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세지향, 퇴행사회> 홍승기 지음, 박영사 펴냄.
저자는 지난 10월 6년만에 대법원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훼손이 아니라며 무죄 판결이 확정된 박유하 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 사건을 보면서 소스라치게 놀랐다는 머리말로 책을 시작한다.
위안부 운동꾼들에게는 ‘반일’이 생계이자 축재수단이자 권력이며 그들에게 종군위안부는 20만 명이어야 하고 모두 총칼에 끌려갔어야 했다. ‘제국의 위안부’는 이들이 창작한 설화의 허구를 지적했다가 사달이 났다는 것이다.
우리사회가 총체적으로 혐오하는 ‘친일잔재’란 정치적 필요에 따라 가공될 수 있는 불확정 개념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그런 측면에서 1948년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도 너무 나갔지만 2005년 출범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역시 외눈박이들이 설익은 폭력을 마구 휘두르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지적한다.
이승만을 지워야 하는 이들
우리사회에는 이승만을 비난해야만 한다는 강박감을 느끼는 지식인들이 적지 않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고 1942년부터 미국은 행정명령에 의해 미국 서부 거주 일본계 미국인 12만 명을 전국 각지 수용소에 격리했다. 적성국 국민이라는 이유였다. 이승만은 당시 미 국방장관에 한국인들 적성국민으로 취급하지 말아달라는 편지를 쓰고 대일투쟁 증거를 제출해 한국인의 강제수용을 막았다.
이승만은 미국의 소리(VOA) 방송에 한국어 방송채널이 개설되게 하고 1942년6월13일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자격으로 항일방송을 시작했다.
그런데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영상물 ‘백년전쟁’은 이승만을 ‘악질 친일파’ ‘A급 민족반역자’라고 표현했다. 정작 아사히신문 논설주간을 지낸 와카미야 요시부미는 이승만을 ‘울트라 슈퍼 반일 주의자’라고 표현했다.
이승만을 ‘악질 친일파’ ‘A급 민족반역자’로 부른 것은 박헌영에서 시작됐다. 1945년 이승만이 귀국하자 조선공산당을 이끌던 박헌영은 이승만의 동의도 안받고 그를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으로 공표했는데 이승만이 주석 취임을 거부하자 태도를 바꿔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1945년 12월20일자 성명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에서 “온 세계를 파괴하는 자도 공산당이요, 조선을 파괴하는 자도 공산주의자”라고 조선공산당과 선을 그었고 박헌영은 사흘 뒤 이승만을 “민족반역자 및 친일파의 수령”이라고 맹비난했다.
1948년2월 UN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 선거를 실시키로 했고 당신 남조선로동당(조선공산당의 후신)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막겠다며 폭동 일으켰다. 당시 슬로건도 “국제 제국주의 앞잡이 이승만, 김성수 등 친일파를 타도하라”는 것이었다. 이같은 입장은 후에 민족문제연구소의 ‘백년전쟁’에서 그대로 계승됐다.
조봉암 법살론(法殺論)도 이승만 비판에 큰 역할을 했다. 3.1운동에 참여하고 임시정부에서도 짧게 활동했던 조봉암은 국회부의장과 초대 농림부장관까지 지냈고 1952년, 1956년 대선에서 진보당 대표로 출마, 모두 2위를 기록하며 이승만의 라이벌로 떠올랐다. 그러다가 1958년 1월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돼 1959년 2월27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돼 7월31일 사형 집행됐다. 2007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조봉암을 제거하려는 이승만 정권의 의도가 그를 간첩혐의로 체포해 재판을 통해 처형에 이르게 한 것”이라며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 탄압 사건으로 규정하고 국가는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총체적으로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정을 했다.
하진만 러시아 국가문서보관소에서 발굴된 구소련의 비밀문서에서 따르면 1956년 5월 실시됐던 한국의 3대 대선을 앞두고 조봉암이 출마의사를 밝히며 김일성에 지원을 요청했고 김일성이 조봉암에게 정치자금을 보냈다는 김일성과 소련 내각 부의장 드리트리 폴랸스키 사이의 대화록이 발견됐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이승만이 거의 지워진 인물이 된 것은 백년전쟁을 기획한 자들이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우파 민족주의자인 백범 김구는 떠받들고 있다. 이유는 이승만의 대척점으로 김구를 소모품으로 설정하고 그를 디딤돌로 하여 김일성으로 건너 뛰겠다는 발상이 아닐까 싶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만주국 장교 출신 박정희
박정희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이들은 그가 일본의 괴뢰 만주국 장교 출신이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만주국이 일본의 괴뢰국임은 부인하기 어려우나 만주국 출신 조선인들 중에는 정치 군사 문화 예술 등의 분야에서 다양한 인재가 있었고 이들이 경험한 계획경제,산업화,도시 개발, 동원체계 등 압축성장의 원형은 60년대 이후 대한민국에서 ‘조국 근대화’로 부활했다.
만주를 경험한 전 일본군 장교들의 작전 능력 없이는 중국과 소련을 뒷배로 한 김일성의 기습공격으로부터 대한민국의 방어는 불가능 했을 것이다.
역사가 강만길은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이 성공했으면 농민들이 그렇게 많이 농촌을 떠났겠느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이는 일종의 억지논리로 새마을운동으로 농업생산성이 높아지면서 농업인구 상당수가 공업인구로 이전해 근대적 경제성장으로 연결된 결과였다.
강만길을 위원장으로 2005년 출범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노무현 시대에 만들어진 ‘친일파’ 낙인찍기 용 국가공인 기구였다. 이들에게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 될 정부이고 김원봉은 국군의 뿌리였다. 하지만 이 위원회는 박정희가 만주국 보병8단에 근무한 것 이상으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를 입증하지 못해 친일파 명단에 박정희를 못올려 못내 아쉬워하기까지 했다.
이후 만주군관학교에 응시하면서 19세 나이제한을 넘겼던 박정희가 목숨이 다하도록 충성을 다 바칠 각오를 혈서로 밝혔던 사실이 만주신문에 게재됐던 것이 드러나며 민족문제연구소는 2009년 사본까지 공개하며 ‘친일인명사전’에 박정희를 등재했다. 하지만 그 시절 일본 조선 대만 등에서 혈서는 간절함을 전하는 메시지로 광범위하게 사용됐었다.
북한이 친일파를 척결했다고?
친일파가 득세한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되었을 국가라고 틈만 나면 읊조리는 인물들이 정치권에 많다. 친일파를 숙청하고 새 나라를 세운 김일성의 북조선이 대한민국보다 우월하다는 허왕한 얘기를 하고 싶어서 안달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파를 비호하고자 반민특위를 무력화했다는 구호는 이제 경전이 됐고 4.3사건을 일컬어 이승만이 제주도 양민을 학살한 데 대한 항쟁이라고 포장하는 세상이다. 1946년 10월 대구 폭동도 대구항쟁이되고 여순반란까지도 여순항쟁이라고 바꿔치기 한다.
당대를 살지 않았던 후배들은 당대를 살아낸 이들 앞에서 역사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그런데 친일파를 혐오한다는 문재인 정부는 검찰 수사권을 박탈하여 친일파 시비의 핵심인 친일경찰 후예들에게 몰아주었다. 역사가 도는 것인지, 세상이 도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식민지 시대 무장항쟁을 과장하는 이들은 “북한은 친일파를 척결했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다, 그러나 35년 식민지 경험이 북한을 비껴 갔을 리가 없다. 김일성 일파는 철수하는 일본 기술 엘리트들에게 좋은 대우를 보장하고 그들의 바지춤을 잡았다. 그래서 흥남질소비료공장이 돌아갔고 함흥공과대학이 개교할 수 있었다. 북한에서 청산대상은 친일잔재가 아니라 김일성 신화 조작에 방해되는 혁명동지들이었다.
인촌 김성수도 친일, 그럼 손기정은?
동아일보를 창간한 인촌 김성수는 1955년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고 1962년 언론 교육 분야 공로로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됐다. 그런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했고 그의 후손이 결정처분 취소 소송을 냈으나 2017년 대법원은 청구를 기각했다. 이어 2018년 국무회의는 서훈 56년만에 인촌의 서훈 취소를 결정했다. 일제말 총동원체제에서 학도병지원 징병제 참여 독려 글을 쓰고 친일단체에 이름을 올렸으니 반민족행위라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인촌은 대한민국 건국에 크게 공헌했고 좌우와 무관하게 일제의 쇠사슬을 끊어 버리려는 목표를 가진 이들을 도왔다. 그와 몸을 부딪치며 그와 숨을 섞으며 그와 함께 부대끼던 당대의 판단을 두 세대가 지나 과거를 재단하는 법을 만들어 뒤집었다.
화가도 예외는 아니다. 1971년 예술원상, 72년 5.16 민족상을 수상하고 2000년 김대중 대통령 시절 금관문화훈장을 받은 월전 장우성은 충무공 이순신, 유관순,윤봉길, 강감찬 등 7명의 국가표준 영정을 그렸다. 충무공 영정은 1973년 표준 영정 제1호로 지정됐다.
그런데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월전이 조선총독부 주최 조선미술전람회에 4회 연속 특선을 해서 추천화가가 됐고 1943년 선전 최고상을 받은 뒤 1944년 군국주의 강조를 위한 반도총후미술전에 출품했다는 이유로 그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했다.
하지만 월전은 한국화에서 일본화풍을 배격했다는 평가를 받는 화가다. 그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조선인으로 처음 수상한 것은 반가워할 일이지 탓할 사정은 아니다. 대표적인 친일문제 연구자 임종국이 쓴 ‘황국신민화 시절의 미술계’에서도 월전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문화재청은 그가 그린 영정 교체를 주장하고 일부 정치권과 시민단체며 관변언론이 이를 토대로 칼춤을 춘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생은 어떤가. 그는 일본 국적으로 출전해 KITEI SON이라는 일본이름으로 뛰었고 히틀러와 독대도 했다. 그렇다면 그는 친일행적에 친나치행적까지 한 것 아닌가.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의 친일 친나치 행적을 시비하는 이들이 손기정 선생에는 왜 대들지 않는가.
만들어진 독립운동가들...누가 애국자이고 누가 친일파인가
독립유공자로 분류되는 사람들도 실제로는 인우보증식으로 누구 실세가 동원돼 된 경우도 있고 장준하 선생의 자서전에 나오듯이 일제 강점기 아편장사나 포주들까지도 해방이 되자 하루 아침에 광복군 모자를 쓰고 독립운동가, 망명가를 자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장준하 선생의 자서전에 따르면 임시정부나 광복군도 이름에 비해 기구나 인원이 너무 약해 아무나 들어오면 귀히 맞아들여 과거를 불문하고 광복군 모자를 하나씩 씌워 주었다고 한다.
소설가 정을병은 소설가협회장 시절 한 사람이 찾아와 정말 먹고 살기 힘든데 항일운동을 했다고 보훈처가 인정해주면 밥은 굶지 않는다며 중학교 때 동네 뒷산 나무껍질에 ‘조선독립만세’라고 썼다가 일본 경찰에 끌려간 적이 있다며 유명한 글쟁이인 내게 신청서를 좀 잘 써달라고 해서 단편소설을 하나 써줬더니 정말 항일애국자가 되어 죽을 때까지 연금을 받았고 죽으니 항일애국자 한분이 돌아가셨다고 기사까지 나오더라고 전했다.
정을병은 매국을 하고 애국자가 된 경우도, 애국자이면서 친일파로 된 경우도 많을 것이라며 차라리 일본 자료를 찾아 그들의 시각에서 본 팩트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기도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를 법개정으로 더욱 확대했고 김은희 박사는 이런 방식이 북한이 항일빨치산 운동을 신성시하는 것과 놀랍도록 유사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35년간 충량한 식민지 국민으로 살다가, 돌연 전승국 흉내를 내며 ‘돌격 앞으로’를 부르짖는 얼치기들이 넘쳐나는 사회가 바로 우리나라다.
일본에 대한 끝없는 열패감
문재인 전 대통령은 일본을 향해 “다시는 지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자유와 민주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이웃 국가를 향해 TV 카메라 앞에서 일국의 대통령이 한 말이다.
독립기념관 본관 바깥에 조선총독부 건물의 석재를 뜯어 조성한 공원 안내판에는 “독립기념관은 조선총독부 건물 잔해를 최대한 홀대하는 방식으로 전시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김철 연세대 명예 교수의 ‘우리를 지키는 더러운 것들’은 애써 脫식민지를 거역하는 우리사회의 모습을 조롱한다. 그는 일제강점기라는 용어에 대해 “자신의 과거를 직시하고 싶지 않은 욕망, 과거의 진실과 마주하고 싶지 않은 초라한 욕망의 단적인 표현”이라고 했다. 용어를 통해 식민지 지배를 교전상태에서의 일시적 점령인 양 조작하고 식민지를 살았던 수천만명의 삶을 특정한 목적에 맞추어 재단하는 타자화의 폭력을 행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국가나 정부의 사과에 ‘진정성’을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런 요구 자체가 진정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1972년 한글학회가 발간한 한글학회 50년사 머리말은 “한글학회는 민족정신을 파괴하려는 침략자의 마수에서 민족을 지키려는 데에 근본 목적이 있었다.(중략) 한글학회의 역사는 일제에 대한 무기 없는 투쟁이었다” 라고 돼 있다.
이에 대해 김철 교수는 “최현배를 중심으로 한 조선어학회 사건 이전, 조선어학회가 조선총독부와 대립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1938년 이후 조선어 폐지와 국어상용 정책이 시행되는 기간에도 침묵을 지켰다. 동시에 기관지인 ‘한글’에서 매년 1월 신년봉축사를 싣고 ‘국민정신총동원 총후보국강조주간에 대하여’, ‘제36 해군기념일을 맞음‘ 같은 글을 통해 노골적인 전쟁 협력 행위를 한 사실 등은 깨끗이 망각되었다”고 해설했다.
식민지 시절 창간됐던 조선일보 동아일보는 1940년 모두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됐다. 총독부의 시정을 신랄하게 비판하다 발행정지 압수 등을 당하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폐간을 결정한 것이다. 정론직필은 정간 폐간으로 이어지던 시절이었고 일본의 아사히 신문조차 전황에 따라 논조가 오락가락했다.
광화문 한국금융사박물관 앞 작은 쉼터에는 토착왜구 조선·동아일보를 비난하는 현수막이 있고 팻말을 든 노인들도 보인다. 식민지 시절 ‘천황’기사를 예쁘게 쓴 일이 있으니 폐간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신문은 폐간해야 한다고 수선떠는 이들 영감님들의 아르바이트 출처는 어딜까. 그것이 궁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