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카드 발급이나 은행 대출은 아무리 우리가 이를 원해도 카드사나 은행이 거절하면 불가능하다. 금융회사들은 상환능력과 신용 등을 감안해 나중에 돈을 제대로 갚지 못할 것 같으면 카드 발급이나 대출을 해주지 않는다.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의 수입이나 재산 상태를 감안해 지출 규모를 결정하는 것은 무작정 펑펑 쓰다가는 신용불량자가 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일상생활이 무척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가는 좀 다르다. 자체적인 화폐발행권을 갖고 있는 국가는 수입보다 지출이 좀 많아도 직접적으로 이를 제지하거나 통제하는 기관이 없다. 통화 증발에 따른 부작용 같은 것은 일단 논외로 하고 국가는 돈이 부족하면 일단 더 찍어내면 당장 급한 불은 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가 역시 마냥 계속해서 돈을 찍어낼 수만은 없다. 국가가 돈을 찍어내려면 국채를 발행해 중앙은행에 맡겨야 한다. 국채는 나라의 빚이다. 어느 정도까지의 나라 빚은 대다수 나라에서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적잖은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국가의 신용도가 떨어진다. 국제신용평가사 등은 기업 뿐 아니라 국가의 신용등급도 매기는데 특정 국가의 빚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국가 신용등급이나 신용등급 전망을 낮춘다. 그러면 해당 국가의 통화가치는 떨어지게 된다. 그 정도가 심해지면 무역및 자본거래에서 막대한 환차손을 입게 되고 외환보유액 역시 급속히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국가 신용이 크게 떨어지면 해외에서 돈을 꾸기도 어려워진다. 이른바 국가부도 위기에 몰릴 수 있다. 2011년 유럽 재정위기가 이런 과정을 밟았고 국가부도 위기를 겪었거나 겪고 있는 남미의 여러 나라들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볼 수 있다.
한국은 어떨까. IMF(국제통화기금)은 지난달 한국의 나랏빚이 이미 너무 많은데다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라며 일종의 경고장을 보냈다. IMF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일반정부 부채(D2) 비율은 54.3%로 추산됐다.
일반정부 부채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채무를 합한 국가채무(D1)에 비영리 공공기관 채무를 합한, 보다 넓은 의미의 나랏빚이다. 세계적으로 국가 간 재정건전성을 비교할 때 통용된다. 한국의 지난해 일반정부 부채비율은 비기축통화 10개국 평균인 52.0%보다 높다. 비기축통화국 평균을 웃돈 것은 지난해가 처음이다. 비기축통화국은 미국 달러나 유로, 일본 엔, 영국 파운드와 같은 기축통화를 사용하지 않는 나라들이다.
IMF는 현 추세라면 이 같은 역전 현상이 한 동안 지속되는 것은 물론, 격차가 더 벌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IMF는 올해 한국의 일반정부 부채비율은 지난해보다 1%포인트 높아진 55.3%로 예측했다. 이는 지난해 10월 보고서에서 예측한 것보다 0.9%p 상향 조정한 것이다. 내년에는 55.9%, 2025년 56.6%, 2026년 57.2% 등 지속적으로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반면 10개 비기축통화국 평균은 꾸준히 하락해 2025년에는 50%를 하회(49.7%)할 것으로 예상했다. 여타 국가들의 나랏빚은 줄어들 것으로 예상한 반면 한국의 나랏빚은 점점 늘어날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이라고 우쭐하고 있던 한국이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됐을까.
1997년 외환위기는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한국은 비교적 단기간 내에 이를 극복해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재정 건전성’ 때문이라는 분석이 적지 않다. 일시적으로 외환이 부족해 위기를 맞았지만 나라 살림이 튼튼하다 보니 국제사회에서도 신뢰가 곧 회복됐고 이것이 위기 ‘조기졸업’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한국의 GDP 대비 국가채무(D1) 비율은 2018년까지만 해도 30% 중반 대를 유지했다. 그러던 것이 2019년 이후 매년 급등세를 보이더니 지난해에는 49.6%까지 높아졌다. 일각에서는 지난해말 수정된 정부의 경제전망치를 대입하면 지난해 이미 50%를 넘었다는 분석도 제기한다.
지난 정부 내내 빚을 내 선심성 사업을 벌인 결과다. 지난 정부 출범 전 600조원 대였던 국가 채무는 임기 중 1000조원을 넘어섰다. 추가경정예산만 10번 집행됐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재난지원금도 살포됐다. 올해 국가 채무는 1134조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재난지원금과 같은 현금 살포는 받는 국민들 입장에서는 ‘공짜 돈’이 생기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현금인출기에서 현금서비스로 돈을 뽑아 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재난지원금은 대부분 나라가 빚을 내서 마련한 돈이고 그 빚은 결국 국민들이 이자까지 합해 두고두고 갚아야 한다.
내년 만기가 돌아오는 국채만도 92조원이고 국가부채 이자로 지불해야할 금액만도 25조원이 넘는다. 올해부터 5년간 정부가 갚아야 할 국채 규모만도 373조원에 이른다. 나랏빚을 갚기 위해 또 빚을 내는 차환용 국채도 올해 106조원어치나 발행해야 한다. 이 모든 부담은 돈 뿌리며 선심 쓴 정치인들이 아닌, 국민들 몫이다.
돈 나갈 데는 많은데 경기침체 탓에 국세수입은 빠르게 쪼그라들고 있다. 올해 1∼3월 국세수입은 87조1000억 원으로 전년(111조1000억 원) 대비 24조 원이나 줄었다. 1~3월 세수 감소 폭으로는 역대 최대다. 소득세·부가가치세·법인세 등 전 세목에서 고르게 줄고 있다.
정부는 당초 올해 경기가 상저하고를 보여 세수도 하반기로 갈수록 늘어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1분기가 지나서도 경기가 살아날 조짐이 없어 하반기 세수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특히 3월 세수 진도율은 21.7%다. 지난해 3월의 28.1%는 물론이고, 최근 5년 평균 3월 진도율 26.4%를 크게 밑도는 수준이다.
나랏빚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나라의 수입은 계속 줄어들고 있으니 여간 심각한 상황이 아니다. 나라 돈의 씀씀이를 법으로 규제하는 재정준칙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최근 여기저기서 나오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재정건전성 회복을 위한 재정준칙 도입 논의는 전임 정부 때인 2020년 10월 시작됐지만 이렇다할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 “새 정부 출범 1년 내 책임 있는 재정준칙을 마련해 국가채무를 관리하겠다”고 재정준칙 법제화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관리재정수지 적자폭을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로 제한하고, 국가채무비율이 60%를 넘길 때는 적자 한도를 2%로 억제하는 내용의 국가재정법 개정안은 지난해 9월 정부 발의로 국회에 제출됐지만 국회 문턱을 못 넘고 있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사회적기업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사회적 경제기본법과의 연계처리를 주장하며 법안의 발목을 잡고 있다. 집권 시절 온갖 포퓰리즘 정책으로 국가 재정을 위기로 몰아넣더니 재정준칙 도입을 볼모 삼아 또 다른 포퓰리즘 정책을 밀어붙이겠다는 것이다.
지금 재정준칙 법제화는 정쟁이나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국가의 명운이 걸린 시급한 일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재정준칙이 없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튀르키예 뿐이다. 재정위기를 겪었던 남유럼 PIGS 국가들도 모두 재정준칙을 갖고 있다.
한국에 재정준칙이 특히 필요한 이유는 원화가 기축통화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기축통화국에 재정위기가 발생하면 화폐가치 급락으로 심각한 경제위기를 맞을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기축통화국인 미국조차 정부의 부채에 한도를 정해 놓고 있으며 이를 상향 조정하려면 의회의 승인을 받도록 하고 있다. 재정건전성이 모든 국가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최근 미국 하원에서 야당인 공화당이 부채 한도를 높여주는 대신 정부 예산을 대폭 삭감하겠다고 하자 바이든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를 예고해 이르면 6월 미국 정부가 디폴트에 빠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사실 미국 정부가 디폴트에 빠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과거에도 부채 한도 상향을 둘러싼 여야간 공방으로 비슷한 상황이 수차례 있었지만 대부분 디폴트 이전에 타결됐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디폴트 위험이 거의 없는 미국이지만 연방 정부의 디폴트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만으로도 국가 부도위험 지표인 미국 국채의 CDS(신용부도스왑) 프리미엄이 최근 급등했다는 점이다.
세계 최고 경제대국이자 기축통화국인 미국의 금융시장조차 ‘디폴트 가능성’ 만으로도 적잖은 충격을 받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한국의 경제규모는 미국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되며 한국은 기축통화국도 아니다. 그런데도 미국처럼 나랏빚을 통제하기 위한 최소한의 법적 장치도 없다.
최근 외환시장에서는 유독 원화가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미국의 금리인상이 거의 끝나감에 따라 미국 달러화가 약세를 지속하는 와중에 한국의 원화는 그런 달러화에 대해서도 약세를 지속하고 있다.
원달러 환율은 지난달 28일 1337.7원에 마감돼 4월 한달간 2.7% 올랐다. 그만큼 달러화 대비 원화 가치가 떨어졌다는 얘기다. 이는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달러 지수를 산출할 때 활용하는 주요 교역국 26개국 가운데 달러 대비 세 번째로 큰 하락 폭이다.
같은 기간 원화보다 더 크게 가치가 떨어진 통화는 만성적인 경제난을 겪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페소(-6.1%)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러시아의 루블(-2.8%)밖에 없었다. 일본 엔화(-2.5%)와 중국 위안화(-0.6%), 대만 달러화(-0.7%) 등 아시아 주요국의 통화가치도 원화보다 덜 떨어졌다.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인덱스는 같은 기간 0.9% 하락했다. 일반적으로 달러 가치가 하락하면 원화 가치는 상대적으로 오르는데 4월에는 달러 가치가 떨어졌는데도 원화 가치는 더 큰 폭으로 내린 것이다.
원화 약세의 주된 배경으로 14개월 연속 지속되고 있는 무역적자가 주로 꼽힌다. 물론 무역적자 내지 경상적자가 발생하면 달러 수요가 공급보다 많아지니 원화는 달러 대비 약세를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혹시 나랏빚은 하루가 멀다 하고 급속히 늘어나는데 이를 통제할 마땅한 장치도 없고, 정치인들은 나랏빚 걱정보다는 온통 정쟁과 퍼주기에만 목을 매고 있는 한국을 이미 나라 밖에서는 매우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시각이 ‘셀(sell) 코리아'로 이어지고 원화 가치 추락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기우일까.
지나치게 불어난 나랏빚에 대한 경고음이 여기저기서 울리고 있지만 이를 통제할 법적 장치를 마련해야할 정치권은 정작 큰 관심이 없는 듯하다. 특히 표(票)가 걸린 일이라면 빚을 내서라도 돈부터 퍼주는데 혈안이 되는 것은 여야가 따로 없다.
2022년도 예산안이 국회를 통과한 지 불과 한 달 만인 지난해 초 추가경정예산안이 국회에 올라온 것은 당시 대선을 코앞에 두고 여야 모두 ‘표’에 눈이 어두워 나라를 빚더미로 몰아가는데 사실상 공조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작태는 새 정부 들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포퓰리즘성 법안을 또 다시 남발하는 중이다. 결국 국회에서 부결되기는 했지만 매년 1조원 가량의 세금으로 남는 쌀을 다 사주는 양곡관리법을 일방 처리했고 ‘문재인 케어’로 악화된 건강보험 재정을 세금으로 메워주는 법안, 기초연금 40만원 인상, 청년에게 매달 10~20만원의 수당을 주는 청년기본법 등 퍼주기 입법 폭주에 몰두하고 있다.
재정준칙 법제화를 추진하고 있는 여당도 총선이 가까워지자 야당에 제동을 걸기보다는 은근슬쩍 퍼주기에 동참하는 분위기다. 야당과 ‘1000원 아침밥’ 확대 경쟁을 벌이는가 하면 지역 사업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기준을 1000억원으로 올리는 데 야당과 합의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5월 임시 국회에서 여야가 재정준칙 법제화에 합의할 가능성을 제기한다. 하지만 여러 면에서 궁지에 몰리고 있는 야당이 사실상 ‘퍼주기 자제법’인 재정준칙에 손을 들어줄 지는 의문이다. 여당 역시 총선을 앞둔 상황이라 생각보다 적극적이지 않다. 그래서 중요한 건 국민 여론이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재정준칙이 국회를 통과하려면 “여론의 기적이 필요하다”고 최근 말한 것도 바로 그래서다.
국민 여론이 바뀌기 위해서는 재정을 동원한 ‘표(票)팔이 내지는 퍼주기’의 실체부터 낱낱이 까발려져야 한다. 정치인들은 마치 자신들이 국민을 위해 공돈을 주는 것처럼 선전하지만 실상은 이와는 정반대다. 펴주기에 쓰이는 나라 빚은 결국 모두 국민들이 두고두고 갚아나가야 할 국민들의 빚이다. 생색은 정치인들이 내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는 얘기다.
더 큰 문제는 그런 나라 빚이 쌓이기 시작하면서 국가경제 전체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도 국가채무는 1분에 1억2700만원씩 불어나고 있다. 남 얘기가 아니라 국민 모두가 지고 있는 등짐이 시시각각 무거워지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그래야 정치인들도 긴장하게 되고 나라도 바로 설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