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을 앞두고 있는 미국이 2024년 1월부터 중국 반도체 굴기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AI부터 우주까지 아우르는 패권전쟁까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는 분위기다.

결국 미국과 중국의 디커플링이 선명해지는 상황에서 뉴노멀에 이르는 새로운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바이든 미 대통령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바이든 미 대통령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DUV 때린 미국...고민 깊어진 중국
글로벌 반도체 업계가 2024년 1월부터 충격에 빠졌다.

바이든 미 행정부가 네덜란드 ASML의 심자외선(DUV) 장비의 마지막 중국 수출을 기어이 틀어 막았기 때문이다. 블룸버그 등 외신에 따르면 ASML은 지난해 말까지 DUV의 중국 수출 라이선스를 보유하고 있었고, 올해 1월까지만 DUV 3개를 판매하려고 했으나 판매는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ASML의 이번 조치를 두고 '비공식적인 루트'로 이뤄진 압박이라는 것이 주요 외신들의 평가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 바이든 행정부 최고위층이 직접 네덜란드 정부를 움직여 중국의 DUV 장비 반입을 막아섰다는 뜻이다. 최근 다시 꿈틀거리는 중국 반도체 굴기에 대항해 미국이 최고수준의 압박을 벌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DUV는 EUV와 비슷한 개념이지만 주로 범용적인 반도체를 제작할 때 사용된다.  EUV의 파장은 13.5나노 제작도 가능하지만 DUV는 193나노로 굵다. 그러나 범용 반도체 제작에 쓰인다고 기술적 완성도가 EUV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술 민감도에 있어서는 EUV에 미치지 못하지만 중국이 당장 따라잡을 수 있는 기술력은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지난해 중국 반도체 기업들이 DUV 기술 완성도를 거의 따라 잡았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는 했으나 아직은 '카더라' 수준에 머물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중국 반도체 업계는 EUV에 이어 DUV 반입까지 막히며 상당한 진통이 불가피해졌다.

미국의 DUV 조치는 이미 예고된 일이라는 말도 나온다. 미 상무부가 2023년 12월 중국산 저가 반도체를 사용하는 자국 기업들에 대한 조사에 착수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이 조치는 미중 반도체 패권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종종 있었던 무력시위로만 여겨진 것이 사실이다. 자동차, 항공우주, 방산 등 100여개 기업들이 중국산 범용 반도체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조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장관이 "중국이 범용 반도체 생산을 확대하면서 미국 기업이 경쟁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말로 반도체 관세 인상 가능성만 시사했기 때문이다.

물론 조사 시기를 고려할 때 당시의 조치가 온전히 중국의 DUV 반입 금지를 막는 사전 정지작업인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다만 미국이 2024년 초 중국의 DUV 반입을 차단하며 중국 미세공정 반도체는 물론 범용 반도체 전반에 압박을 시도한 것 자체는 타이밍이 미묘하다는 말이 나온다. 미 상무부 조사가 시작된 직후 본격적인 중국 범용 반도체 압박까지 벌어졌기 때문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중국은 맞대응을 자제하는 분위기다.

현재까지 정황을 볼 때 중국도 미국이 DUV 압박에 나설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2023년 12월 미 상무부가 중국산 범용 반도체 조사에만 나설 때 당장 희토류 기술 수출 통제에 돌입하며 반발하던 중국은, DUV 사태에 대해서는 크게 반응하지 않고 사태 추이만 지켜보고 있다.

특히 미중 패권전쟁이 장기화되며 그 대안으로 유럽과의 손을 잡으려던 상황이라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중국은 2010년대 후반만 해도 브렉시트의 공포로 떨던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유럽연합과 긴밀하게 협력했고,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이탈리아까지 연결하며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한 바 있다.

유럽연합도 이에 부응해 트럼프 미 행정부의 극단적인 자국 보호주의 정책에 신물이 나 중국의 손을 거침없이 잡았다. 화웨이 5G 장비를 일부 도입하며 미국의 '화웨이 백도어 의혹'을 일축하기도 했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 및 홍콩 민주화 시위 국면이 시작되며 중국과 유럽연합의 연대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고 최근 이탈리아가 일대일로 탈퇴를 선언하는 등 그 관계가 완전히 복원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중국은 유럽연합에 꾸준히 공을 들이며 미국과 유럽연합의 대서양 동맹을 흔들려 시도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며 러시아와 밀착하며 유럽연합과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졌으나 최소한의 끈은 놓치지 않으려 했다. 다만 이번 DUV 정국에서 유럽연합 소속 네덜란드가 미국의 방침에 따라 장비 반출을 금지하자 대책 마련에 고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과 유럽연합 모두 동시에 상대하기에는 버겁기 때문이다. 

중국 화웨이 매장. 사진=연합뉴스
중국 화웨이 매장. 사진=연합뉴스

미국 자극한 화웨이? 애플, 테슬라도 후폭풍 
미국이 '비공식적 압박'까지 불사하며 중국 반도체 업계를 강타한 직접적인 배경에는 2023년 9월 터진 화웨이 메이트60 프로 논란이 있다. 

미국이 2020년 5월 미국의 기술을 사용하는 해외 반도체 기업도 화웨이와의 거래를 중단하도록 하는 제재를 시작했기에 화웨이는 이론적으로 7나노 공정 칩이 들어간 스마트폰 메이트60 프로를 만들 수 없다. 그럼에도 SMIC가 제작한 7나노 칩이 탑재되자 미국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당장 마이클 매콜 미 하원 외교위원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SMIC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마이크 갤러거 미 하원 미중전략경쟁특위 위원장은 아예 화웨이, SMIC에 대한 모든 기술 수출을 중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이크 맥콜 미 하원의장. 사진=연합뉴스
마이크 맥콜 미 하원의장. 사진=연합뉴스

논란이 커지는 가운데 화웨이가 메이트60 프로를 만들 수 있었던 동력은 DUV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일각에서 제기하던 '제재의 틈'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국이 자체적으로 키워낸 기술력을 바탕으로 DUV가 7나노 칩을 생산했다는 뜻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새로운 충격이다. 강력한 제재만으로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 연장선에서 DUV가 28나노급 이상, 즉 차량용 반도체 등에 해당되는 범용 반도체 제작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까지 더해지며 미국이 네덜란드를 움직였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EUV만 틀어막는다고 능사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한편 미국의 이번 DUV 방침에 따라 화웨이도 만만치않은 타격을 받을 전망이다. 미국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2023년 7000억위안(약 127조2800억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되며 전년 대비 9% 성장이 점쳐지는 한편 그 여세를 몰아 상장 가능성까지 나오지만, 중국 반도체 업계 전체를 꺾으려는 미국의 DUV 공습에 당장 힘을 쓰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EUV가 없어 DUV를 활용하는 경이로운 저력을 보였으나 이제는 그 마저도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중국 반도체 굴기의 전면에 선 화웨이의 2024년이 만만치 않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다만 이러한 후폭풍이 중국 기업들만 '때리는 것'은 아니다. 미국 기업도 큰 피해를 본다. 대표적인 사례가 애플이다. 

중국 당국은 공식적으로 부정하고 있으나 최근 현지 공무원들에게 아이폰 등 외산 스마트폰 금지령이 내려지는 등, 중국 시장에서 애플 아이폰의 기세는 현재 처참하게 꺾이고 있다. 그 연장선에서 미중 패권전쟁이 심해지며 미국의 중국 반도체에 대한 압박이 심해질수록 애플처럼 중국 시장에 진출한 미국 기업들의 타격도 그와 비례해 커질 수 밖에 없다.

여기에 미국 규제 당국의 시장 반독점 레이더에 걸려드는 한편 생산기지를 인도 등으로 옮긴 것 등에 따른 중국 당국의 압박까지 겹쳐지며 애플의 수난도 더 심해질 조짐이다.

메이트60 프로. 사진=화웨이
메이트60 프로. 사진=화웨이

2024년, ICT 미중 패권전쟁 더욱 불 뿜는다
미중 패권전쟁은 비단 반도체 영역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통화정책은 물론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등을 아우르는 전 산업의 영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지고 있다.

다만 ICT 영역이 제일 치열하다. AI 패권전쟁이 대표적이다. 2018년 장샤오량 전 애플 엔지니어가 애플의 자율주행차 기술을 몰래 탈취해 중국으로 달아나려다 공항에서 검거된 사건이 발생한 후 양국의 AI 패권전쟁은 기술력 경쟁을 넘어 산업 스파이 논란까지 불거질 정도로 심각해지고 있다. 

비트코인 등 가상자산 시장에 있어서도 미국은 중국 거래소인 바이낸스를 압박하고 있고, 중국은 비트코인 등 가상자산을 통해 자국의 외환 보유고가 미국 등 서방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하고 있다.

여기에 로봇, 보안, 심지어 우주전쟁까지 가속화되고 있다. 중국이 2023년 12월 네이멍구 고비 사막 주취안 발사 센터에서 비밀 우주선을 창정-2F 로켓에 실어 쏘아올린 가운데 미국도 즉각 비밀 우주선 X-37B를 미국 항공우주국(NASA)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스페이스X ‘팰컨헤비’ 로켓에 실어 쏘아올렸다. 냉전시대 미국과 러시아의 우주경쟁을 방불케하는 경쟁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미 대선 레이스가 본격적으로 펼쳐질 경우 더욱 심해질 전망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물론, 트럼프 전 대통령 역시 중국에 대한 압박기조를 캐치프레이즈로 걸고 경쟁적인 대중국 압박을 선언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스페이스X의 팰컨 헤비. 사진=연합뉴스
스페이스X의 팰컨 헤비. 사진=연합뉴스

국익 극대화 방안 찾아야
미국과 중국의 디커플링이 심해지며 글로벌 경제 전반의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제3지대를 중심으로는 의외로 새로운 기회가 열리고 있다는 과감한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른바 양분된 세계에서 누구의 편을 확실하게 들지 않고 단순한 연결과 협력을 통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는 방법론이다. 인도, 베트남, 멕시코, 인도네시아 등 미중 패권전쟁의 틈바구니에서 균형외교를 통해 실속을 챙기는 전략으로 볼 수 있다. 

거대한 진영에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하지 않고 이른바 연결만 유지한 체, 각자의 대안으로 부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실리적 외교로 주목받은 튀르키예의 방식과 비슷하다. 무작정 한곳에 베팅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과 연결된 상태에서 무조건적인 실익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자들의 방식이 각광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에 다소 기울어져있는 현재의 상황을 타파하고 미국과 중국 모두에게서 실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며 "궁극적으로는 국익을 생각하는 판단이 필요하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화웨이와 한국 경제의 연관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면서 "화웨이를 무조건 배격하지 말고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방법을 찾고, 또 미국 기업에게 모든 것을 열어주어 한국을 디지털 식민지로 내모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딜'이 될 수 있도록 균형을 잡은 다음 양쪽이 한국을 서로 원하도록 하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대만 TSMC, 미국 마이크론, 한국 삼성전자로부터 최근 막대한 반도체 인프라 투자금을 이끌어 내고 있는 일본처럼 작정하고 지정학적 호재를 누릴 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기회주의자적 국익 제고가 패권전쟁의 불확실성을 넘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