 증산에 나서야만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2022년 7월 중동순방 중 사우디를 방문해 빈 살만 왕세자와 회담을 나눴다. 당연히 증산을 요청했다. 그러나 빈 살만 왕세자는 바이든 대통령의 증산 요구를 정면에서 거절했다. 이후 꾸준히 감산 기조를 유지 중이다. 최근 OPEC+는 오는 2분기까지 감산을 연장하기로 결의했다.
한편 아브라함 협정으로 반 이스라엘 노선에서 고립 위기에 놓인 하마스 역시 급해졌고, 전쟁이라는 극단적 수를 두게 됐다.
이스라엘의 극우정권 수립과 이에 대한 미국의 분노도 커지면서 역내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결국 미국이 그리던 중동 평화는 물거품이 돼버리고, 국제유가 안정과 원활한 원유 수급에도 적신호가 켜진 셈이다.
아브라함 협정 자체도 흔들리고 있다. 민간인까지 공격하며 대 하마스 강경대응을 펼치는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권의 반발심이 점점 커는 중이다.
최근 시리아 주재 자국 영사관을 공격당한 데 대한 보복을 공언해온 이란이 이스라엘 관련 선박까지 나포하며 위기감이 커졌다. 이란 혁명수비대가 13일(현지시간) 호라무즈 해협 근처에서 이스라엘 관련 컨테이너 선박을 나포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란은 기어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13일 호라무즈 인근 선박 나포와 함께, 이란의 미사일과 무인기가 이스라엘 항공을 뒤덮었다.
이스라엘도 반격에 나서 18일 이란에 대한 보복공격에 나섰다. 이란 본토를 향해 미사일 및 드론 공격에 나서며 기세를 올렸다.
물론 전면적인 확전 가능성은 낮다. 당장이라도 5번째 중동전쟁을 일으킬 것으로 보이던 양측이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제한적 활동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실제로 13일 이란이 이스라엘 본토를 공격했으나 아이언돔에 대부분 막히는 등 그에 따른 피해는 적었다. 이란혁명수비대 간부가 폭사한 것 치고는 보복의 강도가 낮다는 평가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다. 보복공격에 나섰으나 미국에 이를 충실히 알렸고, 이란 핵시설은 타격조차 하지 않았다. 최소한 '이란의 역린'은 건들지 않은 셈이다.
다만 중동의 역내 상황이 불확실한것은 여전하다. 이에 따라 국제유가 전망도 오리무중 상태가 됐다.
재편되는 경쟁구도…유가는 혼돈 속으로
결국 국제유가는 OPEC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진영싸움으로 재편되는 흐름이다. 시장논리보다는 국제 정치 상황에 따라 유가의 다변성이 커지고 있는 셈이다.
OPEC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산유국들로서는 미국의 셰일가스 혁명도 부담스럽다. 미국이 2010년대 프래킹 공법을 개발해 셰일오일 채산성을 급격히 늘리며 제1 산유국으로 급성장했기 때문이다. 전통 산유국들에게는 최대 고객이 하루 아침에 최악의 경쟁자로 변모한 셈이다,
미국과 타 산유국들의 경쟁구도는 양측의 생산 기조에서도 나타난다. 2024년 들어 OPEC+가 감산 연장을 선언하자, 미국은 보란 듯이 셰일오일을 대대적으로 증산하고 자국 원유 재고량을 확보하면서 유가 상승을 억제했다.
미국과 산유국들의 관계가 흔들림에 따라, 중국과 러시아 등 신흥 강자들이 미국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나 둘 뛰어들고 있다.
사우디는 끝내 미국의 손을 떠나 이란·아랍에미리트·이집트·아르헨티나·에티오피아와 함께 브릭스(BRICS)에 새롭게 합류하는 것을 고민 중이다.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신흥 경제 5국의 정상회의인 브릭스는 미국과 유럽 주도의 주요 7개국(G7)을 능가하는 정치·경제 협력체를 만들겠다는 취지로 조직됐다.
눈여겨볼 점은 사우디가 앙숙 관계인 이란과 동시에 같은 경제협력체에 가입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중동에서 4번째로 석유가 많이 매장된 이란은 그간 서방의 경제제재에 시달려 왔다. 중국과 러시아 같은 비서구권 강대국과의 연대 강화 필요성을 느끼던 참이었다. 사우디 역시 미국과의 관계 악화로 인한 활로 다각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국제정치엔 영원한 아군도, 영원한 적도 없는 법. 이해관계가 합치한 양국이 브릭스의 울타리 안에서 새롭게 연대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파이살 빈 파르한 사우디 외무장관은 “브릭스 회원국들의 주권을 존중하고 그들의 문제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란과의 갈등 완화를 시사함과 동시에, 숱한 논란으로 서방의 경제 제재 대상이 돼오던 중국과 러시아를 향한 발언으로 해석 가능하다. 특히 중국의 경우, 미국의 자체 원유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사우디의 제1 원유 수입국으로 급부상한 최대 고객이다.
다만 여전히 사우디가 대놓고 미국과 척을 지기엔 리스크가 크다. 완연한 친 미국 정책에서 중립 성향으로 전환했다는 해석에 무게가 쏠린다. 로이터에 따르면 사우디는 근래 미국과 중국, 러시아 사이 지정학적 위기 고조가 심해지는 가운데, 중국과의 관계개선이 미국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어 브릭스 합류를 고심하고 있다.
사우디를 잡기 위한 중국과 미국의 신경전도 한창이다. 미국은 손을 한 번 떠난 사우디를 향해 다시 팔을 벌리고 있다. ‘인도-중동-유럽 경제 회랑(IMEC)’ 프로젝트를 발족해 인도와 유럽을 해상 및 철도 네트워크로 연결, 석유 등 에너지와 상품 수송을 원활하게 만들고자 시도 중이다.
반대로 중국은 사우디를 21세기 실크로드 ‘일대일로’로 끌어들였다. 7조원 규모의 협력이다. 더 나아가 자국과 사우디의 원유 거래 대금을 달러 대신 위안화로 지불하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비록 사우디의 별다른 호응을 얻어내지 못하고 실패하는 분위기지만, 미국과 사우디의 벌어진 틈을 집중공략하는 중국만의 큰 그림인 셈이다. 현재 중국은 대대적 부동산 디폴트와 경기 침체로 원유 수요가 부쩍 감소한 상태다. 사우디는 중국의 경기가 회복되며 원유 수요가 치솟을 날을 그리며 서서히 관계개선에 속도를 내고 있다.
최근에는 기존 OPEC 소속이 아닌 러시아, 멕시코, 브라질 등 신흥 산유국의 유전 개발과 원유산업 투자도 원유 공급망 다각화와 유가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들은 OPEC+로 함께 묶이며 세계 석유 공급량의 55%, 매장량의 90%를 차지하는 거대 세력으로 거듭났다. 가이아나의 대규모 해상 유전 개발과 이를 노리는 베네수엘라의 무력시위, OPEC+ 회원들의 동상이몽으로 인한 선택적 감·증산 등 각종 요인이 혼란스럽게 섞이는 중이다.
검은 황금, 원유를 둘러싼 국제정치 상황이 미국의 일방적 주도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른 만큼, 국제유가 역시 앞으로도 꾸준히 춤을 출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