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도요타, 일본제철과 함께 일본 제조업의 트로이카로 불렸던 도시바. 2016년 12월 27일 도시바는 긴급회견을 열고 원자력 부문 자회사인 미국 웨스팅하우스(WH)가 수천억엔의 손실을 입었다고 발표했다. 이외 구체적 설명은 없었다. 

주요 신용평가회사는 다음날인 28일 일제히 도시바의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했다. 신용등급의 강등은 새로 대출을 일으키는 것과 변제 기한을 연장하는 것이 어려워졌다는 의미다. 

2017년 1월 10일 도시바는 주요 금융회사를 대상으로 대규모 손실의 경위를 설명하고 신용등급 하락에 대해 사과한 다음, 대출 거래 잔고 유지를 요청했다.

2015년 7월21일 회계부정에 연루된 도시바 그룹 사장과 임원이 허리를 굽혀 사과하고 있다. 출처 :연합뉴스
2015년 7월21일 회계부정에 연루된 도시바 그룹 사장과 임원이 허리를 굽혀 사과하고 있다. 출처 :연합뉴스

도시바의 손실액은 발표 당시 3000억엔(약 3조원)으로 추정됐지만, 이후 7000억엔(약 7조원)으로 수정됐다가 결국 2017년 3월 결산 결과 9660억엔(약 9조6000억원)으로 훌쩍 뛰었다.  

상장폐지 기로에 섰던 도시바가 선택한 것은 키오시아(옛 도시바 메모리) 지분 50%를 SK하이닉스를 포함한 한미일 컨소시엄에 매각하는 것과 6000억엔(약 6조원) 규모 3자배정 유상증자였다.

그런데 이 3자배정 유상증자의 대상은 에피시모 캐피탈(최대주주, 9.91%), 3D인베스트먼트(7.20%), 팰러론(5.37%) 등 행동주의를 표방하는 소위 '말하는 주주'였다. 이들 지분의 합계만 약 22.48%에 달했다.

2020년 7월 도시바 주주총회에서는 자회사의 부정거래 관련 사안을 두고 최대주주인 에피시모 캐피털과 경영진이 충돌하기도 했다. 당시 니혼게이자이신문 등 현지 매체들은 도시바의 연결 자회사인 도시바IT서비스 등이 수년간 가상거래, 순환거래 등을 이어왔고 이와 관련한 가공매출 규모가 400억엔(약 4000억원)이 넘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사태 이후 에피시모 캐피탈 등 행동주의 펀드들은 제 3자의 입장에서 경영을 감시할 수 있도록 하는 안건을 제안해 주총에서 통과시켰다.

이후 이들이 선임한 변호사들로 구성된 도시바 거버넌스 강화위원회는 2021년 6월 "도시바가 일본 경제산업성과 연계해 주주권한을 침해했다"는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일본 경제산업성(한국의 산업통상자원부)이 도시바 경영진의 요청을 받아 하버드 대학기금(지분 4.3%) 등 외국 주주들에게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주주들에게 동조하지 말아달라'는 취지의 부당한 압력을 행사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일본 정경 유착의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됐다.

주목할 점은 도시바의 주가 추이다. 에피시모 캐피탈 등으로 구성된 외국계 행동주의 주주들이 2020년 7월 도시바 주주총회에서 경영진과 충돌한 이후 2021년 6월 거버넌스 강화위원회의 감사 결과가 발표될 때까지, 여지껏 주당 3500엔에서 등락하던 도시바 주가는 주당 5000엔선으로 상승세를 이어갔다.   

이를 두고 금융투자 업계에서는 도시바의 경영 불투명성을 개선하기 위한 표결을 시작했던 시점부터 이미 주가에 긍정적 기대감이 반영된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불투명한 경영이 의심되는 기업에 있어 행동주의 펀드가 요구한 외부 감사가 시작된 것만으로도 주가 상승 기대감이 커진 사례다.

 

반면, 일각에서는 도시바가 2017년 상장 폐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행동주의 투자 펀드 등으로부터 긴급 수혈을 받은 게 오히려 독이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주주 환원 극대화'를 요구하는 행동주의 주주들과의 마찰로 회사 분할 등 경영정상화를 위한 결정이 지연됐을 뿐 아니라 2018년 이후 주주환원에 쓴 자금만 8500억엔(약 8조5000억원)에 달하는 등 경영 자원을 소진했다는 시각이다. 이는 2007년 7873억엔(약 7조8730억원)의 적자를 내고도 공모증자와 사업재편을 통해 자립의 길을 택한 히타치와 비교되는 사례로도 꼽힌다. 

일본 기업들로 구성된 ‘일본산업파트너스(JIP)’ 컨소시엄이 도시바의 경영권을 사들인 후 공개매수를 통해 상장폐지하기로 결정한데 대해 닛케이는 "행동주의 주주가 다수 포진해 혼란스러웠던 도시바의 의사 결정이 보다 원활해질 것으로 보인다"는 기대를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주가 면에서 보면 2017년 4월 2000엔선 밑으로 추락한 도시바 주가는 2022년 6월 6000엔선에 바짝 다가선 이후 글로벌 주식 시장이 조정세를 이어온 최근 1년 동안에도 4000엔 이상을 지켜왔다. 주가만 놓고 판단한다면 행동주의 주주들의 참여는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셈이다.  

최근 국내 증권사들은 행동주의가 주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긍정적 의견을 내놓고 있다. 일각에서는 한국증시의 전반적 저평가,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는데 있어 사모펀드, 연기금 등의 행동주의가 주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나온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흐름과 함께 주주 행동주의를 통해 대주주의 경영상 결정에 대한 감시와 견제 기능이 작동되야할 필요성도 대두되고 있다.  

특히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형 행동주의 펀드, 이른바 K-행동주의 펀드는 해외처럼 ‘공격일변도’로 이익만 좇는 행보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에스엠 경영권 분쟁과 오스템임플란트 인수전을 촉발시킨 얼라인파트너스·KCGI(강성부 펀드) 등 국내 행동주의 펀드는 꾸준히 기업가치 제고를 명분으로 적극적 행동을 펼치고 있다. 기업의 지배구조 문제가 기업가치 훼손으로 연결되는 등 경영진의 잘못으로 주주들의 권리가 침해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는 논리다.

이와 관련 얼라인파트너스는 "한국마켓에 집중하는 행동주의 투자자의 경우, 좀 더 장기적인 관점을 가질 수 밖에 없다"며 "주주행동을 했을 때 실제 회사의 기업가치가 올라가고 그게 유지돼야 다음번 행동주의를 할 때 다른 주주들로부터 또다시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평판이 가장 중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책임감을 갖고 장기적 관점에서 행동주의를 펼칠 수 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올해 3월 키움증권은 '데일리 이슈' 보고서에서 행동주의 펀드의 주주활동 대상이 된 기업들의 주가가 23% 상승(주주활동 개시 시점 대비 최고가 기준)했다는 분석을 내놨다. 보고서는 특히 에스엠의 지분 1.1%를 확보한 후 행동주의 캠페인을 펼친 얼라인파트너스의 사례를 짚었다.

김지현 키움증권 연구원은 "최근 증시 조정에도 코스닥의 하방을 지지해줬던 것은 에스엠에 대한 행동주의 펀드의 지분 확보가 경영권 분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나타난 엔터주의 약진이었다"고 언급했다. 이어 "에스엠의 역사적 신고가 경신은 지배구조 개선에 따른 디스카운트 해소의 업사이드를 보여주는 선례가 됐다"고 평가했다.

KB증권은 올해 2월 발간한 ‘K-행동주의, 행동주의 펀드의 주주 제안이 주목되는 이유’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국내 주주 행동주의 캠페인은 주주가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한 이사진 교체, 배당 증액과 자사주 매입·소각 등 이익의 주주환원 확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주주 행동주의 캠페인의 대상이 된 기업의 주가 수익률을 시장 평균과 비교 분석했다.

비교 대상은 행동주의 펀드의 투자 대상이면서 주주 제안이 제기된 상장기업 17곳을 시가총액에 따라 가중평균한 주가와 ‘WMI500 지수'(금융정보회사 에프앤가이드가 유동성 및 시가총액 기준 상위 500위 종목을 추려 구성한 지수)이며, 시기는 2022년 1월부터 올해 2월 16일까지이다. 이에 따르면, 행동주의의 대상이 된 상장사의 누적 평균 주가수익률이 WMI500 지수 대비 14.3%포인트 웃돌았다.

주가 측면 뿐 아니라 논란이 있는 중대한 경영 방향의 결정에 있어서도 행동주의의 역할이 주목받고 있다. 

트러스톤자산운용은 지난해 12월 태광산업의 흥국생명 4000억원 유상증자 참여를 저지하며 행동주의 펀드의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당시 트러스톤은 흥국생명 주식을 직접 보유하지 않은 태광산업이 흥국생명을 지원하는 것은 태광산업 주주의 이익에 반하는 배임 행위라고 지적했다. 결국 태광산업은 흥국생명 유상증자 참여를 철회했다.

이어 올해 들어 트러스톤은 태광산업과 BYC(비와이씨)에 배당성향 제고 등을 주주제안했지만 부결됐다. 이중 태광산업에의 주주제안은 액면분할, 주당 1만원 현금배당, 자사주 매입 등 3개 안건이 주된 내용이었다. 트러스톤은 BYC의 주총에서는 임원 선임, 배당 확대, 자사주 취득, 주식분할 등 4건의 주주제안을 했다. 제안한 안건은 모두 부결됐지만 트러스톤은 “앞으로도 주주가치 제고와 소수주주의 권리보장을 위해 경영진 견제를 지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간 주주총회에서 거수기 역할만 한다는 비판을 들었던 국민연금 역시 중요한 경영 사안에 있어 대주주에 대한 견제 역할을 강화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크래프톤 정기 주주총회. 출처 : 연합뉴스
크래프톤 정기 주주총회. 출처 : 연합뉴스

올해 2월 국민연금은 현대백화점 임시주주총회에서 이사회가 추진한 한무쇼핑의 인적 분할에 제동을 걸었다. 당초 현대백화점은 지주회사(현대백화점 홀딩스)를 신설하고 알짜 자회사인 한무쇼핑을 지주사 소속으로 인적분할하려고 했다. 한무쇼핑은 현대백화점(46.3%)과 한국무역협회(33.4%)의 합작법인으로 무역센터점, 킨텍스점, 충청점, 목동점, 남양주아울렛, 김포아울렛 등 핵심 점포를 운영해 왔다. 지난해 영업현금흐름은 2100억원에 달했다.

국민연금 수탁책임전문위원회는 올해 2월 10일 열린 현대백화점 임시주총에서 이같은 인적분할 안건에 대해 반대표를 행사했고 이에 따라 찬성이 64.9%에 그치며 '참석 주주 3분의 2(66.7%) 이상 찬성'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국민연금의 현대백화점 지분은 8.03%다.

비록 주주서한 내지는 주주제안 등 본격적인 행동주의에 나선 것은 아니지만 시장에서는 현대백화점의 인적분할을 무산시키는데 국민연금의 역할이 컸다는 분석이다. 알짜 회사 한무쇼핑을 현대백화점에서 떼어내 지주회사로 이전하는 방안에 대한 주주들의 우려가 제기된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소액주주 측에 힘을 실으며 안건 통과를 저지하는데 성공했다는 긍정적 평가가 나왔다.

최근 국민연금이 한국가스공사에 대한 주식 보유 목적(7.56%)을 ‘단순투자’에서 ‘일반투자’로 변경한 것을 두고도 본격적인 행동주의에 나서기 위한 포석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주식 보유 목적 변경 이유가 가스공사의 무배당 정책과 연관돼 있는 것으로 파악되면서 국민연금이 앞으로 가스공사의 경영진을 향해 배당 계획 마련을 요구할 것이란 예상이 나왔다. 국민연금이 지분 보유 목적을 단순투자에서 일반투자로 바꾸면 추가 배당 요구, 배당정책 변경 등 폭넓은 경영 참여가 가능해진다.

한편 행동주의는 궁극적으로는 투자수익만 추구하는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다는 지적도 있다.

남의 돈을 굴리는 운용사의 기본 목표는 투자수익을 내는 것이다. 목소리를 키우기 위해 소액주주 의결권이 필요하지만 무한정 소액주주의 이익만 대변할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실제 오스템임플란트 경영권 인수전에서 KCGI가 발을 빼자 ‘결국 돈이 목적이었나’라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또한 주가부양 측면에서만 행동주의의 명암을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견해도 있다. 행동주의가 저평가된 기업의 가치를 끌어올리는데 영향을 줬다면 일단은 긍정적 평가를 한다. 그러나 기업이 당초부터 저평가됐다고 판단하려면 단순히 재무적 부분만을 놓고 평가하는게 아닌 비재무적 요소도 함께 고려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송홍선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개인적 의견임을 전제로, "기업이 시장에서 적정가치로 평가되고 있는지를 우선적으로 판단해야 행동주의의 영향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 있지만, 비재무적 측면에서도 저평가 요소들이 많다는 점에서 업종마다 각각 다른 시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송 연구위원은 "예를 들어 은행과 일반 기업을 비교하자면, 주가순자산비율(PBR) 등 여러 지표로 볼 때 은행이 저평가된 것은 맞지만 개인 주주가 오너인 일반 기업에 행동주의가 전개됐을 때의 영향을 은행과 동일한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부연했다.   

성장 산업으로 분류됐던 게임, IT 기업들에도 최근 들어 행동주의 바람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주요주주로 올라선 펀드가 아닌 소액주주 연대를 통한 행동주의지만 그 위력은 전문 사모펀드 못지 않았다. 통상 성장 기업의 경우 이익을 쌓은 유보금을 기술 개발 등에 재투자하지만, 소액주주들이 연대한 행동주의는 성장 기업들에 대해서도 주주환원 확대를 이끌어냈다.

올해 4월 3일 컴투스 소액주주 연합인 '컴투스 주주행동 모임'은 회사에 공개 주주 서한을 발송했다. 컴투스의 경영 전략 및 기업가치 제고 실패 원인을 따져 묻는 한편 송병준 의장과 송재준 대표에게 각각 27억원, 14억4000만원의 급여를 지급한 기준을 공개할 것을 요구했다.

이어 컴투스 주주행동 모임은 의결권 위탁 플랫폼 헤이홀더를 통해 주식을 모집하기 시작했고 하루 만에 의결권 2.2%를 확보했다. 상법상 의결권이 있는 지분 3% 이상을 확보하면 주총 안건을 제안하는 주주제안권을 행사할 수 있다. 상법 제 363조의 2에서는 의결권이 있는 발행주식총수의 3% 이상 또는 6개월 전부터 의결권 있는 발행주식총수의 1% 이상 보유한 주주에 한해 일정한 사항을 주총 안건 상정을 제안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컴투스 주주행동 모임이 요구하는 것은 자사주 매입과 감사 신규 선임 등이다. 

소액주주들이 목소리를 높이자 컴투스는 주주환원 정책 마련에 나섰다. 컴투스는 4월 12일 홈페이지에 주주 안내문을 게시하고 "현재의 주가 상황이 주주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중장기적인 회사 성장 비전과 주주가치 제고 방안 등을 언급했다.

지난 3월 28일에는 크래프톤이 96만주(1679억원) 규모 자사주를 매입해 소각하겠다고 공시했다. 취득 목적은 자사주 취득 및 소각을 통한 주주가치 제고다.

앞서 크래프톤의 소액주주들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결집하면서 김창한 대표는 물론 장병규 크래프톤 의장에 대한 재선임 반대 의결권 행사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들이 나선 이유는 주가 하락에 대한 책임을 경영진에게 묻기 위해서다. 크래프톤의 주가는 49만8000원이었던 공모가 대비 60% 가까이 하락한 19만원선에 불과하다.

트러스톤자산운용이 올해 3월 태광산업의 정기주총에서 자사주 매입 등을 제안했지만 부결됐다. 출처 :연합뉴스
트러스톤자산운용이 올해 3월 태광산업의 정기주총에서 자사주 매입 등을 제안했지만 부결됐다. 출처 :연합뉴스

올해 정기주총에서 김 대표는 "주가가 많이 하락했고 지난해 출시한 게임의 성과가 기대에 못 미친 것은 사실"이라며 주주 달래기에 진땀을 뺐다.

결국 크래프톤은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2023년부터 2025년까지 3년간 자기주식을 취득하겠다고 밝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사주 취득 소각을 실제로 공시한 것이다. 

크래프톤은 이번에 사들인 자사주를 전량 소각한 후, 2024~2025년 취득하는 자사주도 최소 60% 이상 소각할 예정이다.

앞서 올해 1월 얼라인파트너스가 7개 은행을 향해 대출 성장을 줄이는 자본재배치를 통해 주주환원을 확대하라고 요구한 행동주의는 해외 은행에 비해 주주환원률이 낮았던 국내 은행의 변화 계기를 이끌었다는 긍정적 평가도 나온다.