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16일(현지시간) 역내 5G 통신망에서 화웨이 및 ZTE 등 중국 기업의 장비를 배제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하자 정국이 출렁이고 있다.
그 연장선에서 일각에서는 화웨이 등 중국 기업이 사실상 국제적 왕따로 전락했으며 지금이라도 화웨이를 '손절'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다만 유럽연합의 최근 행보를 두고 ICT 자립 의지 차원에서 나온 일시적 현상이라는 반론도 만만치않다.

유럽, 이빨 드러내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미국은 중국과 패권전쟁을 일으키며 화웨이에 대한 강력한 압박에 나섰다. 런정페이 화웨이 창업주의 딸인 현 순환회장 멍완저우가 캐나다에서 발이 묶일 정도로 압박의 강도는 상당했다.
그렇다면 유럽의 기조는 어떠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압박 속도조절'에 나섰다. 동맹인 미국과 함께 화웨이를 압박하기는 했으나 일정정도 여지를 남기는 미묘한 스탠스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2020년 1월 역내 네트워크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며 안보 위험이 있는 공급자에 대해서는 핵심 부품 공급을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 있도록 했으나 명시적으로 화웨이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코어 네트워크에는 화웨이 장비를 사용하지 않아도 그 외 네트워크에는 화웨이 장비 진입을 허가했다는 평가가 중론이다.
아직 미국이 주장하는 화웨이 백도어 논란의 실체를 확인하지 못한데다 화웨이 장비를 도입함으로서 얻는 이익이 상당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추진된 강력한 자국 보호주의에 유럽연합이 반기를 들었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백도어 논란까지 지피며 유럽도 화웨이 장비 배제에 나서기를 원했던 미국 입장에서는 다소 허탈한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 파이브 아이즈 중 하나인 영국은 화웨이와 더욱 노골적으로 협력 전선을 구축했다. 당시 브렉시트를 앞 둔 불확실한 상황에서 화웨이와의 협력을 통해 중국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의지가 강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가이드라인이 발표된 후 불과 한 달이 지난 2020년 2월 영국 정부의 선임 보안 책임자가 더 메일 온 선데이 기고를 통해 “국가 안보와 영국에 대한 경제적 이익 사이의 균형은 우리가 관리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강조할 정도로 미국의 압박을 배제하고 화웨이의 손을 잡으려는 의지는 강했다.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보리스 존슨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미친듯이 화를 냈다는 파이낸셜타임즈의 보도가 나온 것도, 영국 런던에 화웨이 5G 이노베이션 & 익스피리언스 센터 설립이 발표된 것도 이 즈음이다. 이어 영국을 시작으로 네덜란드, 나아가 중국의 일대일로와 관련을 맺은 이탈리아 및 동부 유럽이 미국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속속 중국 화웨이와 손을 잡았다.
반전은 홍콩 민주화 시위 및 코로나19 팬데믹 정국의 본격화다.
중국이 '세계의 적'으로 부상하자 유럽도 화웨이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에 대한 더욱 강한 압박에 나섰으며 유럽도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라는 대의명분에 집중하며 미국과 단일대오를 굳건히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네트워크 구축에 있어 화웨이 장비가 눈에 띌 정도로 배제되기 시작했다. 그 연장선에서 지난 4월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안보 경각심이 커진 독일이 자국 네트워크에서 화웨이 장비를 본격적으로 내몰기 시작했고 포르투갈도 비슷한 정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바이든 행정부도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 강경 정책을 이어받은 가운데 유럽연합 진햅위원회가 최근 화웨이의 등에 제대로 칼을 꼿았다. 화웨이 배제 방침을 선언하며 강경대응을 택했기 때문이다.
이미 덴마크와 스웨덴,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 이어 영국마저 화웨이 장비를 완전히 배제한 상태에서 티에리 브르통 유럽연합 내부시장 담당 집행위원은 "유럽연합 회원국의 3분의 1만 화웨이 장비 사용을 금지했으며 이는 너무 적은 숫자"라며 "이는 유럽 전체의 안보를 (위험에) 노출하는 것"이라 강조했다.
역내에서 화웨이 장비를 완전히 배제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골자다.
유럽의 이러한 초강수 배경에는 백도어 논란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과 더불어, 화웨이에 대한 높은 의존도를 우려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실제로 현지 언론에서는 유럽연합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치며 러시아에 의존하던 에너지 인프라로 고통받은 가운데, 화웨이에 대한 과도한 네트워크 의존을 줄이기 위해 이번 조치를 강행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유럽의 통신 컨설팅기업 스트랜드 컨설턴트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유럽 31개국 5G 장비의 50% 이상을 화웨이 등 중국 기업이 공급하고 있으며 독일과 영국, 프랑스 등 주요 유럽국가의 5G 무선망에서 각각 59%, 41%, 17%가 화웨이 등 중국 기업 장비다. 이러한 의존도가 유럽에 위험요소가 될 것이라 판단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화웨이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즉각 성명을 내어 "유럽연합 집행위 대표들의 발언에 강력히 반대하며 동의하지 않는다"면서 "차별적 판단에 근거한 (화웨이 장비의) 제한이나 배제는 경제·사회적으로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2023년 유럽연합의 화웨이 배제 명분은 자신들이 2020년 인정하지 않았던 백도어 논란에 바탕을 둔다. 이에 화웨이는 "증거가 없다"면서 강력히 반발하는 것이 현재까지의 상황이다.

디커플링에서 디리스킹인데...왜?
유럽연합이 희토류 및 리튬 등 핵심광물을 여전히 중국에 의존하면서도 화웨이 배제를 선언하자 업계에서는 "화웨이가 왕따로 전락했다"는 반응이 나왔다. 유럽마저도 화웨이를 버렸으며, 이제 화웨이는 중국과 함께 미국 등 서방세계의 강력한 공세에 밀려나갈 일만 남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오히려 상황이 더 나빠질 가능성도 있다. 유럽연합이 백도어 등의 문제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혹은 반도체 및 ICT 협력 차원에서 디리스킹 분위기를 거슬러 미국과의 연대에 더 무게를 둘 경우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디리스킹 자체가 폐기될 소지도 있고 미중 패권전쟁이 더 심해질 경우의 수도 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향후 통신서비스 관련 역내 공공입찰 시 화웨이와 ZTE 참여를 금지할 것이라고 예고한 상태에서 화웨이 완전 퇴출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
다만 이러한 흐름은 최근 미중 패권전쟁 분위기와 다소 동떨어져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의 최근 메시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장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은 18일(현지시간) 미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에 출석해 "미국과 중국 간 무역 문제와 관련해 디커플링(decoupling)은 큰 실수"라면서 디리스킹(de-risking), 즉 위협을 제거하는 쪽에 무게를 싣는 발언을 했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18일(현지시간) 미국 국무장관으로는 5년 만에 중국을 방문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친강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과 양국 외교장관 회담을 갖는 가운데 양국의 극적충돌이 아닌 소위 레드라인 구축과 마지노선 확인을 시도하는 장면을 연출했기 때문이다. 이 역시 중국을 배제하는 디커플링이 아닌, 중국과의 협력을 전제로 위협만 핀셋으로 제거하는 디리스킹의 연장선이다.
디커플링이 아닌 디리스킹은 일종의 공존이며, 느슨한 화합으로 볼 수 있다. 비록 미중 패권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양국이 최소한의 '엑시트 전략'을 만들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미 민간 영역에서는 일론 머스크 CEO가 지난달 말 방중해 중국 부총리와 각료 3명 등 핵심 수뇌부와 연이어 회동한 가운데 최근에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가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과 만났다. 강력한 인플레이션의 시대를 맞아 미국도 중국과 손을 잡는 쪽으로 미약하게나마 이동하는 분위기다.

지난 5월 OECD 정상회담 이후 이러한 흐름이 더욱 고조되는 가운데 미국에 이어 다른 나라들도 중국과의 디리스킹에 적극 나서고 있다.
당장 화웨이 장비 배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독일 연립정부도 14일(현지시간) 내각회의를 통해 사상 첫 국가안보 전략을 발표하며 중국에 대해 디커플링이 아닌 디리스킹 전략으로 일관할 것이라 발표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기자회견을 통해 "중국은 계속 경제성장을 할 것"이라며 "안전 문제에 대해서는 자문해봐야 하지만 균형을 유지하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디리스킹 정국이 이어지는 가운데 업계에서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올해 6월 화웨이 배제 추진이 다소 어색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과 유럽 등 서방이 중국과의 공존을 전제로 하는 디리스킹을 핵심으로 삼은 상태에서 강력한 화웨이 압박에 나선 것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일각에서 유럽연합의 이번 방침을 두고 입체적인 접근을 주문하는 이유다.
먼저 유럽연합이 화웨이에 크게 의존하는 상태에서 화웨이의 강력한 기술력을 배제하기는 어렵다는 주장도 나온다. 실제로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화웨이 장비 배제 촉구를 발표하기 불과 며칠 전, 현지 언론은 화웨이가 11개 프로젝트로 구성된 유럽연합의 최대 연구혁신 프로그램 '호라이즌 유럽'에 참여해 389만유로를 지원받았으며 이는 프로젝트당 14%에 달하는 비율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유럽과 화웨이의 물밑 협력은 아직도 진행중이라는 뜻이다. 이는 화웨이의 강력한 기술력을 유럽연합이 당장 포기할 가능성이 낮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화웨이의 기술력은 정평이 났다. 지난 3월 런정페이 화웨이 창업주는 상하이 지아통대학에서 열린 좌담회에서 "지난해 화웨이의 연구개발 경비가 238억달러에 달한다"면서 "20년간 기초 이론 관련 준비를 했고, 거액을 들여 기초 이론을 연구하는 과학자와, 노하우를 갖춘 전문가를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화웨이의 지난해 연구개발 지출액은 연간 매출의 25.1%를 차지하는 약 30조5444억원에 달하며 지난 10년 간 전체 연구개발 지출액은 무려 184조8367억원을 넘어선 상태다.
미국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최선의 성과를 내고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당장 CNBC는 화웨이가 미국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14나노 반도체 설계장비 자체개발에 성공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비록 14나노 반도체 설비는 최신 설비가 아니지만, 미국 설비 의존도를 낮출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런 창업주는 “지난 3년간 중국 내부에서 1만3000개의 부품을 조달해 대체했으며 4000개 정도의 회로 기판도 재설계했다”며 “회로 기판의 성능이 매우 안정적”이라고도 설명했다.

변수는 유럽의 ICT 자립 의지
유럽에서 화웨이 논란이 커지는 가운데 결국 사태의 관건은 유럽의 ICT 자립 의지에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사실 유럽은 오랫동안 ICT 자립 의지를 불태운 바 있다. 필요하다면 미국 기업과의 충돌도 불사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메타에 대한 과징금 부과다. 아일랜드 데이터보호위원회(DPC)는 지난달 22일(현지시간) 메타를 대상으로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을 이유로 12억유로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나아가 6개월 이내 이용자들의 데이터를 미국으로 전송하는 것을 중단하고 관련 데이터를 삭제하라고 명령했다.
12억유로라는 과징금은 개인정보보호와 관련해 부과된 벌금으로는 역대 최고다. 이에 앞서 유럽연합 전체로 봐도, 유럽은 끊임없이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들을 압박하고 규제하며 천문학적인 과징금을 부과한 바 있다.
유럽연합이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들에 과징금과 더불어 '초유의 기업 쪼개기'까지 나서는 배경에는 데이터 주권과 관련된 민감한 이슈가 있다. 구글과 메타, 아마존과 같은 미국 기업들이 유럽 ICT 시장을 장악해 유럽인들의 데이터를 가져가고 궁극적으로 시장을 장악할 것이라는 공포가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럽사법재판소는 유럽과 미국을 오가는 데이터와 관련된 약속인 세이프 하버(Safe harbor) 협정을 두고 2015년 유럽인들의 개인정보를 보호하지 못한다고 판단해 폐기했으며, 미국과 유럽연합이 2016년 프라이버시 실드'(Privacy Shield)를 통해 개인정보전송에 있어 사생활 보호를 강화한 조치에 재차 협의했으나 이 역시 2020년 유럽사법재판소가 무효라 선언하기도 했다. 지난해 미국과 유럽은 새로운 협상에 돌입했으나 가시적인 성과는 내지 못한 상태다.
유럽의 ICT 자립에 대한 의지는 산업의 쌀인 반도체 자립 전략에서도 읽힌다. 몇 번의 보완과정을 거쳐 지난 4월 430억유로를 투입해 자체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는 유럽연합 반도체법 제정에 합의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흐름속에서 화웨이에 대한 압박도 결국 유럽의 자체적인 ICT 자립 의지에 따라 출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난 2019년과 2020년 미국의 반대에도 화웨이의 손을 잡았던 것처럼, 지금은 비록 화웨이 배제 방침이 선명하지만 추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뜻이다.
심지어 지금은 ICT 블록화 시대의 초입이다. 글로벌 공급망이 붕괴된 후 각 블록별 경제가 가동되는 가운데 내부에서의 '자생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그 중심에서 매출의 20%를 연구개발비로 쓰며 여전히 강력한 기술력을 가진 화웨이는 유럽에게 여전한 활용가치가 있다는 평가다. 디리스킹의 시대적 변화와 더불어 눈여겨 봐야 할 포인트라는 말이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